<위트레흐트의 성 요한 교회의 실내>는 단색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색채, 곧 흰색에 대한 그림으로 그것의 풍부함과 한 색조에서 다른 색조로의 변화, 물감의 질감 문제를 다룹니다. 교회에 대한 매우 정확한 묘사이지만 지형도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비어 있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작가는 고요함과 공간의 화가입니다.

 

피터르 얀스 산레담, 위트레흐트의 성 요한 교회의 실내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재스퍼 존스의 <하얀 국기>를 떠올립니다. 그의 작품은 전적으로 표면에 주목함으로써 그것은 더 이상 국기가 아닙니다. 국기는 작품을 위한 구실일 뿐입니다.

 

재스퍼 존스, 하얀 국기

 

이 작품에서 나는 교회의 실내를 보고 있다는 인식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의 표면에 대한 응시로 재빠르게 전환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매우 현대적인 그림입니다. 이것은 검정색처럼 천 가지의 각기 다른 흰색이 존재한다는 점을 실증합니다. 175

 

 

 

 

관람객들은 미술관 안에 있는 것들 중 상당수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술 작품에 그저 가벼운 눈길을 보내기만 하면 황홀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끌려 온 사람들이 경험한 죄책감은 얼마나 될까요? 나는 미술이 어렵고 주의깊은 감상과 몰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만드는 것이 어려운 설득 작업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미술관은 어떻게든 직원의 태도와 분위기, 전시연출을 통해서 작품을 기꺼이 예리하게 보고자 한다면 큰 보람을 안겨주는 경험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비밀을 재빨리 넘겨주는 작품은 매우 드물고, 대부분의 작품은 손짓해 부르지 않지 때문에 관람객이 작품에 접근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도 함께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샤요 궁전의 정면에는 폴 발레리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번역해보면 이렇습니다. "작품이 무덤이 될지 보물이 될지는 관람객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30분으로 압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은 짧은 순간에 눈을 통해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속기로 이야기해주리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그 세계에 동화되거나 동화되고자 한다면 미술 작품은 해독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180

 

 

 

 

 

그런데 필립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반감을 표했다. 정면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 홀로 가서 표를 구입할 때에도 그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거기서 우리는 또다시 최근 30년 동안 두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 한 편의 연극의 주제가 된, 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을 보여주는 대형 컬러 포스터들과 맞닥뜨렸다.

 

 

 

필립: 이제는 실제 작품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기 있는 것들이 내게서 작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작품의 이미지를  미술관에 들어오면서 10번이나 봤습니다. 이런 일은 작품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포스터들을 모두 떼어내야 합니다! 저런 포스터는 시카고, 베를린 등 이 작품이 없는 곳에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미술관 출입구에 눈을 괴롭히는 거대한 이미지를 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손성시키고 효과를 쇠잔하게 만드는 겁니까? 이것은 경험의 생생함과 놀라움, 발견의 요소를 말살합니다. 이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은 '아, 저기 그녀가 있네'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일 겁니다. 그리고 아마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을 겁니다. 187

 

 

 

 

언젠가 루시안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어떤 것도 다른 것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물들을 합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취향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수집 가능한 다양한 오브제들을 분류하는 정해진 방법은 없습니다. 194

 

 

반면 그 오브제들을 일종의 화이트 큐브 안에 넣는 것이 본래 맥락으로부터의 단절을 강조한다는 당신의 지적은 옳습니다. 하지만 세심하게 선택한 돌로 만든 좌대와 아주 밝게 채색된 벽을 갖추고 있는 이 세련된 중립성 속에서 역설적으로 이 환경은 새로운 맥락을 제공합니다. 이처럼 심미적인 인공물로서 제시하는 것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오브제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 함께 무리를 이루고 있는 여러 사원의 조각들은 분명 걸작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조각들은 파리에 있든 뉴욕에 있든 본래의 맥락상 의미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조각은 고립되어 있고, 다른 종합 사원으로부터 가져온 다른 신들과 함께 매우 말끔한 좌대 위에서 침묵에 잠겨 있습니다. 형식적, 미학적 특성이 종교적, 문화적 의미를 능가하는 이 현상이 미술관, 적어도 지난 시대의 미술관이 그 조각들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끔찍하지만 나 역시 그 조각들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이 그 신비로운 형태, 표현력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

본래의 맥락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해 나는 그것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이 감탄한 그리스의 종교적인 조각상을 도시를 장식하거나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오브제로 전환했습니다. 우리는 고딕 교회에서 유래한 조각상을 그 미학적인 특징을 근거로 전시합니다. 209

 

 

 

 

미술사와 감상의 과정 전체가 어쩌면 창조력 넘치는 오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과거의 이미지를 보면서 그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230

 

 

그것이 우리가 미술관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요? 뛰어난 미술 작품을 관조하며 우리를 고양시키고 우리의 세계를 향상시키려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미술관을 대중과 '관계 맺고자' 보다 낮은 수준에서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이들과는 반대로 위대함과 조우하는 것이 우리를 약화시키지는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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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도는  미술사나 미술비평이 아니라 감상의 공유를 실험하는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역사나 이론이 아닌 미술을 보는 실질적인 경험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이는 특정 경우에 미술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항상 그렇듯 그런 경험의 결과는 아픈 허리, 미술관이 문을 닫는 시간, 일시적인 기분과 같은 임의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거기에는 대개 미술에 대한 글에서 걸러지거나 상투적인 문구로 압축되는 감정인 사랑이 배어 있다. 9

 

 

우타상의 세부, 성 베드로와 성 바울 나움부르크 대성당 - 필립 드 몬테벨로를 미술계로 인도해 준 계기가 된 앙드레 말로, <침묵의 소리> 도판 11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물이 살아남는 대략적인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사물이단단한 무질로 만들어져서 시간의 영향을 견디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26

 

이곳 바르젤로 미술관이 이 상아조가들을 다소 산만하게 전시한 방식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요. 마치 진열장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미술관은 때로 너무나 정돈되어 있습니다. 오브제는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고 정확히 맞춰진 핀포인트 조명 아래서 "나를 경의에 찬 눈길로 좀 봐줘" 하고 고함을 칩니다. 41

 

당시에는 분명했을 이 메시지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조각상의 위치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 정치 선전적인 메시지가 이제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품의 이와 같은 상이한 맥락과 의미를 라벨과 웹사이트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본래 전달하고자 의도한 강한 메시지는 더 이상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들은 그 형식적, 시각적 특징을 동해 우리에게 말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시각적, 형식적 특징이 가장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역사적 중요성보다는 이러한 특징 째문에 작품이 보존되고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42

 

유럽에서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왕조의 많은 오브제들이나 식민지 건설과 전쟁의 전리품들 중에서 작품을 선정한다는 느김을 받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큐레이터들의 구상이 이루어집니다. 그에 비해 미국은 기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톨레도에 있든 미니애폴리스에 있든 미국 미술관들은 그 규모와는 상관없이 백과사전적인 경향을 띱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약간의 중국 미술 작품이나 중세 시대 작품들을 구입하기 때문입니다. 57

 

우리 각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한정적인 것들에 끌립니다. 하지만 미술관이 사물을 보존하고 보여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우리는 특정한 사물을 좋아하지 않거나 무관심한 채로 남겨둘 권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있습니다. 59

 

... 이런 이유로 내게 늘 매력적인 이 작품은 그러나 결코 번쩍하는 번개 같은 인상을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앞에서는 평온함과 평정, 우아함, 균형감을 느낍니다. 나는 <시인의 영감>을 볼 때 지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측면의 결합을 의식합니다. 정말로 경이롭습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나는 인간과 인간성을 초월하는 半영적인 영역에 들어간 듯한 느낌에 빠져듭니다. 뮤즈가 다리를 꼬고 있는 방식, 그녀의 멋진 옷 주름, 아폴로의 팔을 보세요.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습니다. 영감을 받은 듯 날개 달린 푸토가 내미는 월계관을 바라보는 시인. 여기에는 허식이나 명시적인 드라마가 없습니다. 무척이나 숭고한, 잔잔하고 평온하지만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는 그것을 들여다볼수록 차츰 깊어집니다. 특히 그 풍부한 의미, 이성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의 완벽한 결합 덕분에 정서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도덕적인 권위를 고려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103

니콜라 푸생 <시인의 영감>

 

 

 

 

라 투르의 작품은 또한 고요함에 대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불꽃을 보세요. 공기의 흐름, 즉 어떠한 움직임이나 소음도 없습니다.

우리는 작가의 의지와 그의 스타일, 방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림을 판단해야 합니다. 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05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호크니는 우리가 카메라와 같은 기계적인 차원이 아닌 심리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지적할 것이다. 지각은 우리의 느낌과 관심의 영향을 받는다. 필립은 더 나아가 걸작에 대한 반응이 척추 및 다른 근육의 상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대향 미술관은 단순히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다. 미술관은 특정한 방식으로 지치게 한다. 예를 들면, '미술관 발'이라고 의학적으로 분류될 수 있고, 분류되어야 하는 특정한 통증이 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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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규범의 신봉자'들은 여전히 장르의 구분이 정치적인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지한 대상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유형의 소설 - 주류 소설, 순문학, 등등 - 자체가 다른 유형의 소설에 대해 어떠한 고유의 우월성도 지니지 않는 장르라고 하는 사실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정열을 담아서 말씀드립니다. SF의 이러한 자기모멸의 태도에 종종 수반되는, 강도 높은 여성혐오증 - 일종의 편안한 여성 기피 - 이 저는 아주 싫습니다.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캐롤린 시, 패트리샤 기어리, 그리고 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작가들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와서 SF의 세계에 자리를 잡았고, 늘 자유롭고 간단하게 SF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을 반복해왔습니다. 우리가 우연히 여성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닌 규칙과 우리에게 있어 의미가 없는 경계선의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20세기의 아홉 번째 10년기를 사는 여성이면서 작가인 우리들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 서문 중

 

 

나는 일부 아이들처럼 SF만 골라 읽지는 않았다. 손이 닿는 책이라면 뭐든 읽었고, 책은 끝없이 있었으니까. 집에는 책이 빼곡했고, 공립 도서관도 훌륭했다.

 

- 몬다스의 시민 중

 

 

물론 애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쓰는 일은 단순하긴 하다. 딱 애들을 키우는 것만큼.

 그저 성행위를 전부 제거하고, 간단하고 짧은 단어를 사용하고, 단순하고 어리석은 주제를 부여하고, 너무 무섭지 않게 만들고, 행복한 결말로 끝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아무것도 아니잖아. 얼른 쓰라고. 지금 당장.

 이렇게만 하면 <갈매기의 꿈>같은 걸 써서 한 200억 달러쯤 벌고 미국의 모든 성인이 당신 책을 읽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어린이들이 당신의 책을 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 휙 넘겨보고는 그 또렷하고 냉정하고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속임수를 전부 파악한 다음, 책을 내려놓고 떠날 것이다. 어린이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먹어치우기는 하지만(좋은 일이다) 어른과는 달리 아직 플라스틱을 먹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 꿈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한다 중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 그리고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문체가 작품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것처럼 말한다.  ... 그러나 당연한 소리지만, 문체야말로 곧 작품이다. ... 문체를 제거하면 개요와 줄거리밖에 남지 않는다.

 

문체란 당신이 작가로서 대상을 관찰하고 그 대상에 관해 말하는 방식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당신의 눈,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 당신의 목소리다.

 

- 엘프랜드에서 포킵시까지 중

 

 

한 위대한 초기 사회주의자는  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야말로 해당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평가하는 믿을 만한 시금석이 된다고 말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SF작품은 놀랍도록 역행적이며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 모든 은하 제국들은 1880년의 대영제국을 고스란히 옮겨왔을 뿐이다. 수많은 행성들은, 서로 80조  마일씩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삼는 민족 국가나 약탈의 대상인 식민지일 뿐이거나, 그것조차 아니면 자력 발전을 위해서 자비로운 지구 제국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백인 남성의 책무가 등장하는 것이다. 로터리 클럽 알파 센타우리 지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의 SF와 타자 중

 

 

 

예술과 오락은 한몸이며, 깊이 있는 진정한 오락을 제공하는 작품은 보다 나은 예술인 겁니다. 예술은 무겁고 진중하고 지루하며, 오락은 겸손하지만 즐겁고 대중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자세는 네오빅토리아풍 어리석음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글을 쓸 때의 선택이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거나, 느긋하게 앉아서 쓰레기를 뱉어내거나. 그리고 정말로 불공평한 점은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결과는 조금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노예처럼 일하더라도 헛소리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반대쪽 의도는 보증수표입니다. 그 어떤 작가도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고서 우연히 명작을 써낼 수는 없습니다. 완벽을 지향하더라도 쓰레기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지향한다면, 어머나 세상에, 항상 쓰레기를 얻게 되는 겁니다. 완벽을 추구하면 최소한 95퍼센트는 실패하지만, 쓰레기를 추구하면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돌도끼와 사향소 중

 

 

그러나 노먼 메일러 씨의 창작물을 읽은 사람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단 하나의 이름, 당연하지만 노먼 메일러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메일러 씨의 책은 브라운 부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노먼 메일러 씨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 SF와 브라운 부인 중

 

 

최근의 판타지 베스트셀러인 <갈매기의 꿈>은 진지한 책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진솔하다. 또한 지적으로, 윤리적으로, 감정적으로 하찮은 작품이다. 그 책의 작가는 깊은 숙고를 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공업 특산품인 예쁘게 포장한 즉석 조리 해답을 밀어붙였을 뿐이다. 아주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만 하면, 놀랍게도 아주 빨리 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뿐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기만 하면 전부 잘 풀릴 거라고. 세상 모두가 잘 될 거라고. 당신이 미소를 머금기만 하면 캄보디아에서 다리가 괴사되어 죽어가는 남자와 방글라데시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네 살 먹은 아이와 암에 걸린 옆집 여자도 훨씬 기분이 나아져서 당신과 함께 미소를 머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희망찬 사고방식은, 고통과 패배와 죽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거부는, 훌륭한 성공을 거둔 미국인 작가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될 뿐 아니라 자먀친이 '실패'한 일에서 '성공'을 거둔 소비에트 작가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끔찍한 낙관주의를 가진 스탈린 국가상 수상자들 말이다. 질문을 멈추면, 스탈린을 당신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이면, 그저 웃고 웃고 또 웃을 수밖에 없다.

 

- 영혼의 스탈린 중

 

 

 

--- 밑줄 중 일부 옮겨 적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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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카소가 그린 멋진 부엉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요즘 미술가는 부엉이를 잡아다가 속을 채워서는 케이스 안에 집어넣어 버릴 것이다. 박제 말이다. 하지만 피카소의 부엉이는 한 인간이 부엉이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결과이다. 그쪽이 박제보다는 훨씬 흥미롭다.
모든 픽처는, 뭔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카메라 렌즈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볼 필요가 없다. 인간의 두 눈과 뇌는 렌즈처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픽처의 역사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각기 매우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탄생한 이미지들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픽처의 역사는 일방통행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모든 픽처는 특정한 문제,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시간과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붓터치나 펜 자국을 사람이나 사물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면한다.

나는 세계를 관찰하는 일을 즐기며, 우리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에 언제나 관심을 갖고 있다.

픽처는 세계를 재현하는 수단, 그리고 그것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수단이다.

픽처의 역사는 동굴에서 시작되어 (일단은) 아이패드에서 끝난다.

세켸를 2차원으로 묘사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원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 서론 중에서만 옮겨 적었다. 도판이 크고 선명한 것이 보기 좋기도 하고(세부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적어두고 싶은 부분이 많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

예술가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나 사진을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에 관한 부분은 호크니의 전작에서도 본 바 있고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술술 넘어가는 흥미로운 그림의 역사였다. 호크니가 동양 미술을 간간이 언급하는 것도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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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또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도 없으리라.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사상을 깊이 담지 못한 범용한 예술이라면 오히려 어떤 정치체제하에서도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예술이 빼어난 것은,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완벽할 정도로 융합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민도 시작된다. 71

130中 지명은 니시오지구조인가 니시다이지구조인가.
인명은 후지노 노부루 ㅡ> 후지노 노보루로 고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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