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이 처음 생긴 것은 19세기였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빅토리아 시대에 섹슈얼리티를 분석하고 억압하는 데 집착한 것이 오히려 이를 더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란을 방지하는 법안이 바쁘게 통과되고 있을 때 시장에는 외설물이 넘쳐 났다. 새롭게 등장한 사진과 영화가 더 발달하게 된 것도 어떤 면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에 누드 사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시각적 도덕성의 다양한 정도를 즐기면서 점잖음과 음탕함의 동침을 꾀했다. 그래서 화가들은 자극을 원하는 관객들을 위해 겉으로는 진지한 그림처럼 가장해서 역사적인 주제로 꾸민 누드를 그렸다. 이를테면 혹사를 당한 듯한 젊은 처녀들이 바위나 기둥에 사슬로 묶여 있거나 천을 두르고 배에서 있거나 또는 옷을 벗은 젊은 노예들이 고대 로마의 원형 대경기장에서 사자에게 먹히기 전 영웅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들이다. 욕탕에 몸을 담근 고대 로마인들 옆에서 볼이 발그레한 영국 소녀들이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자기들이 그리스인이라도 되는 양 벌거벗은 채 해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소년들의 그림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엔 그 경계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225

 

 

 

 

 

빅토리아 시대 화가인 Ernest Normand의 그림들

 

 

 

"시각적인 진실은 기존의 교과서적인 시각이 거짓이라는 걸 알려주지요. 세잔이 옳았어요. 탁자의 가장자리 선처럼 하나의 선은 테이블보 같은 물건에 의해 끊어지는데, 그 선은 테이블보를 가로지르는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다른 위치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그게 눈이 보는 방식이고 사실주의의 본질이에요." 230-231

 

 

 

이탈리아의 위대한 정물화가인 조르조 모란디는 볼로냐에서 은둔하듯 조용히 살았다. 어머니와 세 명의 미혼 누이들과 한 집에 살면서 침실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세상의 변하는 취향에 대해선 신경 쓰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평생 동안 병과 그릇과 비스켓 통 등을 그렸다. 섬세하고 작은 것을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보라는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지만 아주 풍성한 것이 되었다. 232 

 

 

 

 

 

 

 

 

조르조 모란디

 

 

 

 

 

벤야민의 예언처럼 원작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우린 뭔가 잃어버리긴 했다.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떠나는 순례 여행이 그것이다. 우리는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통해 도배된 작품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고 미술관들은 작품을 여기로 보냈다가 저기로 보냈다가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런 문화 때문에 직접 가서 보는 '고유한' 경험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가는 여행이 별로 힘들지 않더라도, 미술 작품을 보러 떠나는 순례 여행은 작품 감상에 있어 바람직하고 본질적인 요소인 '타자적' 환경을 제공해 준다. 삶에서 특별한 것을 표현하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게 해 준다. 236-237

 

 

모든 작품은 우리가 감상하는 그 순간, 주변 환경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는 장소 특정적 예술이 된다. 그게 붐비는 미술관이든, 친구의 거실이든, 또는 사람이 없는 성당이든 마찬가지인데, 특히 거기까지 간 이유가 그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을 때는 더욱 그렇다. 238

 

 

 

 

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촬영 때문에 마파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육군 주둔지에 있는, 개조한 대포 격납고 두 채에 설치된 작품 촬영 때문이었다. 거대한 반원형 지붕의 격납고는 마치 쌍둥이 고딕 성당 같아 보였다. 격납고의 작품은 저드의 걸작이었다. 그는 작품이 공간을 단순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격납고 안에는 41*51*72인치(약 104*130*183센티미터) 크기의 가공 알루미늄 상자 100개가 배열되어 있는데 각 상자의 내부는 모두 달랐다. 격납고 측면의 문들을 개조해서 만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은빛 금속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이를 보면 그의 조각들이 다가가기 힘들고 무겁고 기계적이고 단조롭다는 선입견이 허물어진다. 미니멀리즘이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순례를 통한 작품 감상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또한 느끼게 된다. 작품을 찍은 사진만 봐서는 반사된 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반짝이는 금속 표면에 얼굴이 거꾸로 비치고 격납고 건물 내부도 상자 표면에 끝없이 반사된다. 마치 베네치아 궁전의 고딕 세공이 대운하 수면에 반사되는 듯하다. 집착처럼 반복되는 상자의 형태가 변하는 햇살이 만드는 우연적인 효과와 공존했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금속 상자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햇살의 파장으로 흐물거리는 것을 보는 감각적인 즐거움 또는 시각적인 놀라움 때문에 작품에 손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잊을 수 있었다.

 저드는 여행을 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곳에 작품을 두었고, 가서 볼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관객인 우리에게 남겨 두었다. 동시에 그는 예술의 위엄을 회복시켰는데 그것은 도덕적 주장이자 또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 즉 차근차근 참을성 있게 하자는 은유이기도 하다. 저드는 그의 추상 작품에 비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걸 꺼렸지만, 멀고도 먼 길을 가서 그의 성소를 보고 나면 그걸 간과하기 힘들다. 259-261

 

 

 

 

 

 

호레이스 피핀의 그림들은 언젠가 코넬 웨스크가 말한 것처럼 "미국 예술 속에 있는 에머슨의 풍부한 전통을 잇는 것으로, 평범하고 흔해 빠진 일상의 삶 속에 숨겨진 영화로움에 초점을 두었다." 에머슨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탈리아나 아랍, 그리스의 예술이나 프로방스의 음유시처럼 거창하고 멀리 있고 낭만적인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평범함을 껴안고, 발밑의 익숙한 것들, 낮게 있는 것들을 탐색한다."

 

일요일 날 아침을 먹으려고 모인 젊은 흑인 가족, 시무룩한 손자와 앉아 도미노 게임을 하는 주부(아마도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자기 구역을 도는 우유배달부,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남성 4중창단,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남자가 피핀이 그린 그림들이다.

대부분 1940년대 그려진 이 그림들은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에 조용히 천착하는데, 1890년대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서려 있다. 284

 

 

 

 

 

 

 

 

 

 

 

 

 

 

 

 

 

피핀은 성경에 나오는 얘기나 역사적인 장면, 풍경들도 그렸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가정생활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순진하거나 토속적이라기보다는 진솔하고 설득력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을 애정을 갖고 꼼꼼하게 그렸고, 보석상의 진열장에서처럼 어떤 것들은 우리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화면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웨스트의 지당한 표현대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들을 보여 주고 있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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