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이긴 하지만 미국의 화가 엘스워스 켈리도 1950년대 후반부터 일상적인 세계에서 발견한, 작지만 감동적인 것들을 그렸다는 면에서 피핀과 유사하다. 건물에 드리운 햇살이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책상의 모서리, 납작하게 눌린 버터 덩어리 등 일상의 꾸밈없는 사실들에서 아주 단순한 형태를 걸러내어 현기증이 날 정도의 색들을 칠했다. 이들을 보면 그림의 원천이 된 일상의 매력들이 궁금해진다. 그의 그림들은 미묘한 시각적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캔버스 크기의 1인치 차이나 이들을 벽에 건 위치의 작은 차이조차 거의 윤리적인 선택같이 느껴진다.

 

 

 

 

 

 

 

 

 Austin church - Ellsworth Kelly's Temple for Light

 

 

 

 

 

 

 

 

 

켈리의 작품들은 우리들도 그런 미묘한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작품들은 마치 "당신은 영리하군요. 왜냐하면 단순함이 쉽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단순함은 쉽지 않다. 켈리의 그림들은 세상이 그런 작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 준다. 그림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민주적이다. 그것이 뭉그러진 버터 덩어리가 됐든 펄럭이는 깃발이 됐든 우리만 준비가 되면 언제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286-287

 

 

 

 

 

 

 

 

 

 

 

 

 

 

 

 

 

이것이 바로 평범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공통적인 메시지다. 이들은 차분하게 기다리라고 한다.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같은 영웅적인 예술가들은  신들과 영웅과 신화적인 세상을 불러내 우리를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지게 하고 감정을 격앙시켜서 좀 더 높은 영역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에두르는 예술가들이야말로 한 박자 늦추고 마음을 가라앉혀 우리가 보지 못하던 현실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화가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고 했는데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이 바로 그런 예였다. 287 

 

 

 

샤르댕은 그가 스스로 정한 영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였고 그 영역은 말할 수 없이 좁았다. 파리에서 반세기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샤르댕은 3-4피트(1미터 안팎) 안에 있는 코앞의 것들에 집중하면서 보냈다. 그는 똑같은 오지그릇, 과일, 달걀, 죽은 토끼를 그리면서 때로 하녀들이나 아이들과 섞어 그렸는데 이들은 차분하고 움직임이 거의 없어서 주변 정물과 잘 어울렸다. 288

 

 

 

 

 

 

 

 

 

 

 

인물들은 얀 베르메르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더 견고하고 진짜같다. 베르메르가 그린 인물들은 이 세상 사람들 같지 않아서 거의 신성해보이기까지 한다. 신비로운 대기를 채우기 위한 빛의 사물이랄까.

 샤르댕의 인물들은 하녀와 학교 선생과 주부들인데 언제나 뭔가에 열중하고 있어 우리의 존재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들의 이런 몰입은 샤르댕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정서이다. 엄마가 보닛을 고쳐 쓰는 동안 소녀는 거울을 보고 있기도 하고, 간호사가 냄비의 기다란 손잡이를 팔로 받치고 삶은 달걀을 까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림에서 샤르댕은 짧은 순간들을 영원으로 늘이고 있다. 289

 

 

 

 

 

 

 

 

 

 

그 과정에서 그는 뭔가 사소한 것을 보았다는 느낌, 그리고 기억에 남을 뭔가 인상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동시에 전달한다. 감각적인 기억은 기억하고 있는 대상의 중요성을 한껏 높이는 신기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어떤 냄새나 음악의 곡조, 한 줄기 바람은 즐거웠던 여행이나 어린 시절 놀던 일, 죽은 사촌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거기서 기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프루스트가 샤르댕을 그토록 좋아한 건 당연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경험을 했다. 일상생활과 정물을 보면서 어떤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샤르댕이 울림 있는 강한 어조로 기억을 불러내더라도 마음속에 그런 정서가 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은 스스로 돌이키기엔 너무 게으르고, 샤르댕이 와서 이를 붙잡아 의식 속으로 불러내기 전까지 그 기억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온건하고 부드러운 색조의 샤르댕의 그림이 '울림 있는 강한 어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샤르댕은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단순한 현실 속의 더 깊은 진실까지 밝힌다고,  그리고 삶에서처럼 그림에서도 진실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다시 말해 색과 형태의 상호작용과 조화로운 기하학을 통해 그 밑에 깔려 있는, 세상을 이루는 기본 질서가 드러나고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 290

 

 

 

 

 

샤르댕의  다른 그림처럼 이 그림은 익숙하고 개인적인 느낌을 주면서 편안하고 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은색 컵과 크리스털 술병, 구리 잔들은 모두 타원형이어서 화면 전체에서 서로서로 호응을 이룬다. 완벽한 평화와 균형을 이룬 그림이다.

예술은 컵에도 접시에도 거리에도 있다. 291 

 

 

 

 

오늘날의 우리는 그가 진솔했기에, 심오한 예술가이기에, 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예술가로서 좋아한다. 드니 디드로가 샤르댕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건방짐도 속물근성도 섹스도 없다. 양파는 양파가 양파였다.

회화에 대한 이렇게 정숙하고 겸허한 접근 방법이 서양미술사를 통해 가장 선정적이고 화려하고 수사학적으로도 거창했던 시대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로코코는 샤르댕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수아 부셰의 탁월한 기량으로 대표되던 시대였다. 샤르댕의 예술은 대부분의 로코코 예술과 대조적으로 섹스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침대보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림 속에 에로티시즘이 있다면 그건 그가 '사랑스레' 만진 물감을 볼 때이다. 고들여 칠하고 또 칠한 물감은 굉장히 관능적일 수 있다. 294

 

 

 

 

 

무슨 이유에선지 샤르댕은 음식을 그려도 신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림의 고요함이 지니는 어떤 특별한 성격 때문인 것 같다. 그의 그림들은 평범한 사물들이 지닌 존엄성에 대해, 그런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는 회화의 힘에 대해, 그리고 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관객이 경험할 '고양됨'에 대해 특별한 종류의 조용한 경의를 표한다.

샤르댕의 그림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림 속의 체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쩜 이렇게 투명해 보일까를 궁금해하다가는, 체리의 수까지 세게 된다. 체리는 ㅅ다섯 알인데, 이는 복숭아 두 개와 파란 사과 하나, 갈라진 살구의 두 부분의 총합과 일치하여 그림에 완벽한 균형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별거 아닌 관찰일지 몰라도 발견하게 되면 놀랍다. 삶에 있어 사소한 사실들이 더 큰 진실을 푸는 열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사 속에서 샤르댕의 작품들은 이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의 가치를 기록하는, 작은 사실들을 집대성한 편찬물이라 할 수 있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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