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자기를 객체로, 남으로, 낯선 이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있던, 익숙한 세계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행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세계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완벽한 숨음이다. 익숙한 언어는 와글거리는 숲과 같다. 와글거리는 숲은 사방이 눈인 파놉티콘과 같다. 와글거리는사방의 눈을 피해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모국어를 잊음으로써 과거를 잊는다, 잊기를 강요당한다, 잊기를 강요당하기를 선택한다. 친숙한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로 발언하는 사람은 다만 현재를, 현재만을 산다. 낯선 것은 언제나 현재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선 것만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익어지는 순간 과거가 된다. 낯익은 모든 것은 과거에 속한다. 과거를 없애는 방법은 낯익은 언어가 없는 곳으로 숨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모국어는 현재에 대해 아무 발언도 하지 못하는 잊힌 과거를 상징한다.

p.66-67

 

 

 

 

과거는 입이 크다. 입이 큰 과거는 현재를 문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이 묾은 치명적이다. 입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빨이 날카롭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 이빨은 현재가 알지 못하고 추측하지 못하는 이빨이다. 현재는 과거가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멈춰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 혹은 짐작, 혹은 기대이다. 현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거는 움직이고, 자라고, 변하고, 그래서 몰라보게 달라진다. 현재를 삼킬 만큼 커지고 현재를 물어뜯을 만큼 날카로워진다. 현재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달라진다. 현재를 무는 과거의 이빨은 현재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짐작하지 못하는 이빨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달아났기 때문이고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현재의 숙명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기를 원치 않는 현재는 없다. 과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오만이다. 오만하지 않은 현재는 없다. 과거의 변신과 보복을 예감하고 대비할 만큼 겸손한 현재는 없다. 과거를 땅속에 묻었다고 안심하지 말라. 관뚜껑을 열고 나오는 과거는 더 사납다.

 p. 166-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혼식이 있고 그는 연주를 하고 있는데 음악이 고조되더니 그를 들어 올리고 그녀를 들어올린다 그러자 그들은 음악과 함께 미풍을 따라 떠오르고,각자 한 마리 새의 양쪽 날개가 된 듯이 그들은 하나가 되어 푸른 하늘을 가로지른다 모든 것이 파랗고 가볍고 푸르고 희끄무레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샤갈의 그림도 떠오르고 스핏츠의 노래도 떠오르고
아련하고, 아득하고, 안개 자욱한 해변을 끝도 없이 걷고 있는 것 같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줄리안 반스 미술책을 읽고 서경식의 '영국인문기행'을 읽었는데
줄리안 반스가 영국인이다 보니 겹치는 지점이 있었다.
영국인문기행을 읽고 마틴 게이퍼드의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을 읽는데 런던의 미술가들을 다루고 있어 그런가 이 또한 반스의 책과도 서경식의 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서경식 책을 먼저 읽지 않았다면 벤저민 브리튼은 의미없는 이름이었을 것이고, 반스 책을 읽지 않고 게이퍼드를 읽었다면 하워드 호지킨은 처음 들어보는 화가였겠지. 반스만 읽고 게이퍼드를 안 읽었다면 루치안 프로이트 이야기가 이만큼 층을 더하지 않았을 테고, 게이퍼드가 프로이트만 다룬 다른 책을 읽으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도 비호감 화가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몇달 전에 읽은 앨리 스미스의 '가을'에 폴린 보티 얘기가 나오는데
그 때 찾아보지 않았던 보티의 콜라쥬를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에서 만났다.
딱히 의도적으로 연달아 읽은 것이 아닌데 이렇게 꼬꼬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진다 ㅎㅎ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11-25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5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난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항상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야. 빅터 프랭클을 봐. 그리고 누군가 이런 말도 했지. '세상 모든 것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고, 바로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해."

나는 그의 책을 가리켰다.

"비트겐슈타인?"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너드 코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지유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무릇 이렇다"라고 말하는 반면, 팡탱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실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모네는 세잔을 "그림의 플로베르"라고 불렀다.

플로베르는 문학을 하는 친구가 결혼을 하면 그것을 플로베르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예술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보나르는 야외 생활을 그릴 때조차 실내 생활의 화가다.

보나르는 마르트의 초상을 그렸다기보다는, 마르트가 거기 있다는 사실과 그 분위기를 그렸다. 가장자리에 그녀의 일부만 등장하는 그림이 많은데, 이는 화가가 의식 또는 무의식에서 그녀를 무시하려 했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정반대, 그녀의 내재성에 대한 증거다. 그뿐 아니라, 팔꿈치나 뒤통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가정생활의 풍요 속에 직관으로 엿보이는 무상함을 그렇게 강렬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면 물론 대답은 양쪽 다일 수 있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보자마자 바로 내 톱 10 리스트에 등재되어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 리스트에 몇 개가 포함되는지는 아직 세어보지 않았다. 아마 100개도 넘지 않았을까.)

화가가 "형태와 색에 매혹"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관객을 불안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고 당황하게 만드는 형상들. 마그리트가 데 키리코에 관해 썼듯이 "관객에게 자신의 고립을 인지하게 하고 세상의 침묵을 듣게 하는" 그림들.

팝아트를 할 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바로 거창한 의미를 적재하는 것이니까.

미학의 제1규범은 흥미라고, 위대한 소설가 존 치버는 말한 바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