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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이언 매큐언은 내게 있어 책이나 활자로 기억되는 작가가 아니다. 지난 어느날 사람이 빼곡히 들어찬 극장에서 그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Atonement].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가 출연한 그 작품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저녁만찬때에 입었던 그 짙푸른 녹색 드레스 만큼이나 너무나 인상깊게 내 뇌리에 기억된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 [Atonemnt]의 원작 [속죄]를 시작으로 그의 여러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몇 해전에 출간되었던 작품들도 있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마치 운명이라도 되듯이 내 시선안으로 하나씩 들어와 박혔다. 우울한 빛을 한껏 머금은 푸른 색 표지의 [체실비치에서]도 그렇게 내 시선 안으로 넘어온 책이었다.
소년, 소녀의 티를 채 벗지 못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했다. 40여분간의 예식을 마치고 그 둘은 신혼여행지인 도싯해안가에 위치한 호텔을 찾았다. 법적으로,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인정한 부부인 두 사람은 호텔에서의 첫 식사부터 잔뜩 신경이 예민해 있다. 그것은 예식의 후유증도 아니었고, 서로가 탐탁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오래된 소고기 스테이크도, 옥수수전분이 말라버린 그레이비 소스도 알아차리지 못 할만큼이나 서로에게 푸욱 빠져있었다.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부부로서 처음으로 맞는 그들의 첫날밤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때문이긴 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입장과 처지 탓에 그들은 사랑과 새로운 출발의 두근거림으로 가득해야 할 첫 날에 이별을 맞이한다.
에드워드는 에드워드대로 과거 그의 의욕이 충만하여 저질러버렸던 인생의 아픈 기억탓에 플로렌스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플로렌스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에드워드의 행동에 실망을 느낀다. 그래서 서로는 몇 시간 전 서로의 눈빛을 보며 느꼈던 사랑을 꽁꽁 묶어 마음속 귀퉁이로 던져버리고 서로에게 아픈 말을 해대며 싸운다. 뻔히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상황과 그로 인한 흥분 탓에 결국에는 후회해 버릴 말을 내뱉고 서로에게서 등을 돌린다.
처음부터 서로의 눈을 잡아 끌어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헤어져 버린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예물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결혼은 없었던 일이 되고 에드워드는 불같았던 이별의 그 날 이후, 그 화가 차디차게 식어버린 그 후에도 플로렌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생 최고의 날을 최악의 날로 만들어버리며 헤어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에드워드는 플로렌스를 기억했다. 혹시나 길을 가다 마주치지는 않을지, 혹시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을 그녀가 걸어가지는 않았을지 생각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만약 그 날, 에드워드가 뒤돌아 떠나는 플로렌스를 큰소리로 불러 멈춰세웠다면, 아니 그녀를 쫓아가기라도 했었다면 에드워드의 인생은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녀를 소리쳐 부르지도, 쫓아가지도 못했다. 그저 그는 돌아서 그의 길을 갔을 뿐. 그리고 그는 그렇게 40여년을 살아왔다. 살아가는 순간마다 플로렌스를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린 날의 에드워드에게는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열정은 있었지만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인내는 없었다.
이언 매큐언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마른 체격의 왠지 완고해보이는 인상을 주는 작가이다. 때문에 처음 그가 [속죄]같은 작품을 썼다는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이언 매큐언 특유의 섬세한 표현들은 어찌보면 [속죄]와 같은 작품이 굉장히 날카로와보이는 그의 인상과 어울려보이기도 한다. [체실비치에서]는 그러한 이언 매큐언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남자와 여성의 '육체적 결합'에 대한 상반된 입장과 생각, 너무나도 풍성한 묘사 그리고 담담한 문체까지. [체실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의 독특한 매력을 짧은 분량안에 몰아넣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심리를 표현해 내는 그의 표현력은 경이적이기까지 하다.
이언 매큐언이 섬세하게 써내려간 에드워드와 플로렌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비록 알지 못했지만, 독자들은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들의 행복하지 못한 삶에 안타까움을 감출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긴 여운으로 남아 [체실비치에서]를 아름다운, 그렇지만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로 기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