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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작가의 이름만으로 신뢰성을 가지고 작품을 선정할 수 있는 작가는 별로 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주제 사라마구는 그러한 무한 신뢰성을 가진 작가이다. 때문에 그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어떤 이야기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덥썩 그의 책을 집어들었다. 몇몇의 독자들이 토로하는데로 그의 작품은 어둡고, 어려우면서 동시에 답답하다. 확실히 여든여덟의 노작가의 작품은 심심풀이로 읽기로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하지마 이 어두운 분위기를 상당히 감안하고 읽다보면 노작가의 치밀한 이야기 그물에 덜커덩 걸려들고 말 것이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주제 사라마구의 신작은 아니다. 한국에 이미 2권으로 나뉘어져 소개된 적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 해 말, 주제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영화로 제작되고 난 뒤, 그 영향으로 주제의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도원의 비망록]은 그러한 수혜를 입어 한국 독자에게 새로이 선보이게 된 작품이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눈먼 자들의 도시]나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 [도플갱어]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일단 이야기의 배경이 현재가 아닌 18세기의 포르투갈이다.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와 왕권에 따라 힘없이 휘둘리는 백성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뉴욕 타임즈는 이 [수도원의 비망록]에 '한 편의 로망스이자 모험담이며, 18세기 포르투갈 왕가와 종교에 대한 반추인 동시에, 권력의 사용에 대한 통렬하고 아이러닉한 비평'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로맨스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노작가의 로맨스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작품. 이 설명으로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더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이야기는 달달하고 설탕내 풍기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블리문다와 발타자르의 미묘한 사랑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하나의 도구인듯 하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블리문다와 발타자르, 그리고 바르톨로메우 신부가 '파사롤라'를 만들어 세상을 날아보려고 하는 과정과 절대왕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욕심-적통의 후계자 생산-을 이루기 위해 백성들을 모진 노역으로 내모는 왕실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그리고 왕권에 의해 피폐해져가는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치루고 한쪽 팔을 잃은 발타자르, 마녀사냥으로 어머니를 잃은 블리문다. 그리고 허황된 꿈이라며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 바르톨로메우 신부. 이들은 왕실과는 대칭점에 서있다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이 '파사롤라'를 만들어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보고자 하는 것은 억압되고 고된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꿈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사랑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사랑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인간의 '자존성'과 '자율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노작가의 존재감과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