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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 이야기 - 르네상스의 주역 ㅣ 현대지성 클래식 14
G.F. 영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0월
평점 :
#메디치가문이야기 (4) #GF영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7장. 메디치 궁전 예배당의 프레스코
메디치 궁전의 1층 소예배당 벽면에는 베노초 고촐리가 피에로 일 고토소를 위해 그린 프레스코들이 있다. 내진 벽면에는 종교주제-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던 밤의 세상, 예배당 둘레에는 역사주제-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여행을 그렸다.
여기서 종교주제는 메디치가의 역사를 언급하기 위한 매개에 지나지 않는다.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여행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셉, 동방황제 요한 팔레올로구스,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세 왕(동방박사)로 등장하고, 이를 따르는 수행원들은 코시모, 코시모의 동생 로렌초, 피에로 일 고토소, 줄리아노 및 피렌치인들, 피렌체에 온 학자들, 그리고 화가 자신이다.
8장. 위대한 자 로렌초 (1469-1478)
아버지 피레오 일 고토소가 죽고, 장남 로렌초가 스무살의 나이에 가문의 수장이 된다. 어리지만,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을 받아서 또래 청년들에 비해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로렌초에 이르러 이 가문의 역량은 최고조에 달했다. 정치. 경제는 물론, 학문, 예술에 대한 영향은 비교할 수가 없다. 그가 (그 가문이) 개최하는 각종 행사는 엄청났고. (그들 부담으로) 특히 성대한 행렬과 마상대회는 지금도 화가들의 묘사에 그대로 남아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마르스와 비너스‘, ‘봄의 귀환‘도 마상대회가 실려있다.
1478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조카들 리아리오가에 피렌체를 선물하려고 파치가와 함께 로렌초 형제를 죽이려한다. 동생 줄리아노는 사망. 로렌초는 이후 변한다. 줄리아노는 당시 스물다섯이었고, 서자 하나를 남겼는데, 이 아이가 교항 클레멘스 7세가 된다.
9장. 위대한 자 로렌초 (1478-1492)
1478년의 실패로 교황 식스투스 4세는 격노했고, 로렌초 및 기타 관련자를 파문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똘똘 뭉쳤다. 아직은 아니디만, 날조된 문서( 콘스탄티우스의 증여, 페펭의 증여, 위 교령집)에 기초한 교황청의 사기가 알려지게 된다. 토스카나의 주교들은 교황을 파문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에 맞서 피렌체가 똘똘 뭉치긴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정세가 극도로 불리해졌을 때 로렌초는 나폴리왕을 찾아간다. 그의 방문, 그의 외교력으로 나폴리는 피렌체 편을 들게 된다.이를 시작으로 교황의 동맹국이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결국 교황은 피렌체와 평화 조약을 맺는다.
이 상황을 보티첼리는 ‘켄타우로스를 굴복시키는 팔라스‘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 그림인지? 이 그림은 ‘켄타우로스와 미네르바‘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있는데.
미네르바가 입은 옷의 문양이 로렌초의 개인 문장이다.
이때까지 로렌초는 자신이 추구한 독재적 권력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그 권력은 전적으로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휘장없이 군주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다.
1480년부터 로렌초는 피렌체의 내분에 시달리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낸다.1484년 이탈리아 전역에 평화가 정착된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그의 일생 내내) 좋아하던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복잡한 공무로 마음이 시달리고, 군중들의 온갖 아우성에 귀가 멍해질 때 학문에서 위안을 찾지 않으면 그런 주장들을 어찌 다 들어줄 엄두가 나겠습니까?˝
예술에서 로렌초의 후원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베로키오, 보티첼ㄹ, 기를란다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밀리피노 리피, 시뇨렐리, 발도비네티, 베네데토 다 마야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폴라유올로 형제...
9장 위대한 자 로렌초 (-1492)
1492년 로렌초는 사망한다. 그는 국정의 일부를 장남 피에트로에게 맡겼고, 국가 수장으로서의 처신에 대해 조언하고, 그의 지위가 피렌체의 일개 시민임을 잊지 말것을 특별히 경고했다.
그는 산 로렌초 성당에 동생 줄리아노와 같은 묘에 묻혔다. 묘비는 없다. 미켈란젤로가 그의 묘비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피렌체를 떠났고, 이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미켈란젤로와 비교될까봐??)
피렌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메디치가의 명성은 영원히 그 도시와 연관될 것이다. 가문은 국가와 병존한다는 로렌초 자신의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