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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 파기 두번째. (도서관에 신청해 놓고 내 손에 들어오는 순서..ㅎㅎㅎ)
외국인 연하기혼남과의 불륜 경험을 적나라하게 썼다하여 화제가 된 소설. 읽기 전에는 엄청 야해서,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는데 (로맨스 소설도 많이 읽었고, 지금까지 읽은 것 중 가장 야했던 소설은 ‘그녀 아델’이다.) 이건 뭐..그 순간 사랑에 빠진 여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p9 “ 라고 시작하는 소설. 나는 이 문장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본다 . 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남이 이어지고, 헤어지고, 망각이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는 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사랑했던 추억때문에 그 과거가 소중하다.
짧은 소설(?)을 읽으며, 읽는 내내, 공연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과연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인지 고개를 갸웃대다가, 그게 뭐가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불어가 서투르고, 나는 그 사람의 모국어를 못하는데.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여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냥 소설의 제목 그대로 simple 하게 끌렸던 것인데. 그 끌림은 그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불러온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서투른 프랑스어 발음에서 야기된 야성일 수도 있고. 사랑이 길어졌다면 오히려 지저분하게 끝났을지도 모르는 관계였을 수도 있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끝이 예상되는 관계여서 더 애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결혼을 이야기할 때, 연애 감정은 몇 년 가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 다음은 ‘정’으로 사는 거지 뭐…하는. 그래도 수십 년 함께 하는 동안, 그래도 그런 감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한때 그 사람은 눈부셨고, 싱긋 웃을 때 하얗게 반짝이는 치아에도 마음이 흔들렸는데, 지금 늙어가는 그의 모습은 애잔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 반대는? 수다스러운 펑퍼짐한 중년 아줌마가 된 아내에게서 그는 과거의 모습을 떠올릴 수나 있으려나? 아주 비관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추억은 남아있고 버들가지 같던 허리 사이즈도 기억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에게도 그런 ‘열정’이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자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일종의 대리 만족도 하고. 추리물을 읽을 때 범인에게도 자주 이입된다. 뭐 어때? 나만의 책읽기 습관인걸, 그래서 책읽기가 더 재미있는 걸. 다음엔 아니 에르노의 어떤 책을 읽게 되려나? 궁금.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 간결한 문체로 은근 사람을 휘젔는다.)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p27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p72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p73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