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이야기 - 르네상스의 주역 현대지성 클래식 14
G.F. 영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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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치가문이야기 (6) #GF영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19-20장 카테리나 데 메디치 (1519-1589)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메디치가 장자 코시모 계열의 마지막 자손으로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교황청과 대립했던 피렌체의 한 수녀원에서  지냄)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하여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오를레앙의 앙리와 결혼한다. 프랑스인들은 왕의 아들이 일개 부르주아 출신의 여성과 결혼한 것을 프랑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여 ‘그 이탈리아 여자‘라고 지칭하며 미워했다고 한다.

왕은 며느리를 인정하고 사랑했으나, 정작 부부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그래도 10명의 자녀를 두었고, 셋은 유아때 죽었고, 네 아들 중 셋은 차례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딸은 셋.
결혼한 지 14년째 남편 앙리가 프랑스왕 앙리2세가 된다. 그는 디안 드 푸악티에라는 애인에게 푹 빠져지냈고, 디안이 사실상 국사를 좌지우지 했고,  카테리나는 이름 뿐인 여왕이었다. 지난난 세월 속에서 카테리나는 ‘놀라운 자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이 죽고, 세 아들이 차례로 재위하는 기간 (큰 아들 프랑수아 2세는  1년 반, 둘째 샤를 9세는 14년, 셋째 앙리 3세는 15년) 섭정 여왕 또는 고문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카테리나는 8차례의 종교 전쟁이 발생하나 중재하려고 노력한다. ‘1월 칙령 (1562년, 국가는 상이한 두 종교단체-로마 카톨릭 & 프로테스탄트를 승인하고 두 종교는 서로 공존한다.)‘은 이후 모든 평화조약의 기초가 된다. 카테리나는 프랑스에 종교재판소를 허용하지 않았다. 양쪽을 중재하면서 어느 한쪽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한다. (불굴의 중재자)

--당시 유럽사는 그야말로 항상 전쟁 중이었다. 욕심때문이기도 하고, 종교때문이기도 하고.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가 아니고 각각의 도시국가였는데,  그 와중에 어떻게 삶이 영위되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

검은상복을 입은 카테리나의 초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고. (사랑할 가치가 없던 사람이더만!) 사람 마음은 진짜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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