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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한겨레 21을 통해서 저자 신윤동욱을 알고 있다. 그의 글은 재미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스스로 '급진적 다양주의자'의 솔직 담백 칼럼집이라고 이름붙였다. 특히 소수자들, 1%의 소수자들의 생각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저자는 자신의 느낌에, 욕망에, 우울에 솔직하긴 했으나 담백하지는 않다. '담백함'이란 맑고 깨끗한 심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욕망의 눈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건 그의 솔직한 쇼핑취미와 팬티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솔직한건 맞으나 담백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걸었다는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래서 급진적 다양주의자라는 말도 의심된다. 그의 글은 급진적이지도 않고 우리 사회의 다양함을 다 보고 있지도 않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발언에서 사소한 진심조차 통하지 않는 한국 사회가 무섭고 일상의 전근대를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방콕으로 가는가) '세계 12위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의 근대화는 일상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저자에게 묻고 싶다. 중국집에서의 단무지 일화나 택시기사의 불친절에 대한 실망은 이해하겠으나 그것을 전근대라고 칭하는 저자의 발상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근대화는 일상에서 완성된다고 했는데, '전근대'를 마치고 '근대'를 완성해야 하는 개념이 옳은 것일까. '근대화된 나라'라고 생각하는 나라 특히 미국에서는 그런 불친절이 없는가. 그건 근대 전근대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알고 있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을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그 개념을 의심하고 명확히 한 뒤에 써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이 정말 말할 수 없었던 소수자들의 발언이거나, 그들의 입장을 위한 글이었다면
이름대로 급진적 다양함이 드러난 글이었다면
솔직한 그의 마음이 담백하게 드러났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