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헛된 희망이나 꿈은, 바짝 마른 낙엽처럼 손아귀에서 부서지기 쉽다. 아이가 병을 이기고 둥근 해가 떴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수하고 이를 닦는 것은 잡기도 어려운 꿈이거니와, 잡아도 부서져버릴 낙엽과도 같다. 하지만 아이와 어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잘 될 거야, 어찌 되겠지, 하는 자조섞인 웃음, 체념한 웃음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맛본 이들의 여유있는 웃음이다. 햇볕 한줌 들일 수 없는 반지하 방, 딸칵, 하고 알전구가 켜지면, 아이와 엄마는 마치 알전구를 떠오른 둥근 해라도 되는 양 행복하게 쳐다본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느냐고,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고, 우리 모자의 삶에 둥근 해가 떠오를 날, 쨍하고 해뜰 날이 과연 올 거라 믿느냐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에서, 아이와 엄마는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이.
병든 노모는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있으나, 병든 자식은 엄마에게 짐이 아니라 죄책감인 한편 살아갈 이유이다. 엄마는 아이를 힘껏 사랑한 만큼 죄책감이 덜어지기라도 할 듯 사랑을 줄 것이며, 죄책감과는 별개로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림책 속 아이는 자신의 몸이 불편해도 사랑에 모자람을 느끼지 않는다. 누워있는 자신을 씻기고, 먹이고, 돌보는 어머니, 엄마의 손길에서 넘칠듯한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지가 멀쩡해도 사랑이 없으면 영혼에 욕창이 생길 수 있으나,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있어도 엄마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아이는 욕창 하나 없이 깨끗한 몸, 그리고 깨끗한 영혼을 지녔다. 엄마와 아이, 둘의 깨끗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공명은 침침한 알전구마저도 떠오르는 태양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비춰지는 좁고 어두운 반지하 방의 어둠과 가라앉은 색채에 익숙해진 독자의 눈을 아름다움으로 멀게 하려는 듯, 갑자기 눈부신 해바라기 밭이 펼쳐진다. 잘 살펴봐야 보인다. 아이가 휠체어에 앉아 있음을.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겠지만, 이들에게 펼쳐진 건 진짜 해바라기밭이 아니다. 그저 반지하 방에 조금이나마 생기를 불어넣고자 벽에 바른 해바라기 벽지일 뿐이다. 어쩌면 떠오른 해님은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모자의 눈에는 둥근 해가 떠오른 드넓은 해바라기밭이다. 아무리 삶이 이들을 몰아부치고 벽처럼 가로막아도, 이들은 떠오른 해님을 보며 해바라기 꽃밭에서 웃을 수 있다.
진우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일곱 살 소년입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에 자꾸 힘이 없어지는 근육병에 걸려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누워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몸이 약해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것이 진우의 꿈입니다.
아빠가 되어, 겨우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어느 여동생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주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해서 겨우 참았다. 아직 엄마가 안 된 여동생에게 '아저씨 되니 센티해졌수다.'라는 놀림을 받기 싫었는지도.
하지만 그애도 곧 알게 되겠지. 자식 앞에서 한없이 눈물 많은 게 부모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강한 게 부모라는 걸. 나의 상처는 그저 딱지가 앉기를 기다리면 되지만, 내 아이의 상처와 아픔은 부모의 뼈에 불로 지져 새긴 상처와 아픔이라는 걸.
작가의 말을 빌어 마무리한다.
이 세상 알 수 없는 것들과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