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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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우리 말로 된 아름다운 성장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정윤과 단이 미루와 명서  

그들은 아픔을 겪고 시대의 강을 건너며 성장했을까.  

단이는 병영에서 죽었고, 미루는 음식을 거부한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 모두 우리는 성장했을까  

성장이 삶을 온당하게 바라보고, 치우치지 않는 정신적 힘을 지닌 거라면 나는 성장했을까 

성장한 이들이 우리 사회의 어른이 되어서 우리는 좀 더 행복해졌을까 

많은 물음 앞에서 그냥 서 있다. . 

보고 싶은 얼굴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잘 있는지, 영혼은 무사한지 묻고 싶다.   

 

윤교수가 제자들의 손바닥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모아 놓았을 때 한 편의 시가 되어 울린다. 그 울림을 함께 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 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 

거기엔 별이 있어 .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그대들 별빛들이 그립다고.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밖에는 담지 못하지  --   디킨슨   

 That Love is All There is
- Emily Dickinson -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내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이 어른이다. 나는 어른이 못되어 이러고 있나 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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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내 부하 해 -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과 함께 어린이 시 쓰기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 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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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부하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오늘도 내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머리를 쾅 쥐어박았다.  

아이들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마음이 뭉클해지는데 엄마인 나는 왜 이렇게 엉터리인지.  

만화책만 읽는 아이에게 만화책 한 권에 동화책 한 권읽기를 약속한다. 이것도 일방적인 약속이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혼내게 된다. 그냥 두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맞는 것인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르면서 부모가 되고, 가르치게 된다. 가끔 무섭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내가 좋다고 해서 아이가 그걸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같이 좋아하기를 바라다가 강제가 되어버릴 때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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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먼저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늘 멋대로 떠난다. 32살의 여인이 있다. 7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고 3년 전에 재혼했다. “다미오씨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모코도 저를 잘 따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는 합니다.” 그녀가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는 슬픔이 맑게 가라앉아 있어 그것을 가벼운 힐난에 실어 말할 수도 있게 된 사람이구나, 그러니 그와 다다미방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도 이쪽이 힘들어질 일은 없겠구나, 하고.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서커스, 2010)의 도입부다.

내용은 이렇다. 그와 그녀는 꼬맹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가난해서 둘 다 중학교까지만 다녀야 했다. 그런 일에서조차도 “둘이서 작은 방에 들어간 것 같은” 설렘을 느낄 정도로 둘은 정겨웠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해도 좋을 때의 어느 날에, 남편은 전차의 선로를 걷다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고 죽어버린다. 그녀는 그 이후 껍데기처럼 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는 왜 갑자기 죽어버린 것일까. 그 생각에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작은 바닷가 마을로 시집을 간다. 그곳에서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날 밤의 남편이 그랬을 법한 뒷모습을 한 채로 걷는 것을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녀는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59쪽) 그녀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옮기지 말자. 그저 이 뒷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출발한 소설이라는 것만 말하자. 이 소설에 몇 개의 뒷모습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뒷모습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곧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그래서 타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고 허둥대는 것이다. 사람의 뒷모습이 대개는 쓸쓸하다면 그건 인생이 늘 얼굴을 찌푸려서인 거겠지.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지.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44) <논리-철학 논고>의 후반부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이 철학자가 반대할지도 모르겠지만, 문학의 언어만큼은 그 ‘스스로 드러남’의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없을까.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이 아름다운 소설 앞에서 나는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졌다. ‘순수문학’이라는 이상한 명칭이 이런 소설 앞에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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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령

 

                                  김 수 영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들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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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구나, 삽질의 나라

 김선우



TV 뉴스를 보다가 화가 나 꺼버렸다. 한 손에 부채, 한 손에 장바구니를 끼고 집을 나섰다. 내 사는 곳 뒤쪽 골목에 있는 조그만 재래시장의 좌판 할머님들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구 정화’ ‘귀 정화’가 필요했으므로.

가지, 토마토, 깻잎, 호박, 감자, 고구마, 옥수수, 오이…. 할머니들의 좌판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걸로라도 풀어야지, 보기만 해도 얼마나 어여쁜 식물들인지! 토마토를 사려고 들른 만천리 할머니네는 오늘은 따올 만한 토마토가 없었단다. 대신 가지가 풍성하다. 다행히 샘골 할머니가 햇볕에 잘 익은 조막만한 토마토들을 두 바구니나 놓고 계셔서 횡재한 기분으로 냉큼 한 바구니 샀다. “이것도 우리 먹을라고 한 녘에 심궈논 건데” 하시며 슬쩍 보여주는 조선부추는 대형마트용 ‘상품 가치’로는 영 ‘꽝’이지만 내 눈엔 반갑기 그지없는 보양 그 자체. 천원어치를 사니 한줌 더 얹어주신다. 나는 슬그머니 반 줌을 덜어 할머니의 바구니에 도로 넣는다.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하드도 웬만하면 천원인데, 이걸 천원에 다 가져가기엔 아무래도 과분하다. 깻잎 순을 얻은 서면 할머니는 중도가 없어진다고 누가 그러더라며 오늘도 걱정이시다. 4대강사업이 내 사는 춘천의 섬 중도까지 망가뜨리기 직전이라는 걸 나는 언론보다 먼저 서면 할머니를 통해 들었다.

위장전입,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 평범한 ‘어머니’들은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떠는 중에도 손만은 부지런히 깻잎을 다듬고 머위줄기의 껍질을 벗긴다. 올해 날씨 때문에 양지골 할머니네 복숭아나무가 네 그루나 죽었다는데 올해 유독 할머니의 관절염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양지골 할머니가 안 보이신다. 할머니들은 갈수록 날씨가 괴이쩍다며 이구동성이시고, 어느 분은 땅신이 노하시는 게라고도 하신다. 나는 할머니들 옆에서 부채를 부쳐드리면서 농사짓고 거두며 평생 땅의 순리대로 살아온 할머님들이 풀어놓는 ‘순리’에 대한 말씀들을 들으며 귀를 씻는다.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한 불도저-포클레인질을 지구가 언제까지 견뎌줄지 한치 앞을 셈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이 여름엔 참말 많이 들었다.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우리 세대는 어찌어찌 견디겠지만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어쩐담? 비관이 깊어진다. 한반도를 포함해 지구 곳곳의 이토록 ‘비정상적’인 기후는 아픈 지구가 표현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참다참다 탈이 나면 우리 몸도 열나고 오한 들고 기침과 진땀이 나듯이. 이대로 착취가 계속되면 중병을 앓을 것은 뻔한 일. 대지를 공경하는 마음의 회복 없이는 인간의 미래가 풍전등화라는 것을 좌판 할머니들은 다 아는데 ‘어머니 자연’을 ‘자원’으로만 생각하는 ‘삽질 정부’는 도대체 알아먹질 못한다.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김수영의 탄식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오,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눈물이 핑 돈다. 귀를 씻으면 부끄러움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인지, 부끄럽고 부끄럽다. 귀를 씻는 일이 부끄러움을 더 잘 알려고 하는 일임을 알겠다. 부끄러움 모르는 ‘삽질의 나라’에서 이러구러 연명하고 사는 글쟁이의 부끄러움이 이 여름 내 불면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 그대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의 영은 살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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