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다른 남자>를 다 읽은 후에야 <더 리더>가 읽고 싶어졌다. 책표지를 보면 영화의 한장면이 떠오르는데 <다른 남자>는 영화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사람은 누구나 부정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감정들,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 적나란하게, 자연스럽게 들추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매우 추잡스럽거나, "어떻게 그럴수 있는지" 라거나 분노를 느끼게 하진 않는다. 아마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저지를 수 있으며, 다만 그것이 어느 선에서 끝내냐는 것의 문제이지 않을까?  

이 책은 여러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다른 남자>라는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묘하게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내면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책은 여러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화책처럼 해피앤딩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계속되는 암시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첫장에서는 <소녀와 도마뱀>이라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하게 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계속되는 암시들, 그의 아버지가 저질른 추악한 일들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땐 놀라지 않았다. 어느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였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씁쓸해졌다.

그 다음은 <외도>였다. 책 내용중에 나는 내가 서베를린 출신의 사람이고 싶지 않았으며, 그들 역시 동베를린 출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단지 인간이어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서도 한동안은 굉장한 혼란기가 예상되었다. 그것은 넘어야 할 산이고 고통일 것이다. 친한 친구였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자신 또한 그 부인과의 외도에 의해 그 친구를 배신하게 된 이야기였는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였다. 친구는 부인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바보같은 그는 이용당한 것이였다. 자신이 걸릴수 밖에 없는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는 그날 친구집에서 자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남자>를 읽으면서 부인의 죽음 이후에 그는 편지를 통해 그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었음을 알게 된다.  책 중에서 "내 아내가 명랑한 여자였다고? 그는 질투심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모습을 다른이가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났으며, 그녀가 나 아닌 다른 남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줬던 것에 화가 났을 것이다. 이제 죽어서 따질 수 없음에 화가 났을지도.

정작 자신이 그 당시에 그녀에게 무슨짓을 저질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다른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때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아마 읽고 있었던 내가 더 어이 없었던 것 같다. 무엇때문에 그런 사람이랑 바람이 났을까? 싶어서 말이다. 하긴 내가 그녀의 입장이 아니였으니, 그와 살아보지 않았으니, 그 당시에 어떤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였다. 힘든일에 부딪치게 되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자신의 상태만 신경쓰게 된다. 그도 그녀가 어떤 사람이였었는지, 잊었으리라. 아마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의 사람만이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자리가 자신의 옆자리가  아닌, 한 사람이였음을, 수줍음을 타는 여인이였음을 잊어 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것 보다 잊어 버리는 것이 더 많다.

 

<청완두>를 읽으면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첫번째 부인, 두번째 부인, 세번째 여자.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으면 모든 부인들에게 충실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바라기만 하는 부인들에게 지쳐 버리고 세번째 여자를 만나게 된다. 청완두를 읽으면서 어이없어서 웃었던 것 같다. 그가 초래한 결과가 뻔뻔한 그를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했으니 말이다. 그가 기차에 끌려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음에, 이제는 바깥세상이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여 주지않았음에, 인생이 허망한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서로의 이익관계에 의해서 그의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을 그냥 봐주었을 수 있었을까? 뭐, 좋은것이 좋은것인가? 이제는 그는 나이들고 병약한, 다른 사람의 돌봄이 필요한 늙은이일 뿐이라는 것일까?

 

<주유소의 여인>에서는 중년부부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걸까? 사랑이 없는데 부부의 관계를 지속해야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뭐가 옳고 그르다고 딱 잘라 말할 순 없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살아온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더이상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를 위기감 때문에 더욱 불안했는지도 모르겠다. 젊을때는 늙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했다. 우리가 늙을꺼라 생각치 못하기 때문이다. 몸의 여러변화에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청춘을 보며 우리의 가슴도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곤 하지만,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 주질 못하니 말이다. 처음에는 두근거렸던 서로에 대한 감정들이, 차츰 일상화 되어 간다. 그리곤 때로는 꼴도 보기 싫어진다. 새로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무언가라도 잡고 싶은 것이 아니였을까~ 자신보다는 젊은 그녀를 보면서 아마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부인이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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