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으로 따지면 자정이 넘었으므로 토요일이지만, 언어의 연속성에 의한 구분이므로 지금은 마땅히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라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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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의 '그 사이'와 '서울가는 길'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예전, 중학생일때 그녀의 앨범이 해금조치가 되어 두 장의 세트 LP로 라이센스 된 적이 있었다. 나는 마땅히 그 앨범을 구입했고(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참 조숙했다), 그 앨범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했다. 그 앨범에 수록된 모든 노래는 외다시피 했던 건 당연한 일. 그러다, LP에 손을 떼기 시작했고, 이제는 턴테이블은 친정에 두고 LP만 폼으로 내 집으로 옮겨왔으니 예전 노래를 다시 이렇게 듣게 된 것이 마냥 신선하기까지만 하다. 양희은의 젊을적 목소리, 그 낭랑한 목소리가 이 밤, 습기 가득 눅눅하지만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이 밤에 참 잘 어울려서, 나는 얼마간은 감상적으로 변해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중이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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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오늘 늦는다. 금요일의 볼링모임에서 술자리가 있는 모양. 그 덕에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술에 취한 그와 잠시 통화를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어 있다. 제법 취했다는 증거. 농담삼아 일행의 이름을 대면서 '좋은 데 가자고 하는데 와이프 어쩔까?' 라고 묻는다. 그게 진담이든 농담이든, 나는 사심없이 대세가 그러면 혼자 따되지 말고 같이 즐기다 와, 라고 대답한다. 그이는 이렇다 할 대꾸없이 그 일행을 바꿔준다. 그이보다는 덜 취한 목소리, 허나 그도 마찬가지로 가득 취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부부와 한달 간격으로 결혼을 하고, 나보다 2주 먼저 아가가 들어선, 우리 부부와 비슷비슷한 부부이기도 하며, 무척 친한 커플이기도 한데, 그가 먼저 미안하다면서 말을 한다(남자들은 보통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운을 떼곤 한다). 내가 그런다. 술자리 방해할려고 전화한게 아니라, 전화도 안 하면 무심한 와이프라고 흉볼까봐 전화했다,고. 좋은 데 가실거면 신랑도 데리고 가세요, 라고 웃으며 말하니, 미치겠단다. 아니, 우리 와이프한테도 그런 것 좀 알려줘요, 나는 자꾸 잔소리 듣느라고 술이 다 깰 지경인데, 라고 맞받아친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를 대화들을 나누다가, 곧 다 같이 보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마친다. 그리고, 문득, 내가 이상한 여자인가, 라고 생각을 했다. 결혼한 남자들이 술마시다가 그런 농담도 하는 거고, 설사 그렇게 해서 그런 곳에 가게 되었다해도, 지금 당장 내가 쌍심지를 켜고서 '당장 들어왓!' 라고 소리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묘안이 되겠는가, 라는 것이다. 남자들 술자리하는 거, 사회생활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도 있고, 기분에 따라 마실 수도 있는 것이고. 마시다 보면 취하기도 하는 것이고. 나는 왜 그런 것에 느슨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을까. 내 아버지가 술을 마시던 남자가 아니여서 그런지, 나는 남자들이라면 의례히, 라는 생각을 하는데. 오늘 나와 통화한 그 집 와이프도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와이프로 유명한데도 그는 나를 '바다'라는 표현을 한다. 남편에게 관대하다,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글세. 생각해본다. 오늘 그와 나의 남편이 설사 소위 '좋은 곳'으로 갔다한들, 혹은 그런 꿍꿍이를 펼쳤다한들, 그걸 내가 어쩌겠는가, 라는 것. 내가 마음이 바다여서가 아니라, 남편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라는 이유를 든다면, 다들 내가 아직 덜 살아봤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을까. 뭐 그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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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웠던 며칠이 지나고, 오늘은 비가 오더니만, 지금은 아주 적절하게 선선한 밤공기가 아주 좋다. 마치 가을날같은 기운. 창문을 활짝 열고, 음악 소리를 낮게 맞춘 후, 나는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혼자 하는 일이란 가끔 외롭기도 해서, 지인들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들추기도 하는데, 어디에도 흔적들이 없다. 메신저마저도 조용하다. 모두들 즐거운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를 즐기고 있는가. 이렇게 좋은 밤, 기분 좋은 외로움을 느끼면서 나는 잠시 쉬는 중, 누군가 짧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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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이름으로 서재를 꾸리는 일은, 재미있으면서도 가끔은 소모적인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유쾌하면서도, 간혹 피곤하기도 하지만, 이런 글을 중얼거릴 수 있다는 점으로, 오늘은 고무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 그 사이 음악은 바뀌어 이수만의 '행복'이 흘러나온다. 나의 정서는 한 5~10년 쯤 물러서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내가 늙어 있다는 의미일까.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 그런 두서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내뱉을 수 있는,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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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번개가 치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혼자있다. 무섭기도 이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