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고. 행복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누구나,에서 나 역시 제외될 수 없듯이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일 것이고.

오늘은 일이 좀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 있어?' 의 그 '일' . 조금 울기도 했는데, 따지면 나쁜 일도 아니다. 마땅히 겪어야 할 일이었고, 게다 이미 예상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이미 예상한 일이어도 왜 닥치면 놀라는 것,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 사실, 그것도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오히려 좋은 일이기도 한 일인데도, 감정의 흔들림은 자발적인 무엇으로 통제할 수 없으므로, 그랬던 것이다. 

저녁에 수제비를 했다. (요즘은 감자가 땡긴다) 그런데, 식탁 앞에 앉은 그가, 수저를 들지 못한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그이가 차린 밥상을 물렀다.  입맛이 없다고. 하긴, 나도 아가가 아니었으면 똑같이 식욕이 일지 않았겠지만서도, 몸이란 때론 무서워서, 감정과 달리 먹어야 했다. 아무튼, 식사를 미룬 그이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거 처음이지? 라고 먼저 묻기도 하고.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밥이 먹히는 내가 미안하다.

살다보면 이런 날고 있겠고, 저런 날도 있다. 사실, 더 어렵고 끔찍한 일도 겪으면서 살게 될텐데. 따지면 오늘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 뿐이다. 그이와 내가 괜한 엄살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곱게 자라, 지레 겁먹는 겁보들.

그런 하루였다. 장마는 소강상태, 비는 그쳤고, 해가 반짝거려 부지런히 이불빨래를 했던 날.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아픈 것보다는 조금 울어서 손해보지 않은 날, 그런 날.

 

그리고, 방금 전에 그이가 수제비를 먹었다. 데워준다는 걸 그냥 찬 걸 먹어보겠다고 한 술 뜨더니 그냥 먹겠단다. 자정이 넘어도 한참 넘은 시간.
간간한 무말랭이 한 접시를 반찬으로 식은 수제비를 먹는다. 한 그릇을 비운 그이가 웃는다.
'맛있다. 한 그릇만 더 먹자'
고 말한다. 아까 함께 먹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이제 지금은 나아졌다는 듯이, 이제 괜찮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그러니 나는 그이에게 고맙다.
밥 먹어서. 잘 먹어서. 그리고 다시 웃어서.

그이가 먹는 걸 보면서, 살다보면 더 한 날도 오는 것인데, 너무 작은 일에 벌벌거리지 말아야겠다, 너무 겁보처럼 지레 놀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도 더울까. 내일도 해가 난다면, 온 집안의 방문을 활짝활짝 열고서 하루종일 환기를 시켜야겠다. 곰팡내 나지 않게, 더불어 내 가슴도 조금 열어두어야겠다. 마음의 곰팡내 피어오르지 않게. 그래서 나의 보송보송한 기운을 그이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질 수 있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7-05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싹틔운감자 2005-07-05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아, 님! 괜한 걱정을 드렸는가 봅니다. 나쁜 일은 아니에요^^ 흔한 말로 집안일,인데. 아, 괜한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었네요. 이런, 제 실수네요. 님의 염려를 읽다보니, 제 가슴이 다 철렁입니다. 염려 고마워요, 님. 죄송한 마음까지 드니, 이를 어쩔까요. 아무튼, 저는, 그리고 아가는, 건강한걸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가를 가지면, 좋은 생각만 하고, 예쁜 말만 해야 한다고. 그 흔한 말이 왜 그런지,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이렇게 경험하지 못한 일은 감히 실천하지 못하니, 이 무지함을, 이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아무튼, 님의 염려 덕분에 많은 것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님. )

딸기엄마 2005-07-05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그런 집안 일이라니까 시간이 약이겠군요~ 그러면 좋은 줄은 아는데 참 힘든게 태교인 듯 싶어요. 그저 엄마가 매일매일 행복하면 아가도 그걸 알아주겠죠? *^^*

싹틔운감자 2005-07-05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안녕하세요^^ 언제나 늦은 밤에 뵙네요(사실, 저는 예전부터 님의 서재를 마실다녔던지라;; ). 그렇지요. 소소한 일상, 그리고 그런 잔잔한 하루. 흔들림없어 보이는 수면도 나뭇잎 떨어지고, 물방울 떨어지고, 소금쟁이 팔딱 뛰어오르면 자잘한 동심원 만들면서 파장이 생기듯이, 일상도 그런 것이겠죠. 사람냄새,를 맡아주시니 고마운걸요! ^^ 자주 뵈어요, 님.

지우개,님- ^^ 시간이 약! 맞아요, 그렇겠지요? ^^ 태교- 음, 감정적으로 힘들어도 식욕이 땡기고, 그래서 마다하지 않고 밥 한 공기 뚝딱 비워내는 건강함. 저의 태교는 그런 씩씩함 같아요^^ 아무튼, 염려 고마워요, 님. ^^ 따지면, 오늘은 더 행복한 날이 아니었나 싶어요. 내일은 더 행복해져야 겠습니다. ^^
 

비가 내려서 안 덥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 이렇게 선선할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죄다 해야 하는데(빨래를 제외하고는 모든 집안 일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 아닌가! / 이런 날 스팀청소기는 효과가 있을까 없을까에 대해서 약간 고민이 되고), 제목 그대로
'총체적 게으름모드'가 되버렸다.
금요일 과음을 한 그이와 함께 숙취모드를 따라하며 게으름을 피운 토요일때문에, 일요일마저 그 연장선상으로.

 

*
비오는 날 시장을 보는 건 별로지만, 자두와 참외, 사과가 냉장고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반찬이 바닥이 난 셈. 시장을 마땅히 가야했던 날. 두부, 호박, 대파, 뭐 이런 것만 샀다. 도대체 무슨 반찬을 할 생각이었던게지? 아무튼, 시장을 어슬렁거리는데
찐빵,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왜 만두집에서 같이 파는 그 팥이 들어간 찐빵 말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아쉬워, 아쉬워. 아쉬운대로 호빵까지 생각이 난다. 여름에 호빵이 어디 있겠는가.
찐빵, 찐빵, 하다가 핫도그 두 개 사와서 그이와 나눠 먹었다. 그래도 찐빵이 생각난다.
앙꼬(라고 말해야 제 맛이다)가 너무 달아 하나 먹고 나면 입맛 사라지는 그 찐빵!

*
총체적 게으름모드,를 탈피하는 방법이 뭐 없나, 고민중이다. 완벽한 게으름이라면 그런 고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머릿속은 계속
아, 집이 너무 더러워-
아, 먹을 게 너무 없어-
아, 욕실 청소도 해야 하는데-
아, 침실 정리도 해야 하는데-
아, 드라이 맞길 옷도 있었는데-
아, 하필 이럴 때 리뷰가 쓰고 싶은 거야, 대체!
이러고 있다. 게다, 이렇게 안 더울 때 컴 앞에 앉아 있어야 생산적인 꼼지락을 할 수 있는데, 밀린 집안 일때문에 꼼지락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집안 일을 하자니 귀찮고, 마냥 귀찮고, 뭐 그런 상태다.
이럴 때는, 그이가 잔소리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그럼 못마땅하다는듯이, 그럼 어쩔수 없다는 듯이라도 움직일텐데. 나 혼자 행동화하지 못하고 머릿속만 복잡하고, 심리적인 짜증만 키우는 이
'총체적 게으름모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
배가 고픈데, 부엌에 서 있기가 싫다. 해주는 밥이나 따박따박 받아먹는 일이 얼마나 그리운지(배부른 소리다;;). 문득, 친정에 갈까, 그런 해괴한 생각까지 했다. 7월 중의 전시회도 꽤 있는 편인데, 그걸 핑계로 또 서울나들이를 한다면, 너무 양심에 걸리는 일이겠지? 힐끔, 그이를 한 번 바라봤다. 천진하게 컴퓨터 앞에서 해맑게 웃는 그이를 보고 있으니, 혼자 밥먹게 할 일이 또 미안해서 얼른 마음 닫는다. 아서아서, 그냥 조신하게 집에 있자고. 하지만, 밥 해먹기가 때로는 참말 귀찮다. 밥 해먹기가 얼마나 권태로운 일인지, 요즘들어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흠. 그래도 배는 고프다. 어쩔 수 없이, 이제는 부엌으로 가야지. 된장찌개를 끓이고, 부추전을 하고, 가지를 무치고, 오뎅도 볶아놓고, 두부조림도 해야지. 배고프다. 아무 하는 일 없어도 때되면 제깍제깍 배가 고파오는 것도 가끔은 무서운 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rryticket 2005-07-0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은 게으름 피우고픈데, 하필 오늘 약속이 잡혀 나가야 되어요,,
핑계를 대고 빠질수도 없는 몇가지 이유도 있어서,,맘 잡고 화장하고 외출해야 되어요..근데 왜 이리 귀찮은거죠?

딸기엄마 2005-07-0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게으름이 이해되는데요 뭘~ 때론 마음가는대로 하는 것도 좋아요. 그나저나 시간되면 울리는 배꼽시계 저도 정말 무서워요~ㅠ.ㅠ

싹틔운감자 2005-07-05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님- ^^ 외출은 잘 다녀오셨어요? 아, 저, 님의 마음 알아요. 그런데요, 그렇게 귀찮은 외출도, 다녀와서는 '그래도 나갔다오길 잘 했어!' 라는 생각이 들곤 하던데. 님은 어떠셨어요? ^^ 아무튼, 즐거운 외출이셨기를요!

지우개,님- 안녕하세요^^ 그렇지요? 뭐, 임산부특권이라는 걸 이럴 때 생색내면서^^ 근데요, 야밤에 삘이 꽂혀서요, 반찬도 서너가지 하고, 청소도 하고 그랬답니다. 새벽이 다 되어서 잠이 든 거 있죠(누가 저를 말립니까;;). 다행히 게으름모드는 해제에요. 오늘도 조금 부지런히 (오랜만에 해가 보였기 때문에 빨래를 해야 했고, 뭐, 청소도 열심히- ) 움직였네요. ^^ 아, 배꼽시계! 그거 무섭지요^^ (저는 지금도 배 고파요;; -_-;; )

merryticket 2005-07-0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외출,,,타이 식당가서 먹은건 별로 없으나 거하게 돈 내고,
커피는 만다린 호텔 가서 먹고, 수다떨고, 집으로 돌아 왔읍니다..
근데 그게 또 언제적 일인지,,시간은 왜 이리 빨리 지나는지..
 

물리적으로 따지면 자정이 넘었으므로 토요일이지만, 언어의 연속성에 의한 구분이므로 지금은 마땅히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라는 기분이 든다.

*
양희은의 '그 사이'와 '서울가는 길'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예전, 중학생일때 그녀의 앨범이 해금조치가 되어 두 장의 세트 LP로 라이센스 된 적이 있었다. 나는 마땅히 그 앨범을 구입했고(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참 조숙했다), 그 앨범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했다. 그 앨범에 수록된 모든 노래는 외다시피 했던 건 당연한 일. 그러다, LP에 손을 떼기 시작했고, 이제는 턴테이블은 친정에 두고 LP만 폼으로 내 집으로 옮겨왔으니 예전 노래를 다시 이렇게 듣게 된 것이 마냥 신선하기까지만 하다. 양희은의 젊을적 목소리, 그 낭랑한 목소리가 이 밤, 습기 가득 눅눅하지만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이 밤에 참 잘 어울려서, 나는 얼마간은 감상적으로 변해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중이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
그이는 오늘 늦는다. 금요일의 볼링모임에서 술자리가 있는 모양. 그 덕에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술에 취한 그와 잠시 통화를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어 있다. 제법 취했다는 증거. 농담삼아 일행의 이름을 대면서 '좋은 데 가자고 하는데 와이프 어쩔까?' 라고 묻는다. 그게 진담이든 농담이든, 나는 사심없이 대세가 그러면 혼자 따되지 말고 같이 즐기다 와, 라고 대답한다. 그이는 이렇다 할 대꾸없이 그 일행을 바꿔준다. 그이보다는 덜 취한 목소리, 허나 그도 마찬가지로 가득 취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부부와 한달 간격으로 결혼을 하고, 나보다 2주 먼저 아가가 들어선, 우리 부부와 비슷비슷한 부부이기도 하며, 무척 친한 커플이기도 한데, 그가 먼저 미안하다면서 말을 한다(남자들은 보통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운을 떼곤 한다). 내가 그런다. 술자리 방해할려고 전화한게 아니라, 전화도 안 하면 무심한 와이프라고 흉볼까봐 전화했다,고. 좋은 데 가실거면 신랑도 데리고 가세요, 라고 웃으며 말하니, 미치겠단다. 아니, 우리 와이프한테도 그런 것 좀 알려줘요, 나는 자꾸 잔소리 듣느라고 술이 다 깰 지경인데, 라고 맞받아친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를 대화들을 나누다가, 곧 다 같이 보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마친다. 그리고, 문득, 내가 이상한 여자인가, 라고 생각을 했다. 결혼한 남자들이 술마시다가 그런 농담도 하는 거고, 설사 그렇게 해서 그런 곳에 가게 되었다해도, 지금 당장 내가 쌍심지를 켜고서 '당장 들어왓!' 라고 소리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묘안이 되겠는가, 라는 것이다. 남자들 술자리하는 거, 사회생활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도 있고, 기분에 따라 마실 수도 있는 것이고. 마시다 보면 취하기도 하는 것이고. 나는 왜 그런 것에 느슨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을까. 내 아버지가 술을 마시던 남자가 아니여서 그런지, 나는 남자들이라면 의례히, 라는 생각을 하는데. 오늘 나와 통화한 그 집 와이프도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와이프로 유명한데도 그는 나를 '바다'라는 표현을 한다. 남편에게 관대하다,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글세. 생각해본다. 오늘 그와 나의 남편이 설사 소위 '좋은 곳'으로 갔다한들, 혹은 그런 꿍꿍이를 펼쳤다한들, 그걸 내가 어쩌겠는가, 라는 것. 내가 마음이 바다여서가 아니라, 남편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라는 이유를 든다면, 다들 내가 아직 덜 살아봤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을까. 뭐 그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
더웠던 며칠이 지나고, 오늘은 비가 오더니만, 지금은 아주 적절하게 선선한 밤공기가 아주 좋다. 마치 가을날같은 기운. 창문을 활짝 열고, 음악 소리를 낮게 맞춘 후, 나는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혼자 하는 일이란 가끔 외롭기도 해서, 지인들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들추기도 하는데, 어디에도 흔적들이 없다. 메신저마저도 조용하다. 모두들 즐거운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를 즐기고 있는가. 이렇게 좋은 밤, 기분 좋은 외로움을 느끼면서 나는 잠시 쉬는 중, 누군가 짧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
두 개의 이름으로 서재를 꾸리는 일은, 재미있으면서도 가끔은 소모적인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유쾌하면서도, 간혹 피곤하기도 하지만, 이런 글을 중얼거릴 수 있다는 점으로, 오늘은 고무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 그 사이 음악은 바뀌어 이수만의 '행복'이 흘러나온다. 나의 정서는 한 5~10년 쯤 물러서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내가 늙어 있다는 의미일까.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 그런 두서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내뱉을 수 있는,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
천둥 번개가 치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혼자있다. 무섭기도 이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댁에 다녀왔다. 시댁은 대구, 친정은 서울, 내가 사는 여기는 청주여서 결혼 이후 전국구로 움직이고 있다. 아무튼, 이번 대구행은 아버님의 퇴임을 앞두고서.

아버님은 평생 행정공무원으로 지내시다, 이번에 퇴직을 하셨다. 2005년 6월 30일,까지라면서 34년 4개월이라고 아버님은 말씀해주셨다. 최근 6개월간은 그 지역 문화회관관장직으로 계셨다. 나와 그이는 아버님이 퇴임식을 하기를 바랬다. 평생을, 참 성실하게, 그 어떤 이보다 청렴하게 일하신 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 나아가 아버님의 인생의 또다른 졸업식을 치루는 일이기도 하니까, 충분히 기념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아버님은 퇴임식을 거절하셨다.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이유,때문. 마지막까지도 아버님의 곧은 성격을 포기하지 않으신 모습도 참 존경스러웠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

아버님의 마지막 출근길을 배웅하고, 마지막 퇴근길을 맞이하기 위해 대구에 내려갔다. 자식된 도리로 퇴임식을 하시라고 강경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것도 죄송한데, 식사 대접도 못하고 말았다. 벌써 토종닭 두 마리를 맛나게 고아놓으셨던 것. 어머님 말씀으로는, 나가서 먹자고 했는데, 아버님이 애들 오는데 해 멕이자고, 부러 토종닭(고기는 무척 질기다)을 사다, 나는 임산부인 관계로 다시 따로 두 마리를 고아 놓으셨던 것이다. 나야 철없어서 맛있게 먹었지만, 어쩐지 참 죄송스러워서 내내 마음이 그랬다. 그래도 아버님은 부러 내려와주어서 고맙다고, 그 얘기를 자꾸 건네신다.

저녁을 먹고서, 아버님은 그이와 약주를 드셨다. 다른 친척분들에게도 연락도 안 하시고, 정말 말 그대로 조촐하게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시기로 하신 것이다. 우리가 준비한 선물은 조금 좋은 지갑과, 그 지갑에 조촐한 용돈을 넣어드린 것. 그리고 아버님의 퇴임을 축하하고, 아버님의 건재하심에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적은 편지. 아버님은 선물을 열어보시고, 편지를 꼼꼼히 다 읽으시고는 더 활짝 웃으신다. 고맙다는 말씀을 너무 많이 하셔서 오히려 더 송구스럽기만 했던.

잠자리에 들려고 거실을 치우고 하는데, 아버님이 나를 불러 옆에 앉히신다. 그리고는 손을 꼭 잡으시면서 고맙다는 말씀을 다시 해주신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아버님의 손. 평생 책상 앞에 앉아 계셨을 손인데, 생각보다 투박하고 거친. 아버님의 고된 일생이, 아버님의 강직한 일생의 흔적처럼 느껴져서 나는 괜히 울먹였다. 아버님이 두루두루 해 주신 말씀들. 우리의 건강한 일상과 더불어 우리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시는 말씀, 그리고 잊지 않고 또 말씀해주신 그 고마움의 표현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다음 날, 아버님의 마지막 출근 양복과 와이셔츠를 다리는 어머님 앞에서 그이가 농담처럼 '이제 엄마도 퇴직이네-' 라고 말해서 식구들은 웃었지만 어쩐지 아련하기만 했다. 퇴임식 대신 조촐하게 관내행사로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님의 양 손에는 큼지막한 꽃다발과 선물들, 그리고 대통령 이름이 적힌 표창장과 훈장이 들어 있었다. 아버님 평생의 수고가 그 훈장 하나로 증명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식구들은 모두 둘러앉아 그걸 바라보고 쓰다듬으며 아버님에게 그동안 정말 애쓰셨다고, 아버님이 그동안 건재해주셔서 고맙다는 마음의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 배웅하는 어머님께 나는 차마 아버님에게는 드리지 못한 속내를 보이고 말았다. 아버님이 쓸쓸하실까봐 걱정이 된다는. 그러자 어머님도 눈물 그렁거리시면서 나도 이렇게 쓸쓸하고 속이 그런데 본인이 더 하시겠지, 하신다. 그런 내색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 분의 마음이 조금은 그러하시겠지. 시끌거렸던 아들내외 가고나면, 큰 집에 두 분 남게 되시면 마음 더 스산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떠나는 발걸음이 쉽지 않기도 했던.

이제 아버님의 일상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고 예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워지실 것이다. 7월 말에는 어머님과 함께 북유럽으로 여행을 가신다고도 하시고, 이래저래 살짝 보여주시는 아버님의 계획들이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그동안 앞만 보고 걸어오셨을 아버님. 이제 아버님의 노년이, 이제 다른 의미로, 다른 무게로, 다른 모습으로 더욱 아름답게 빛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식들에게 보이신 몸소 실천하신 삶의 겸허함에 대해서, 삶에 대한 진지함에 대해서, 삶에 대한 성실과 삶에 대한 노력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머님이 보내주신 자두.
이모님댁에서 손수 따셨다는 저 자두는
대구식 표현으로 무척이나 '쌔그랍다'인데
그게 또 맛이어서 한번 먹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열개고 스무개고 그냥 먹게 된다.

저 '쌔그라운' 자두를 멕이고 싶으셔서 더운 날에이었는데도
손수 터미널까지 가셔서 붙여주신 마음이 참 감사해서
더욱 열심히 먹고 있다.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싹틔운감자 2005-07-0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네, 정말 셔요. 대구 말로 '쌔그랍다',가 바로 그 '시다'라는 표현이죠^^
근데요, 입에 침이 잔뜩 고이고, 다 먹고 나면 이가 시큰거리고 온 입 안에 신 기운이 남아 돌아서 다시는 못 먹을 것 같으면서도 또 이걸 옆에 끼고 앉아 있으면 열개고, 스무개고 그냥 먹게 된답니다^^ 무농약이어서 가끔 벌레도 나온다지요^^

merryticket 2005-07-0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개, 20개..변비는 최소한 안걸리겠어요..

싹틔운감자 2005-07-03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렇죠?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