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다산의 이름을 만나지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더랬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알지 못했던 다산을 만났다. 어느 정도의 허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읽는 내내 약용과 약전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소설1권에서는 정조와 다산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소설2부에서는 주역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러나 <다산>을 읽으면서 미처 몰랐던 사실들과 마주한 순간들이 짜릿했던 것 같다. 천주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종교로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비롯된 형제간의 갈등이 있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이 문제에서 파생된 이야기들이 흥미롭고,유배지에서의 시간을 허투르 보내지 않았던 그 마음이 놀라워 읽는 내내 소설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흑산' 이 언급될 때 김훈작가의 <흑산>이 떠올랐고, 소설 <다산> 덕분(?)에 <흑산>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다산의 시선으로 바라본 약종과 약전의 시선으로 바라본 약종은 어떠했을지.. 그런데 <흑산>에서는 약전 보다 황사영이 내 눈에 조금 더 크게 보였다. <다산>을 읽으면서 내내 황사영이 궁금했더랬는데, 신기했다. 그러나 끝낼 알 수 없었던, 아니 헤아리기 어려운 화두 하나가 남겨졌다.
"셋째 형 약종과 나는 이승에서 화해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약종과의 사이에는 눈알에 든 먼지처럼 불화 아닌 불화가 끼어 있었다. 화해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29쪽
비로소 흑산을 읽었다. 전적으로 소설 <다산> 덕분에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김훈작가님 글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러했다. 다산을 읽은 덕분에,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 읽어 낼 수 있었다. 약전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자산어보가 중심에 있을 줄 알았던 거다. 그러나...
"황사영은 이 세상을 다 건너가고 나서 죽었을까, 황사영은 살아서 오지 않는 것들을 손짓해 부르고 있는 것일까.고향 마재에서 흑산 사이에 억겁의 시간이 흐른 듯 했으나 시간이 이 끝과 저 끝에서 마재와 흑산은 마주 보고 있었다"/334~335쪽 '억겁의 시간' 이란 표현 앞에 '흑산' 이란 제목은 얼마나 어울리는 말인지.. 유배지의 생활, 자산어보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던 마음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고 반성했다.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낸 다산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질문하며, 공허한 질문은 아닌가 생각했는데 <흑산>에서 '억겁의 시간' 이란 표현과 마주한 순간 <다산> 과 <흑산>을 나란히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산>과 <흑산>을 읽은 덕분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1784년 천주교모임..그림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시에 그려진 그림인가 싶었는데, 김태화가님의 그림이었다. 푸른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이벽이라고 했다. 저 그림 속에는 정약용형제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