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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폭스트롯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8
무스잉 지음, 강영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평점 :
삶에 짓눌린 사람들의 이야기란 느낌을 받았다.
이내, 왜 삶에 짓눌릴..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된1930년대나, 21세기에 살고 있는 지금이나, 얼마나 공허한 질문인가도 알고 있다. 가난한 시절엔 그 나름으로, 풍요로운 시대는 또 그 나름으로, 전쟁의 시대는 또 그나름으로 채워지지 않는, 아니 채워지지 못하는 공허함이 있을테니까.
"삶에 짓눌린 사람에게 우주는 결코 태곳적 그곳이 아니다"/ 165쪽 '검은 모란'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은 신비로운 우주에 관심을 둘 마음이 없다. 여성혐오를 가진 남자가 있고, 그런 남성들을 향해 어떻게든 조롱을 날리고 싶은 여자가 있을 뿐이다. 한탕을 노리는 사람이 있고, 기계적으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그리고 가짜 감정들이 넘쳐난다. 힘들수 밖에 없는 이유다.그런점에서 소설의 제목을 춤에서 가져온것은 이해가 된다. 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진지한 대화보다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춤을 택한 이유들 소란스런 음악소리에 마음을 놓는다. 즐거워서 추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자신을 리듬에 무방비로 맡겨버린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점에서 보면 '팔이 잘린 사람'이야기가 가장 안타깝고, 답답했던 것 같다. 남자가 영원한 패인으로 남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지만,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는 사회에서 온전한 나로 다시 살아가기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춤에 자신을 맡기고 영혼 없는 삶을 선택한다.(자의든 타의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으로.
삶의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걸까 '4월은 유쾌한 계절' 이라는 <공동묘지>의 묘사가 역설적이란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4월이 잔인하다고 말한 시가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그리고 얼마전 읽은 폴윤의 <벌집과 꿀>이 다시 생각났다. 고단한 삶 속에도,반드시 달콤한 꿀이 함께 할 거란 믿음. 그래서 나는 기계취급 밖게 받지 못한 남자가, 자신을 다잡으려 한 그 마음을 응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당신을 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벽돌 공장과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있겠는가.그들은 하나같이 절단의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반드시 이 말을 듣게 되리라. 팔이 잘린 사람은 그 한 사람이 아니고 이 말을 하는 사람은 공장장 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이 깔려 죽은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공장 문을 나와 걷고 또 걸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졌고 돌아가서 세수를 하고 짐을 청소할 요량이었다(...)"/158쪽 '팔이 잘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