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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공가의 치부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1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평점 :
실베르라는 청년을 따라 가는 여정은 폭풍 전야를 느끼게 만든다. 그러다 불쑥 청년의 사랑이야기로 넘어간다.그럴수록 뭔가 긴장감이 더 느껴지는 건 밝음 뒤에 숨어 있을 어둠이 언제나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무슨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실베르의 시간은 거기서 멈춘 채,실베르의 연인 미에트의 가족사가 그려지더니, 마침내 루공가의 가계도가 등장한다.복잡한듯 복잡하지 않은. 그러다 불쑥 200페이가량 넘어간 순간 실베르와 루공가의 관계가 밝혀(?)진다.
"그녀는 후작을 만나면서 마음이 정해졌는지 잰걸음으로 걸으면서 빠져나갔다.그 여자의 작은 체구는 가차 없는 의지를 드러냈다.그녀는 비밀을 숨겨 온 피에르에게 마침내 복수할 것이며 그를 굴복시키고 집에서는 자신이 절대 권력을 영원히 확보하게 될 것이다.(...)"/417쪽
정치를 다룬 역사소설이란 점을 감안하고 읽었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펠리시테와 피에르가 어느 순간 소설 속 인물로 보여지지가 않았다. 나라가 어수선하지 않았다면, 펠리시테는 레이디맥베스의 부활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을 텐데, 아둔한 척 탐욕을 드러내는 펠리시테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소설이 아니었다. 우둔한듯 욕심 많은 피에르도 펠리시테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이즈음 펠리시테의 뜻이 궁금해졌는데 역자 후기에 알게 된 건 소설의 원제 뜻에 포르투나 여신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을 알았다. 행운과 불운을 배분하는 운명의 여신. 다만 디드 아줌마가 실베르에게 헌신한 듯 보여주었다는 사랑에 대한 깊이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가지 못했다.그녀가 건강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문제일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실베르가 그녀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보였는데, 실베르 시선으로 읽은 탓일수도 있다.
"(...) 그리고 한 그루터기에서 여러 가지로 뻗어 나가듯,한 가족의 밀고 올라오는 힘을 생각했다. 그 취하게 만드는 수액은 햇빛과 그늘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비틀어진 가장 멀리 있는 줄기에도 같은 배아를 실어 나른다.그는 잠깐 반짝하는 섬광에서 얼핏 본 것처럼 금빛과 핏빛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루공.마카르 일가의 미래를, 욕망을 실컷채운 패거리의 미래를 본 듯했다"/476쪽
어수선한 나라 상황 때문에 격하게 감정 이입 하며 <루공가의 치부>를 읽고 말았다.(지독한 오독읽기였다.) 그럼에도 소설이 단순히 정치역사소설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 가운데 어느 것이 삶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될까? 실베르와 미에트의 사랑이야기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장면들이 있어 울컥했고, 민감한 정치사에 언론이 침묵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으며, 불행을 틈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자들 또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돌아돌아, 에밀졸라 선생께서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본성에 대해 고민이 아니였을까. 탐욕스러운 아버지 밑에서,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의사 아들도 존재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기는 쉽지 않으니까.. 물론 그들의 일대기가 완전히 막을 내린 건 아니니까 이후 파스칼의 삶이 궁금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