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다음번엔 플로베르...를 읽어야지 생각하다가. 플로베르의 책을 먼저 읽어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하다 계속 미루게 되었다.그리고,2023년 마침내 읽게 되었고,재미와 놀라움의 연속으로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었더랬다.
플로베르에 관한 전반적인 고찰인 동시에, 또다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담았다.독특한 구조였다. 소설인지, 플로베르에 관한 전기인지 종종 착각 하게 되었다. 뜬금(?)없이 나레이터역활을 자처(?)한 브레이스웨이트라는 사내가 자신의 아내의 죽음..과 보바리 부인을 연결시켜 말할 때는 당혹스럽기까지..했다. 물론 그 비밀(?)은 바로 풀린다.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백 년 되는 어느 외국 작가에 대해서 이해한 것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정상인가? "/257쪽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그녀의 아내가 바람을 핀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 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흐름일수 있음을 암시하는 느낌... <보바리 부인>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소설이 출간 되었을 당시.몹시도 뉴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마담보바리..를 읽으면서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나는 건, 욕망에 대한 이름으로 보바리즘..이 생겨났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보바리 부인>을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이유가 셀 수 없이 많아졌고,(그녀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알아챌 사람이 얼마나 될까...싶기도 하고.무엇보다 그녀의 의사 남편이 두 번 결혼(? 했다는 사실도 내 기억에는 없다.) 한 작가의 전기에 가까운 히스토리를 소설처럼 읽게 만든 줄리언 반스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전기에 가까운 주제를 소설이란 형식으로 변주하게 되었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휘 될 수 있는지 경험한 기분이다. 어디까지 허구이고, 어디까지 사실인지 따져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읽기에 얼마나 편리함을 주는 것인지,설령 나도 모르게 오독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럴때마다 기억하면 된다.어디까지만 줄리언 반스의 시선이라고. 공감가는 지점과, 공감할 수 없는 지점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불편하지 않았다. 잠깐이었지만 지적인 허영심을 가득 채운 기분이었다..작가도 그 지점을 노린 건 아니었을지....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으며 느낀 감정과 또 다른 시선을 만났다. 줄리언 반스의 시선에서 강렬했던 첫 그것은..보바리 부인이 두명(?)이란 사실인데, 우리 사이에...서는 화자가 왜 <보바리 부인>에 집착했는지를 들려준다. 남자에게 보바리 부인은 안타까움의 대상이 아니라 간통한 여인에 불과하다.그렇게라도 자신의 아내를 죽인것에 대해 이해를 받고 싶었던 것일까.조금..아니 많이 비겁한 생각이 든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다시 읽게 된다면,마담 보바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화자가 왜 마담 보바리에 집착(?) 했는지를 따라가며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교롭게도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밑줄 긋고 싶어졌다.
"이 작품에서는 앵무새 어법도 자주 사용된다. 플로베르 특유의 투를 흉내낸다. '우아하고 빈정거리는 듯하면서 다소 외설스러운 데가 있다.' 필요할때마다 플로베르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 예를 들어 <<마담 보바리>>에 쓰여 있는 다음의 구절은 세 번이나 등장한다. '언어란 갈라진 주전자와 같아서 우리가 그것으로 연주를 하면 겨우 곰들이나 장단 맞춰 춤을 춘다.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그 언어로 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갈망한다'/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