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가엾고도 가엾고나.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강렬하고 단호하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지 않았으니 그만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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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2016년 작품 '아가씨'는 이름만큼 요사스럽다.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하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얼굴을 다시 보게 한다. 관객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는 감각을 이미지로 응축시켜 만든 것 같은 주제는 뜻밖에 단호하다. 바야흐로 박찬욱은, 자기 작품을 자유롭게 통제하고 거칠게 풀어뜨려 이 소품과도 같은 영화로 한숨 쉬어가려 한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골방에 갇혀있다가 풀려난 남자가 찾아가는 군만두의 맛, 떨어질 때의 타, 타, 탁월한 황홀함, 이런 것들을 이루어낸 감독이 선택한 로맨스는 어떤 것이었던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의 초반 몇몇 부분을 가져와 각색한 박찬욱의 '아가씨'는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속고 속이는 사기극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자기가 속는지를 모르고 속았으면서도 다행이라고 말하는 1930년대 배경의, 숙희와 히데코의 터널.
자, 이것은 어떨까. 매일 밤 잠들기 전 생각나는 액수의 돈을 가로채기 위해 사기꾼 백작은 아가씨 곁에 몸종 숙희를 붙여둔다. 어머, 백작님이 오신 다음부터 발톱이 빨리 자라네요. 사랑하게 되실 거에요. 라는 말 따위로 아가씨가 백작과 사랑에 빠졌다고 믿게 한 다음, 마침내 결혼하게 되면 아가씨를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아가씨의 상속재산을 나누자는 모의.
아니면 이것은 또 어떠한가. 다섯 살 무렵 벚나무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와 평생 어딜 가본 적도 없고 하는 일은 이모부가 모은 책 낭독회를 하면서 얼마 후면 그 늙은 이모부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 '되어 있는데', 이 모든 수동태 앞에 나타나는 능동의 동사. 사기꾼 백작이 속내를 밝히고 같이 도망가자고 한다. 물론 돈은 좀 나눠야겠지만. 도망가고 나면 이모부가 찾을 테니 몸종 여자아이를 자기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넣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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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읊은 이야기는 영화 '아가씨'의 1부와 2부이다. 같은 이야기가 두 번에 걸쳐 변주를 이루는 1부와 2부. 1부는 하녀 숙희의 눈으로, 2부는 아가씨 히데코의 머리로, 3부는 두 사람의 맞닿은 손으로 끝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나오는 씬이 몇 가지 있다. 아가씨와 숙희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으며 바라볼 때 마주하는 두 사람의 얼굴. 혹은 두 사람이 섹스할 때 맞잡게 되는 손. 능동과 수동의 경계, 보여주는 탐미를 넘어서 즐기는 손이 주는 느낌은 강렬한 주어의 느낌. 어쩌면, 손이 두 사람의 살결을 탐미적으로 훑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손을 아가씨의 장갑 서랍을 들여다보듯 아래에서 위로 쓸어내리지 않아서인지도, 또는 그 맞잡은 손이 굳게 서로만을 의식하고 있어서인지도, 혹은 전부 다 인지. 어느 것에도 잠식되지 않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나는 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그 손에 담긴 힘이 참으로 명쾌하고 담대해서 그와 반대로 영화 속 남자들의 속은 시커멓고 남은 여자들의 얼굴은 허여멀건 하다.
1부의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2부의 아가씨의 시선이 하나하나 붙잡는다.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애는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내가 되고 물새 같은 히데코는 물새 같은 내가 된다. 숙희가 히데코를 속이려 했던가? 히데코가 숙희를 속이려 했던가? 백작이 이 둘을 속이려 했었지. 그러다가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를 인정하는 순간, 두 사람의 욕망이 뻗어 나가는 시점에 와서 함께 문 앞에서 멈추어 앉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어서 여는 장면이 몇 번에 걸쳐 나오는 순간, 박찬욱이 하려는 말은 무엇보다도 간단하다. 이것은 로맨스.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부터 인지한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뛰어넘어 마침내 서로 손을 굳게 잡는 연대의 이야기. 나는 굳이 '연대'라는 단어를 골랐는데 그것은 이 두 여자의 사랑이 에로스적 색채와 더불어 '평등'의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만약 연대와 사랑,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느끼는 그 모든 감정의 기본값이 사랑이기 때문에. 극중에는 '사랑? 사기꾼이 사랑을 하나?'라고 스스로 말하는 숙희의 모습이 나오는데 영화 전체는 이 말을 천천히 뒤집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가득 채운 것은 눈빛과 시선, 소리와 낱말, 빛과 그림자.
배경은 주로 실내이고 서로서로 속일 때 가장 사소하고 중요한 것이 눈빛이니, 영화 속에서는 인물의 시점 숏이 유난하다. 숙희가 처음 아가씨에게 인사할 때 아가씨는 마침 거울을 등지고 있어 숙희에게는 아가씨의 얼굴과 목덜미가 한눈에 보인다. 아가씨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숙희의 강아지 같은 눈이다. 그 직전 등장했던 라쇼몽과도 같던 군인들의 빗길 속 행진, 얼굴이 누렇게 달아올라 돈 이야기와 모의에 정신이 없는 보영당 사람들을 비추던 그 빛과 소리는 아가씨에게 이르면 아이보리빛의 보얀 향내로 피어난다. 지그재그 길을 숙희가 비를 맞으며 걸어와 마침내 커다란 착각에 이를 때, 실내를 채운 것은 아가씨와 백작의 가짜 대화. 세상 부자 중에서도 누구보다 서책을 사랑해서 금을 팔아 책을 산다는 코우즈키가 모은 것은 사실 성애 소설. 의외, 역설, 진짜와 가짜 사이의 틈은 보영당에서는 누렇게라도 들던 빛이 코우즈키의 서재에는 아예 들지 않으며, 그의 지하실은 숫제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가 푸른 안개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아가씨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분명 류성희 미술감독이 공을 들인 저택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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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oil on canvas, 1948
숙희가 히데코 아가씨의 집에 처음 들어갈 때 작은 불빛 하나로 앞을 밝히며 가는 자동차가 가는 길은 마치 피터 그리너웨이의 차례로 익사시키기를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한밤중 보이는 집 전경은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아닌가. 섬세하면서도 계속 보노라면 기괴한 윌리엄 모리스가 작업한 듯한 느낌의 벽지가 드리운 아가씨의 방, 벨라스케스가 한 번쯤 그렸음 직한 아가씨의 옷자락. 거기에서 나아가면 남성 성기의 상징인 뱀이 대가리를 든 코우즈키의 서재가 나온다. 한 번도 영화 속에서 쓰임을 발휘해보지 못한 코우즈키의 성기 대신 빳빳하게 선 뱀 대가리의 쓰임을 보노라면 영화 속 모든 세트가 어떻게 등장인물과 함께 호응하는지가 그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가만히 있음으로는 자신의 존재증명을 다 할 수 없는 코우즈키의 서재는 그런 의미에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낭독회도 열고 서책도 탐하고, 어린 조카에게 변태적 글읽기도 가르치고, 아내를 고문할 수 있는 그의 공간은, 앞서 말했듯 '누군가의 무엇'같은 무언가가 가득 채운 코우즈키 월드다. 영국, 일본, 한국의 가옥이 한데 붙어있고, 실제로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서 일본인 행세를 하고, 이 겹겹이 문과 문으로 쌓인 집을 보노라면 코우즈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얄팍한 거짓말 그 자체의 인물이라는 것을, 이 모든 '지나가는 세트'가 그 전부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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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체를 세트가 앞서나가지도, 뒷걸음질 치지도 않는 말하는 배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조화로운가 하면 이질적이고 어지러운가 하면 간단하다. 뒤틀리고 암담하면서도 제 할 일 못하는 흐리멍덩한 이 안개 속을, 두 사람의 사랑은 거침없이 뚫고 지나간다. 가는 길목길목이 어떠하던가. 커다란 보름달은 숙희의 문에 있다가 두 사람이 저택을 탈출할 때 흐리게 웃는다. 마침내 해피 엔딩에서 달이 환하게 걷혔다가 엔딩 크레딧 장면에서 숙희의 방문에 가서 앉는 커다란 보름달. 이렇게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 영화 속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