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제멋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에도 요가는 괜찮은 운동이다. 그 시간만큼은 나는 내 몸을 요가 선생님의 주문에 맞춰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을 나 스스로 해야 했다면 정말로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착실한 학생이 되어 내 몸을 움직인다.
학창 시절에 착실한 학생 노릇을 할 때는 자괴감 비슷한 것이 들었다. 나는 그때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자괴감인지도 몰랐다. 자괴감이라는 것은 자신이 뿌리부터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당연하다. 누구나 12년을 남이 시키는 대로, 남이 만든 시간표 안에서, 원치 않는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인생이 오롯이 내 책임이다. 내 인생뿐만 아니라 남의 인생도 내 책임이다. 가끔은 남이 하라는 대로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요가 수업을 듣는다. 선생님의 주문에 맞춰 앉았다 일어섰다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기를 반복한다. 아무리 민망한 자세를 시켜도 나는 군말 없이 따라 한다. 호흡을 깊게 하며 내 근육의 가동 범위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오로지 요가 선생님의 주문에 맞춰서. 착실한 학생이 되어서.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일이다. 그런 것이 썩 마음에 든다.
-온전히 나답게, 한수희. 부분발췌
심호흡.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 대신 커다란 프렌치 윈도, 다른 쪽은 거울. 먼저 도착했을 땐 조심조심 스트레칭 하며 준비를 한다. 삭신이 쑤시겠지. 오금이 저리겠지. 남들 보기엔 엉거주춤 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 바쁘겠지. 발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조금씩 풀어주며 코어에 힘을 주며 혼잣말을 한다. 오늘도 잘 부탁해.
발레를 시작했다. 새로운 운동이다. 테니스를, 수영을, 요가를, 이제는 발레를 배운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지 않다. 몸을 움직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귀찮다. 고등학교 때 유연성 시험에서 는 최하 점수를 받아서 울고 싶었다. 몸이 마음대로 가주질 않았으나 자존심은 쓸데없이 고개를 들어서, 나는 그 뒤로 다시는 이거 안 해! 하고 혼자 되뇌었다.
테니스는 공이 무서웠다. 라켓은 무거웠다. 함께 연습하던 언니는 내게 '이건 피구가 아니잖아'라고 했다. 발을 빠르게, 시선은 민첩하게. 가족들은 펄펄 날아다니는데 나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전등 옆의 날파리가 된 심정이었다. 죽어라 지구 자전 방향을 찾아냈는데 그게 아니란다. 공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더군다나 빠르고, 힘 있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나를 테니스 꿈나무로 만들려는 듯 다시, 다시, 다시, 다시를 연발했다. 나도 나같이 겁 많은 아이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기에 나는 무서운 게 너무 많은 아이였다.
수영은 그보다는 오래 했으나 하루가 지나치게 길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수영을 했고, 회사에 출근한 다음 퇴근 후에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일주일에 두 번 했다. 그 틈에 다른 일도 하고 있었다. 하루를 견디기에 물 속은 조용했으나 물 밖은 시끄러웠다. 몇 가지 영법을 배웠지만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영법은 배영이다. 사람이 많지 않은 수영장에서 햇빛을 한가득 품은 수영장 물이 찰랑거릴 때면 내가 그 위를 천천히 유영하는 것이 행복했다. 그 감정은 과연 오래 지속되지 않아 행복이라 부를만 했다. 그 느낌이 더 길었다면 그것은 쾌락이었고 나는 중독되었겠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가는 그보다 훨씬 오래, 몇 년을 했다. 가끔은 화장실까지 참고 오랜 시간 매일 앉아 일하다 보니 어느날 허리가 파업했다. 잘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이 동작을 선보이면 회원들은 제각각 다른 동작을 했다. 실은 모두 같은 동작이었으나 각자의 몸 상태에 따라 다른 정도였다. 처음에는 몸을 갈대처럼, 풀처럼 휙휙 눕히고 다리를 찢는 잘하는 회원이 부러웠으나 며칠 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경쟁하지 않는 운동, 시체 자세인 사바 아사나가 있는 운동. 나는 몇 년을 요가를 하면서도 요가복 하나 없었다. 요가복을 사야 하나요, 하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은 추리닝도 괜찮아요. 아무거나 편한 거 입고 오면 됩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대로 집에서 입던 추리닝을 입고 몇년간 요가원을 다녔었다.
그러다 배우게 된 발레는, 내가 했던 어떤 운동과도 다르면서도 같았다. 선생님은 강단이 있어 빈말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첫 시간, 자세를 한 번 볼까요. 라는 말에 제대로 앉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은 그저 편하게 앉아 계시는데 나에게는 앉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리를 뻗으세요. 발끝을 쭉! 허리 코어를 세우고! 어깨 활짝! 턱을 들지 말고 머리끝에 추가 천장에 매달렸다고 생각해봐요. 허리 나온다 허리 집어넣고!
요가를 할 때 끊임없이 머릿속에 돌던 딴생각이, 레오타드를 입은 내게는 들어설 틈이 없다. 시간이 남으면 완결되지도 않는 생각의 문장이 머릿속에 쉴 새 없이 떠돌았다. 요가를 할 때 돌고래 포획에서부터 집 냉장고에 남겨둔 케잌까지 온갖 생각에 몇 년 전 그 자식이 내게 했던 치사한 말까지... 아, 나는 속 좁고 기억력 좋으며 뒤끝까지 있는 인간이었다. 이런 생각이 치고 들어오려는 찰나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서 내 몸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허점을 짚어낸다.
힘들고 벅찬데도 계속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이 평온해서이다. 1번 자세 없는 2번 자세는 없다. 요령을 피워서도 안 된다.
몸을 젖힐 때엔 뒤틀지 말고 똑바로 넘어가야 해요. 다리가 힘들 땐 배에 힘을 주세요. 제대로 돌려면 제대로 설 수 있어야 해요. 바는 몸 전체를 지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짝 도와주기 위해 있는 겁니다. 중심은 내가 코어로 잡는 거에요.
시선부터 발 뒤꿈치 틀기까지 선생님은 나를 만나면 쉴새없이 바쁘다. 나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가뭄에 단비처럼, 건빵 속 별사탕처럼 칭찬을 들으면 기쁘다.
유독 그 칭찬이 좋은 것은 그가 빈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될까요? 라고 물으면 '되도록 연습해야죠.'라고 말한다. 그저 언젠가는 될 것이다, 그런 말은 없다. 집에서 쉴 때 허리 펴고 목 세우고 쉬세요! 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한다.
내주는 숙제를 매일같이 하지는 않는다. 국립발레단 입단을 목표로 둔 것도 아니고, 이미 뼈가 굳은 성인이다.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다루는 것이 발레를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비법일 테니. 오래전 유연성 시험에서 최하 점수를 받던 그 아이가 이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계단을 오르듯 외국어를 배우듯 하나씩 조금씩 해나가는 것. 공간은 열려 있어 숨을 구석이 없고 음악 소리는 내가 멈출 수 없을 만큼 정해진 박자로 이어진다. 기본을 지적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늘 힘이 가득차 있고, 가끔 잘했어요! 바로 그거죠! 하는 말을 들으면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거였어. 아마 이전이었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가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배에 이렇게 힘이 들어가고, 등이 다져지고, 손끝에 살짝 마주친 중력에 반대되는 순간. 곧 지나가고 사라지겠지만 다시 몸을 곧게 편다.
다시금 내 몸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이것은 내게 하나의 로맨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