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 - 일러스트레이터와의 대화
박선주 지음 / 지콜론북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비둘기떼, 빗소리 자국, 거리, 꽃, 안개, 숲, 텅 빈 어느 곳. 희거나 검은 형체, 바삭한 질감, 구둣굽 소리, 색깔, 냄새, 습기와 건조함. 상상한 그 어떤 것은 내가 보았다고 믿었거나 볼 것으로  생각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도 했다. 기억한 이것이 맞고 틀림을 떠나 머릿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선처럼 날아오르는 순간이 있다. 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by Jon McNaught




 일러스트에 관해 말하면 어떨까? 안네 프랑크의 집에 관해서. 버스 정류장의 모습을, 아프로디테상을, 공중전화부스를, 크리스마스 산타의 행렬과 안네 프랑크의 펜 끝을 드러낸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해서.





 귀를 기울이면 안네 프랑크가 썼던 일기장을 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눈으로 덮인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가 만져질 것 같다. 책장을 넘기는 바람 소리가 들려 내 눈이 저절로 저 먼 곳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내린 거리, 가로등은 빛을 수줍게 밝혔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 적이 있었다. 눈길이 있었고 손끝에 닿던 머플러의 감촉이 차가웠다. 길가 비둘기가 뭔가를 부리로 쪼고 있었고 노점상은 주름진 손으로 신문이며 과일을 바구니에 넣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면 비둘기떼가 기다렸다는 듯 낙엽처럼 하늘로 오른다. 불빛에 비친 먼지가 함께 하늘거린다. 이것을 놓치며 살아가는데, 이것을 붙드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일러스트레이션은 이 시각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손끝이 찌르르해지는 책이다.







by Allessandro Sann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잠시 들여다본다. 어떤 특정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드로잉을 포함한 일체의 시각화 작업, 바로 일러스트레이션. 우리가 줄여 부르는 일러스트라 일컫는 영역.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 인쇄매체의 영역을 벗어나 이미지를 통한 내용 전달.

 시각 예술 내에서 사진이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보여주어 신뢰감을 심어준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면 사진은 현장에서 일어난 무언가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로모와 DSLR, 노출과 조리개가 바로 사진 일부이다. 기기의 발전과 함께하는 현장성, 기록성 등의 영역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사진과 경쟁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영역의 제한을 받지 않음으로 하여 스스로 한계를 벗어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생각한 것을 마법처럼 보여준다. 재크와 콩나무의 콩나무가 하늘의 구름을 뚫고 올라갈 때, 일러스트레이터는 아마 작은 환성을 지를 것 같다. 그 최초 발생을 동굴벽화라고 해도 될까? 아니, 이집트인의 진흙, 석회석으로 그린 그림, 파라오의 수호자 호루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도 일러스트레이션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러다 우리가 지금 흔히 생각하는 단어를 뒤틀어 구름을 잡고 이미지를 끌고 내려와 붉은 풍선을 만들어내는 일러스트레이션의 특징은 18세기 초, 정치 풍자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이 제작되면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제는 디자인과 광고의 영역을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이 일러스트레이션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by Heidi Goennel





 알레산드로 산나,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 이성표, 이케르 스포지오, 세르주 블로크, 블랑카 고메즈, 칼레프 브라운, 마사코 쿠보, 숀 탠, 두르가바이 브얌, 제시 티스, 레아 던컨, 존 맥노트, 조란 퓬게차르, 아오이 후버 코노, 크리스토프 니만, 하이디 고넬, 해리엇 러셀, 사라 파넬리. 





 이 책을 열면 만날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질문을 던지고 책을 엮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소개한다. '그림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나오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우리 손아귀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내 마음을 끌었으되 내가 그리지 못했던 것들. 내가 무심히 스쳤으되 심방과 심실 어딘가에 남아있던 것들. 내가 가진 풍경의 일부, 내가 겪었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풍경을 풀어내고 상황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그것이 그들의 일부가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을 아무 것도 없는 공백에 펼쳐나간 이들의 대답과 필치. 





 이들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림만큼이나 자신을 드러낸다. 현재 이탈리아 만투아에서 작업 중이라는 알레산드로 산나는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테크닉보다 먼저라는 말을 하며 색은 별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백이었고 붓 자국이었다.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그에게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나가서 주변 세상을 보기도 하고, 손이 지쳐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리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뉴요커의 커버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장 자끄 상뻬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린다는 것은 보는 것이었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이상 그릴 수 없을 만큼 그리기도 했다는 점은, 일억 시간 이상을 바쳐도 모자랄 그들의 일러스트레이션에의 애정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세월이 흘러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인가요?

:감정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을 전해야 합니다. 보는 이가 생각하도록 만들거나, 적어도 보는 이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합니다. 제 이미지들이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아주 간단한 이미지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 정신과 마음이 어린이의 것이라면 더 좋을 것입니다.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살펴보면, 다른 책, 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가 쓴 'art & fear'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텅 빈 캔버스에 가해지는 처음 몇 번의 붓질은 수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최후 몇 차례의 붓질은 오로지 그 그림에만 맞는 것으로, 더이상 다른 그림이 존재할 자리는 없게 된다. 상상 속의 자굼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가능성만을 현실로 바꾸며, 매 단계는 미래의 선택들을줄여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에 가서 그 작품은 다른 작품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게 되며, 그것이 바로 작품의 완성이다.-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

 


 

 결국, 이것은 일러스트레이터 자신이 자기 목소리와 손길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 뜻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이되, 보는 이를 세심히 고려한 작업의 결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짧은 흥밋거리로, 잠깐의 재미로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산나가 그린 '안네 프랑크의 펜'을 볼 때 어떻게 한 소녀의 갇힌 마음과 그 소녀가 꿈꾸었으나 가보지 못한 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의 철로 위에 있는 집,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두 군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어떻게 전쟁과 전투에서는 누구도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을 가졌음을,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세르주 블로크의 연말연시 런던 투어 관련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유쾌한 빼기의 법칙을, 블랑카 고메즈의 심플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단순함이란, 명백한 것을 빼고 의미있는 것을 더하는 것이다."라는 존 마에다의 말과 일치하는 지점을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by Gürbüz Dogan Eksioglu


 



 '다른 무엇', '새로운 무엇'에의 감동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 같다.

 노란색을 좋아해서 노란색이 들어간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할 수도 있다. 더 선명하고 진짜같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것을 좀 더 다르게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보는 것, 생각한 것, 또는 느끼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해바라기밭이 있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사물이 단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면 그처럼 재미없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보고 느끼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의 주체인 '나'의 안팎에서 벌이는 사건도 없을 것이며, 다양한 긴장과 높낮이도 사라질 것이다. 새로움, 다채로운 색감, 의외의 선, 생각지 못한 형태가 일러스트레이터의 눈을 통해 드러난다. 일평생 단 하나의 사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 속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노라면 하나의 사과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상과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은 그 속성을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이루어지는 어려운 일. 머리 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경 속에서 밖으로 선명하고 밝은 빨간 풍선이 살짝, 하늘로 날아오르면 아마도 재크와 콩나무가 있었던 구름 위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의 핵심을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






by Harrier Russell

 




 인터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아 앞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려 하거나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말 대신, 나는 이 책이 문장부호가 알맞게 쓰인 풍경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전반적인 형태와 개성이 눈에 들어오지만, 결국 그 모든 특성은 우리가 무심코 보아 넘기는 세상의 풍경에 자리를 양보하기에. 그리고 여기에는 가벼운 깨달음이 뒤따른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결국, 이 틀 안에 담긴 아이디어는 우리가 지나친 것들의 합산이라는 점. 최초에 공백과 여백이 있었다면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제자리에 필요한 순간 있는 여백으로 있는 크리스토프 니만의 쉼표,

 무채색 거리에 점을 하나 찍듯 붉게 타오르는 알레산드로 산나의 마침표. 

 매력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아낸 숀 탠의 느낌표!

 존 맥노트의 버스 정류장에는 통행 허가증 없는 줄임표가 통행 허가증 없이 가지런히......

 사진과 페인팅을 전공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이는 하이디 고넬의 일러스트레이션에는 큰따옴표가,

 블랑카 고메즈의 산뜻하고 경쾌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작은 따옴표를 노래한다.




 이들의 일러스트는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공기가 산뜻하여 새롭다. 마치 유월의 마지막 날이 춤을 추듯. 




 

 


by Blanca Góm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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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7-01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는 말씀에 동감해요.
Gürbüz Dogan Eksioglu의 나무가 통째로 하늘을 나는 그림, 여러개의 달 그림, 빨간 주전자 등은 금방 보고 지나치지 못하게 눈길을 붙드네요.
알렉산드로 산나처럼 '아이디어와 콘셉이 테크닉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더라고요 ㅠㅠ

Jeanne_Hebuterne 2013-07-04 08:10   좋아요 0 | URL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아마 명필이 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붓을 써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답니다.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실력은 기본, 장식은 옵션'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 의기소침해진 적도요.


최근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은 책을 두어 권 접했는데, 이 책의 경우 다양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인터뷰가 실려 있어 보편성을 띠는 것 같아요. 이제 본격적인 장맛비가 내린답니다. 하늘에서 일억 개의 물방울이 쏟아질 텐데, hnine님의 장마용 음악과 함께 주말을 보내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7-0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접수하시는 테른님^^*
풍경처럼 깨달음처럼 또는 배경이거나 물결인 것철럼
님의 안내로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 살짝 들여다 봅니다.
후텁지근하네요. 어서 여름이 지나가길요^^*

Jeanne_Hebuterne 2013-07-19 09:42   좋아요 0 | URL



성실한 접수계 직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댓글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도, 사람이 만든 그 무엇도 의심하는 늙은이의 고까운 자세로 대하곤 하는데 종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작품을 접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낮, 나무 아래서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으면 여기는 캘리포니아라고 우겨도 속아 넘어갈 날씨입니다. 어느 곳은 홍콩 같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무더운 여름, 더워서 좋은 여름, 그래서 여름. 잘 보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