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링킹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랑은 그녀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망쳐버렸기에 결국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관계, 스무 해 동안 얽힌 그 관계를 그녀는 끝낸다. 1959년. 미국 보스턴 출생. 화가 어머니와 정신분석가 아버지. 1981년에 브라운 대학 우등 졸업. 보스턴 피닉스, 뉴우먼, 마드무아젤 등의 매체에 객원 편집자, 주간 칼럼니스트로 활동. 그리고 2003년 폐암으로 사망한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은 강렬한 사랑의 역사이다. 




 

원래 그런 법이다.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시도하고 또 실패한다.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고, 석 잔, 아니 넉 잔, 다섯 잔째 술을 마시기 위한 변명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오늘만이야.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위로가 필요해. 내일부터는 잘할 거야.......'

 어머니와 해변을 산책한 지 몇 주일 후, 책을 읽다가 알코올 중독 여부를 알아보는 자가 테스트를 접했다. 그 테스트는 한계 설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섯 달 동안 하루에 꼭 석 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는 없다. 누군가 죽어도 석 잔 이상은 안 된다. 직장에서 해고되어도 석 잔뿐이다. 결혼식, 장례식, 축하 모임, 갑작스런 불행, 어떤 것도 상관없다. 나는 그 테스트를 몇 번이나 해봤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족히 수십 번은 될 것이다. 뻔히 알면서도 규칙을 어기고 네 번째 잔을 마시거나, 커다란 잔에 술을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석 잔이라도 실제로는 여섯 잔을 마신 일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한다. 

 그럴 수 없었다. 알코올은 내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인생을 통틀어 내게 그보다 중요한 관계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러브스토리다. 

 열정에 대한 이야기고, 감각적 쾌락과 깊은 흡인력, 욕망과 두려움, 타오르는 갈망에 대한 이야기다. 그 강렬함으로 온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도저히 이별을 상상할 수 없는 상대와 작별을 나누는 이야기다. 

... 우리의 첫 만남은 별로 극적이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사이는 아니었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천천히 굳어진 사이다. 막연히 품고 있던 좋은 감정이 어느 순간 열렬한 집착으로 돌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마음 한구석을 조그맣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우리의 관계는 일변해 있고,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길은 없어져 버린다. 그것은 내게 너무 간절해지고, 내 인생의 확고한 중심이 되어 버린다. -17 페이지 


 


 관계의 문제, 그 사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문제에 캐롤라인 냅은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권위자였다. 오독하고 오인하고 오판했다. 자신의 역량을 몰랐다.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 나쁜 남자였던 줄리안이야말로 '그녀에게는 다앙한 가능성이 있지만 대체 언제 그 가능성이 빛을 발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상담사에게 말한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잘해주는 존재야말로 나를 망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볼 때 줄리안과 술은 거의 용호상박의 존재이다. 



 일할 때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철칙. 일에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철칙. 그 철칙 덕분에(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알코올 중독을 알아채지 못한다. 리츠 칼튼에서 한 잔, 회사 건너편 중국 식당에서 조니 워커 블랙 온 더 록스 더블샷 한 잔, 집에 와서 한 잔. 생성되는 도파민, 작동하는 뇌의 보상 시스템.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 자기 위로는 코냑 두 병으로 대체된다. 전시용은 늘 얌전히, 토스터 뒤의 숨겨둔 코냑은 이삼일 만에 완전히 사라지는 형태로. 게으른 합리화. 어설픈 투사.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 같은 모습. 고통과 함께 오는 진실. 늘 미끄러지는 깨달음. 이 느낌은 곰팡이처럼 자존감을 깎아 먹으며 곪아갔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발끝을 내려다보면,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에는 뒤틀린 가족관계, 제어할 수 없는 자기 파괴 본능, 자신이 부족하다는 낮은 자존감, 만족스럽지 않은 대인관계가 드러난다. 한 사람의 과거는 곧 그 사람의 미래. 그 미래가 그녀에게 왜 그렇게 다가와야 했나. 스무 살이 넘어서야 자신이 몸담아왔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는 이의 절망. 모든 가정이 걸머진 속죄 같은 숙제. 매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라는 요구가 어느 순간 오늘은 어땠냐는 질문으로 바뀐다. '별일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다면 새로운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는 말이냐?'라고 거대하고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무엇으로 대답을 바꾸었다. 치고 들어갈 지점을 찾는 자의 날카로움. 그 속에 깃든 것은 가볍게 즐기는 마티니 한 잔.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그것 없이 그녀는 아버지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배경 없는 블루 스크린 앞에서 절벽에서 낙하하는 연기를 펼쳐 보여야 하는 여배우처럼 느끼던 그녀에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술 한 잔. 후에 아버지가 벌였던 일들을 떠올리며 마시던 술 한 잔은 망각의 음료이자 지혜의 음료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겨울이 오면 나뭇가지의 잎이 떨어지듯 아침이 되면 사라졌고 그녀는 겨울나무처럼 헐벗었다. 마음을 채울 무언가를 향해 술잔을 기울였다.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위로를 구하니까. 그것은 마음속 아득히 깊은 곳의 일이라서 표면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허기, 결핍감. 안도감과 위로와 평안을 줄 외부의 무언가를 향한 갈망.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기 극복 모임인 AA는 실제 대단한 의지가 있어야 성공을 맛볼 수 있는 단체이다. 알코홀릭 어나니머스. 이 단체는 전미 전역에 퍼져 있으며 주로 한 주에 한두 번 열리는 것이 원칙이다. 주로 교회의 예배당이나 지역 공동체의 회관 등을 두세 시간 가량 빌려 정기적 모임을 하고 알코올 중독자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모임을 공개한다. 주로 알코올 중독 경험이 있었으나 거의 극복해 나가는 한두 사람이 이삼십 분 가량 발표를 하고(형식 자유), 그 뒤 모임에 모인 사람 전원이 이름과 중독 사항을 돌아가며 말한다. 그 뒤는 개별 자유 토론이 이어지는데, 모임의 모든 것이 자유이며 출결 상항을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만큼 구속력이 낮기도 하다. 전미 알코올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알코올 소비자 10퍼센트 내외가 소비하는 미국의 재활 시스템은 눈물겹다. 문제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신들의 논리로 해결방법을 찾는 이 나라에서 알코올 중독은 위험 수위를 넘어선 것이 분명하다. 모두가 머리에 꽃을 꽂던 마리화나와 술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파티장에서도 페리에를 들고 다니는 것이 더 패셔너블해 보이는 시대가 되며 술꾼들은 길을 잃었다. 물론 캐롤라인 냅도.  AA 보다 효과가 더 큰 것은 개인 스폰서 시스템인데 이는 멘토링 시스템의 일환으로, 1:1 관계가 성립된다. 수시로 상태를 체크, 보고하고 정기적으로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 지속적인 관찰을 시행하는데 캐롤라인 냅은 재활 기관과  AA만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다. 어떻게든 술에서 벗어나 공허의 우물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의지. 




 마릴린 먼로, 주디 갈란드, 라이자 미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명성의 압박, 창조의 열망. 영혼의 치유. 그와 달리 캐롤라인 냅에게 술은 대인관계의 창이자 자신의 위안이었다. 황홀경의 영역, 심리적 비상. 환상이 기거하는 은밀한 장소. 단순한 무엇으로 환원되는 세계. 유대감을 전해주고 사회생활의 불안과 고립에 처한 이에게 놓아주는 다리. 그녀는 그 다리를 건넌 것뿐이었다. 그러나 효율성이 전부인 시대, 도덕적이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지배하는 사회, 부모의 기대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시간에 캐롤라인 냅이 건넌 다리는 쉽게 돌아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재활 모임에서 떠도는 농담처럼 오이는 피클이 될 수 있으나 피클은 오이가 될 수 없는 법. 

 그녀는 알코올 중독의 갈래 가운데 하나인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임을 고백한다. 늘 술에 취해있지도 않다. 빛나는 성과를 낸다. 수많은 이들과 바쁘게 연락한다. 남자를 사귀기도 한다. 그녀가 열네 시간 내리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쓰고 집에 가면 냉장고에 넣어둔 백포도주를 마셔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질문, 그에 따르는 간결한 답. 상황에 따른 책임. 그녀는 책임 회피 여부를 알코올 중독자를 가려내는 간단한 척도라고 말한다. 관계가 꼬였을 때 개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언행이나 사물 탓으로 합리화하는 것. 이 감정의 실루엣은 술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모든 기만자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뜻은 아니다. 단, 알코올 중독자 중에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합리화를 하는 이들이 있을 수가 있다. 관계가 단순하게 느껴지고 연막이 사라지는 듯한 감정의 이탈. 이것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인 그녀는 술을 마시는 일이라고 불렀고 알코올 중독에서 헤어난 같은 개인인 그녀는 환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술이 이루어내는 일. 그러나 보통의 우리는 술은 죄가 없으며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것은 의지와 도덕의 문제. 그렇다면 중독은 의지의 영역이건만, 실은 알코올 중독은 강력한 물질적 메커니즘 작용의 결과이다. 신경의 보상 회로의 기억 능력을 통해 신경학자들은 알코올 중독에서 상담 위주의 치료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의 메시지가 두뇌에 저장되면, 그 메시지는 영구히 아로새겨진다. 약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 방어력은. 그 모든 물질적 메커니즘 앞에서 홀로 설 방법을 탐구하기까지 캐롤라인 냅은 이십여 년의 여정을 거쳐야 했다. 술의 강을 노 저어 온갖 희환과 고통, 기만과 환영 끝에 얻은 결론. 스스로 좌절에 대한 내성 없이 충동으로 움직이던 그녀가 마침내 너무 많은 것을 더는 잃지 않겠다고 결심한 다음 그 결심이 굳건히 지켜지는 과정을 써내려간 이야기.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명명백백히 하나의 사랑 이야기다. 아프고 괴롭고 파행적이어서 누구라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는 대다수가 이런 사랑에 심취해 있거나 심취한 적이 있지 않은가? 정도가 다를 뿐. 스스로 눈치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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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2-1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구절이 몇 구절 있어서 카피하려다 말다 그랬어요, 댓글 잘 안 달았는데 오늘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서요.^^;;;

Jeanne_Hebuterne 2013-02-13 10:03   좋아요 1 | URL
나비님! 나비님을 꿰뚫어 보는 듯한 구절은 어떤 구절이었을까요? 이 책은 저자의 음주에 관한 글이지만 그 배후의 요인을 개인적으로 탐색하는 글이기도 하여 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글이었어요. 읽다가 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 구절이 꽤 많았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3-02-13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3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2-1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 안녕. 언제나 실망할 수 없는 님의 리뷰.
나비님 대신하여 저를 꿰뚫는 구절 고백할게요.
<제어할 수 없는 자기 파괴 본능, 자신이 부족하다는 낮은 자존감, 만족스럽지 않은 대인관계,한 사람의 과거는 곧 그 사람의 미래> - 이런 구절 보면서 뜨끔하지만 그래서 님 글이 더욱 고급스럽게 다가오지요. 아, 이런 리뷰 올리고도 지쳐 쓰러지지 않는지요?
전 이렇게 쓰지도 못하지만 가능하대도 한 이틀은 앓아 누워야 하는 체질이어요ㅠ
굿나잇하시어요...^^*

Jeanne_Hebuterne 2013-02-14 11:28   좋아요 1 | URL
팜므느와르님! 원문이 워낙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여(이러기가 제겐 무척 어려워요) 읽는 내도록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특정 문제를 다룰 경우 그 문제를 겪어보지 않은 독자는 작가의 생각을 따라잡기가 힘들 수도 있는데, 캐롤라인 냅의 경우 솔직하고 친근하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어떤 챕터, 어떤 과정도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입니다.

좋은 리뷰는 탐정 소설은 탐정처럼, 자기고백 수기는 인터뷰어처럼, 인문학 서적은 구도자처럼 풀어나가 원문과 높낮이의 차이가 나지 않는 리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다른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 내가 감탄하고 감동했던 것을 타인에게도 소개할 수 있을테니까요. 전 아직 많이 멀어서 많이 갈팡질팡하는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갈팡질팡하다 보면 어느새 딴짓을 하며 옆길로 새곤 합니다. 팜므 느와르님은 온 힘을 쏟아부으셔서 그런 것일 거에요. 그래서인지 친근하고 겸손하게 조근조근 속삭이시는 것이 느껴져서 살짝 부러워지곤 합니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과 커피도 함께. 혹은 핫초코를 마시기에도 좋은 날이에요. 핑계가되니까요!

덧-저 책은 읽는 내도록 뜨끔한 모든 구석구석을 락스로 박박 살균세척을 하는 자기고백과 성찰의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