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writer는 아니어도 

글쓰기의 철학은 삶의 철학, 삶의 기술.. 그런 게 되는 면이 있다. 

<자기만의 방>이 '여자들이 써야 한다' 내용임에도 '(여자들에게) 좋은 삶의 가능성의 조건' 

("가능성의 조건" 이 말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더 보게 되는 일. 쓰기에 대해 작가들이 남긴 

말들 찾아보면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삶의 '정비'가 일어나는 일도. 


이 말도 참, 글을 조금이라도 써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말이면서 

그러나 진실. 강력한 진실. 남들이 무얼 듣고 싶을까 생각하지 마. 네가 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해. 

그것만이 네가 해야 할 말이야. 정말 그렇다. 정말 그렇고, 당연히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데 그럼에도

수시로 기억해야할 진실. 


닫을 문이 있다는 것. 

혹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것. 

이것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인권 아닌가. 문명 속의 모든 인간에게. 로 제한해야 하나. 

문을 닫고, 내게 참견하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생각하기. 좋은 삶의 필수 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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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지옥 같은 곳이고 

나쁜 글들이 우리 고통의 품격을 해치고 있어."


이 문장도 번역 컨테스트라도 한다면 

(그 시험 안에서는 난이도 하의 문제로) 출제된다면 좋겠다. 


이 말 마음에 든다. (좋아서 웃고 있음... ;)

정말, 이 말로 다 말하는 것 같다. 나쁜 글은 무엇을 하는가의 이유 전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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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on writing 주제로 아예 책이라도 구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러기 전에 구글 이미지로 찾아보면서. 오늘은 지드의 이 말이 마음에 든다. 

광기가 재촉하고 ("prompt" 시키고... 가 더 나은가) 이성이 쓰는 글. 바슐라르의 글이 이런 글 아님? 

카프카도? 최고의 작품들, 저술들은 모두 예외없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심지어, 그러니까 헤겔도! 

아도르노도. 니체 물론이고. 


거의 정확히 날짜까지 1년 전인 16년 2월 6일에 

상반기 중 페이퍼 두 개 끝내야겠다고 썼던 것을 조금 전 발견. 

그런데 그와 똑같은 페이퍼를 대상으로 똑같은 ㅋㅋㅋㅋ; 결심을 올해인 17년 1월에 했던 것이다. 기시감. 혹은, 사랑의 블랙홀. 그라운드혹스 데이. 


매년 연초에 쓰지 못할 페이퍼를 쓰겠다는 계획을 

매년 연초마다 반복함. 같은 주제 같은 편수. 음 적어놓고 보니 훨씬 덜 끔찍해 보이는데 

아까 저 기록을 발견했을 땐 순간, (조금 과장하면) 얼어 붙었다. 


그래도 한 편은 이 달 중 끝나고 투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두번째 페이퍼는, 진정 쓰기와 공부의 동시 진행이 될 예정인데 

그래서 정말 하루 6문장 쓸 수 있을까, 이것이 마법 공식이라고 체험할 수 있을까 아닐까 

기대되기도 한다. 딱 6문장만 쓰고 부랴부랴 (다음 6문장을 위한) 책 찾아 읽고... 그러게 되려나. 아니면

얼마 동안 그러다가 작파하고, 2주 정돈 책만 읽게 되려나. 그런데, 사실 2주 정도면 충분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공부할 주제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고, 공부가 필요할 때 페이퍼의 개요를 짜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2주가 맥시멈. 그렇게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쓴다면 (자신에게 조금 새로운 주제로 쓴다 해도) 1년에 2-3편의 페이퍼. -- 2-3편의 같은 페이퍼로 3년 반복만 아니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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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산책하면서 이것 들었는데 

한 출연자가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이 대단히 놀라운 문서라면서 

주제는 고대 원자론, 데모크리투스와 에피큐로스의 원자론에 관한 것이고 

맑스가 논문을 쓰던 당시의 확립된 의견은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론을 후대의 에피큐로스가 

표절하면서, 표절하더라도 발전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더 나쁜 것이 되게 했다는 것이었으나 

맑스가 이 의견을 전복한다는 얘길 했다. 흔히 그렇게 여겨졌지만, 실은 에피큐로스의 원자론이 더 발전, 심화된 논의임을 보여준다고. (지금 검색을 해보니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다...) 


스물 한 살, 스물 두 살 즈음 씌어진 이 논문에서 

맑스 사상에서 핵심적이 될 아이디어들이, 모순, 소외 같은 아이디어들이 이미 등장하며 발전되고 있다 전하면서 

그 출연자,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경이감을 느끼는 듯했다. 


19세기 서양에서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을 테지만 

21, 22세에 박사 논문 씀. ㅋㅋㅋㅋ 하아. 나는 이게 가장 먼저 놀라웠다. 

21, 22세에 학부 입학함. ;;; 그러기도 하는 판에. 사실 그가 평생을 심화시킬 개념들이 이미 그의 박사 논문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이런 일도 아주 드문 일 아니겠지만, 뭔가 신비로운 일이긴 하다. 정신적(지적) 기질, 정신적 운명. 이런 것. 결국 자기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사상가라는 평가도 출연자들이 하고 있던데, (시대와 선택 사이에서) 결정되고 또한 초월되는 무엇. 하여튼 그런 것. 




*오늘은 일찌감치 7문장 써서 오늘치 쓰기를 충족. 

아도르노의 니체 해석(<도덕철학의 문제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바슐라르식 읽기 관점에서 비판하는 문단들을 몇 개 쓴 것인데, 새삼 바슐라르는 이런 비판을 (어쨌든 문학 상상력 저술들에서는) 아예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는 점 생각하게 된다. '이건 잘못 읽는 겁니다!' 이런 비판. 전혀 하지 않는다. 자기 식으로 읽고, 자기 식으로 기쁘게 행복하게 깊이있게 읽기. 이것만을 한다. 물론 가끔 아주 우회적으로 남들을 나무라기도 하는데 ("철학자들만이 1층에 살도록 처단되는 것일까!" 같은), '이건 틀린 거죠....' 이런 식은 아예 없음.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 ㅋㅋㅋㅋㅋ 없음. ;;;;; 가능성의 조건부터 만들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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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방송한 BBC In our time.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해하려면 1920년대 독일 상황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게 참 이상하지만, 깊은 절망과 유례없을 희망이 공존했던 몇 년이 있었다... 

는 얘길 한다. 1차 대전의 패배. 이것으로 인한 절망이 어둡고 무겁게 사람들을 내리눌렀는가하면 

19세기는 완전히 끝났다, 미래가 우리의 손에 있다..... 는 희망이 체감으로 존재했다. 


이런 얘길 하던 출연자가 

그 희망을 설명하면서 "그러니까 그건 Obama moment 같은 것이었죠" 이런 말을 함. 


08년 오바마 당선은 

미국의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도... 세계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그 정도였던 것인가. 

이전 시대의 종말이고, 어디로 갈지는 (내 손안에 있지만) 가보아야 알 곳으로의 이행이었나. 


우리에게, 노무현 moment는 있었나.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 


라다가 자러 가야. 맥주 많이 안 마셔도 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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