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의 흑역사 '덕'인 면도 없지 않을 것 같고) 

개인의 존중에서 양인들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튼 

그들에게 체화된 바가, 우리와 비교하면 아직도 넘사벽일 듯. 

이런 얘기하면 거의 반드시, 패배주의, 사대주의... 이런 비판. 

예상 및 감수해야 하지만, 내가 우리 중 1인인데 이런 얘기 못합니까? 로 넘어갈 수 있지 않나. 


show some respect. 

이 말이 한국에서 여전히 밈이 될 수 없는 일. 

억지로 비슷한 말을 한다면, 아주 다른 뜻이 될 거라는 일. 


으아아 워우워 맥주 마시고 싶어짐.  

이미 마시지 않은 것이 아님에도. 나갔다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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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2-2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올리신 인용문 중 이거 하나 유일하게 이해되네요. 다른 문장들은 너무 어려웠어요 ㅠㅠ
(그래도 매일 꼭꼭 씹어 읽어보고 있는 일인 ^^)

몰리 2017-02-22 10:10   좋아요 0 | URL
저 이미지처럼 가죽이나
아니면 금속에, show some respect 라 적혀 있고
필요하고 적절할 때 말없이 꺼내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show some respect.
period.

이렇게요. ;; ㅎㅎ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퇴장. ;;
 



아도르노의 말 중에서 이것도 참으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힘의 도발 없이 네가 약해질 수 있는 곳에만, 사랑이 있다." 


'약자'라는 말이 한편 거의 페티시처럼 ; 되는 사정도 이걸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약한 모습은 거의 반드시 (보호, 관용, 이해가 아니라) 힘의 사용, 힘의 유혹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렇다는 걸 감추기 위한 (그에 대한 가책, 혹은 죄의식에서), '약자'라는 말을 일종의 주문처럼 쓰기. 


이 진리도, 아도르노 말로 이걸 접했든 아니든 어렴풋이라도 느낀 바 있는 사람이면 

'선의'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당신보다 지위가 높으면 

당신을 함부로 대함이 내 권한의 일부야. : 이러는 사람 본 적 없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는 자신이 한편 부끄러워서 그러는지, 이상한 웃음을 웃으면서. 


음 어쨌든. 그렇다면 진짜 친밀성의 가능성의 조건은 뭘까. 

그 중 하나는, 정신의 삶.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공유하기. 그것을 존중하기. 

서구 지식인들이 썼던 그 수많은 편지들을 보면서, 우리가 편지 쓰지 않은 건 가장 중요하겐 

서로가 서로의 정신을 모르고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지......... 라 생각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여기선 아무도 누구도 진짜로는 존중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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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천만 근처 'sleep music' 매일 켜두고 자던 시절

있었는데 오늘은 이거 틀어놓고 잘 듯. 이거 의외로 틀어둘 만 하네요...)  




가정의 폭군은 외투를 입을 때 아내의 도움을 받는다. 

아내는 열의와 함께 이 사랑의 봉사를 수행하며, '이것 외에 내가 뭘 해줄 수 있겠어, 이 사람에게 이런 즐거움을 주어야지,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남자니까'라고 말하는 시선으로 그를 좇는다. 가부장제 결혼은 아내의 이같은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의) 배려를 통해 주인에게 복수를 행한다. 아내의 배려는, 남성적인 자기-연민과 부적합성을 향하는 반어적 한탄 속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발전했다. 남자가 우월하다고 치켜 세우는 기만의 이데올로기 아래에, 그보다 덜 허위인 것도 아닌 은밀한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그것은 남자를 열등한 쪽으로, 조종, 술책, 기만의 희생자로 보는 것이다.

 

결혼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여자들 중에, 남편의 사소한 약점들에 대해 속삭이면서 남편을 부인하지 않은 여자는 없다. 가짜 친밀성은 악의를 자극한다.



저건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111번 단장. 

안희정이 했다는 말이 ("선의로 해석한다") 어딜 가나 화제여서 뉴스룸 안봤음에도 

생각하게 된다. 아도르노의 저 단장도 기억하게 됨. "가짜 친밀성은 악의를 자극한다" 이 문장이 내게 정말, 엄청난 ... 인식의 충격 같은 거 안기던 때 있었다. 이 말로 정리되던 몇 년의 세월도 있었을 것이다. 영어로는 False nearness incites malice. 


자기 삶에서 그런 일은 전혀 몰랐다 하더라도 

("선의로 해석한다"만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삶이었다 해도. 그런데 그의 삶이 객관적으로 그런 삶 아니었지 않나)

남의 경우를 통해서, 아니면 저 (저런) 책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저 단장 주제, '가부장제 결혼'에 대해 생각한다면, 동의하지 않기가 어려운 말이기도 하고), 선의...... ㅋㅋㅋㅋㅋ 인터뷰, 대담 이런 데서 저런 형식으로는 아예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알게 되어야 마땅하지 않나. 뭐 그 '엘리트'라면. 그렇다면 말이다. 



*여러 모로 

<미니마 모랄리아> 이 책 대학생들의 필독서여야 한다고 생각한 적 있다. 

저 단장의 저 지점, 이것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여튼 '돌파' 이런 것 시도라도 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에

큰 차이 있지 않을까. 무려 인생이 구원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 '비늘'이 벗겨지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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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포스트의 책을 

구글 이미지 검색하니 이런 것도 찾아진다. 


저자에게 한 청취자가, 육체적 능력이 거의 완전히 파괴된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이 여전히 지적으로도 왕성한 건 어떻게 설명합니까? : 이런 질문을 함. 


신체적 민첩함 능숙함, 혹은 육체의 오감과 협력하지 않는 지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거의 전적으로 두뇌만으로 충분한 영역이 인간의 지적 활동에 있다. 수학, 물리학이 그렇다. 그리고 두뇌와

감각이 협력해야 한다는 내 얘기는 어떤 신비주의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attention. 

집중력. 가만히 집중하는 상태에서 관찰하고 가만히 생각하기. "mindfulness"에서 육체가 하는 역할, 나는 이것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입장은 대략 저런 것이었다. 

이것만으론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청취자들 있었을 듯. attention도, 두뇌만으로 충분하지 않냐는 반문이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을 듯. 위 이미지에서 하는 말이 이 "attention"에 대해 하는 말이기도 할 텐데, 정말 이것이 

어떻게 꼭 "육체의 지성"이냐고 묻는 이들 있을 듯. 


그런데 저 말이 하고 있는 말 그대로, "모름" 속에서 "불확실성" 속에서 버텨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이고 이게 왜 "지성"이고 이게 어떻게 육체와 연결되는지.... 이어지는 설명 없더라도 바로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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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팟캐스트에서 소개된 책은 이것. 

영국의 인지과학자라는 가이 클랙스턴의 책. 

육체가 수행하는 지성... 되찾기를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제목만으로 충분히 책 소개가 되는 책인듯. 


전화한 청취자 중 한 분이 "나 전쟁 때 다섯살이었어요"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던 말: 내 딸 친구가 소개한 정신과 의사에게 갔는데 오피스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이 혼미하고 눈물이 쏟아져서 그 날 의사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했다가 내 딸이 

혹시 거기서 어떤 냄새가 났느냐 물었는데 그 순간 기억했다. 2차 대전 당시 공습이 있으면 들어가던 지하실. 

오피스에 들어갔을 때 날 압도했던 게 그 당시 지하실의 냄새와 느낌이었다. 실제로 오피스가 지하에 있기도 했다. 


이런 말을 두서없이, 끊기는 문장들로 하다가 순간 오열하고 무너지면서 

"나는 전쟁 겪고 공습 당하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이 할머니 곧 수습하고, 아무튼 몸이 하는 기억이라는 게 그토록 오래 가고 생생한 것이라는 

취지로 말을 맺긴 했다. 그런데 저 말 하던 때, 말의 내용과 거의 별개로 '진실' 이런 것이 침입한 순간이었음. 


이 노인 청취자와 같은 취지로 캐나다의 젊은 남성 청취자가 

어렸을 때 강제로 아버지의 캐나다 오지 산행, 모험에 동참해야 했는데 그 경험이 

어딜 가든, 특히 숲 속에서 자신의 엄청난 육감을 길러주었다고 했다. 절대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어디로 가면 나갈 수 있을지 자기 몸이 안다고. 


정말? 이건 납득되지 않는 걸? 


사실 바슐라르의 문학 상상력 저술들 전부가 한편 육체의 지성... 을 탐구하는 내용이고 그것의 되찾기 요구하는 

저술들이다. '신비주의'처럼 보일만한 대목들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기도 하고, 바슐라르가 하는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자주 급진적인) 얘기들에 대해서, 근거를 대라면 그러게 근거는 어디 있을까...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기도 하다. 서양 철학사 전반을 안다면, 철학사를 검토하면서 바슐라르 작업의 의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누구 이론의 변형이고 누구 이론의 반박이며 누구 이론의 확장이다..... 식으로. 그러나 내가 그러려면 내게 다섯 번의 생이 주어져야 할 것 같고. 


하여튼 바슐라르 저술들에 대해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이런 책이 나왔고 이런 책이 대중적인 서평 팟캐스트에서 소개되는 걸 들으면서 

안도감 같은 것이 들었음. 이 책도 바로 구해보려고 하고, "근거를 대라..."고 누가 요청한다면 이 책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치 쓰기는 조금 초과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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