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서평 팟캐스트, 요즘 다시 꼬박꼬박 듣는다. 

최근 업로드에서 이 책 논의되었다. 나는 처음 듣는 저자. 그런데 지금까지 몇십년 동안 

미국 페미니즘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목소리였다고. 캐서린 맥키넌(이 책에서 영웅시된다는)은 

아는데 (그녀의 책도 읽었는데) 린다 허쉬만은 처음 들어봄. 


책은 극히 의미있는 작업을 하는, 소중한 책임엔 분명하다고 서평자가 평가하고 

자기가 말하는 유보적인 입장은 순수히 개인적인 것임을 알아 달라고 한다. 


그 유보적인 입장이란 

그녀의 너무 선명한 노선에 대한 반감. 

포르노그래피 규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 이끌었던 캐서린 맥키넌은 영웅시하면서 

르윈스키 스캔들 이후 빌 클린턴에게 우호적이었다는 (클린턴의 탄핵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천민 취급함. : 이런 면이 마땅치 않다고 한다. 





만약 린다 허쉬만이 

여자 아도르노였다면. 

노선이 선명하더라도 언제나 가동 중인 변증법 때문에 

노선이 선명해 보이지 않았겠지. 


아 당신이 무슨 심정인지 압니다. 


이러저러 여러 잡념이 들던 얘기였다. 

잡념과 함께 들던 하나 선명한 생각은, 청춘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중년 이후라면 


너와 내가 연결되는 건 

너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통해서라는 것. 

네가 나를 사랑해서,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게 아니고 

네가 사랑하는 그것과 내가 사랑하는 그것이 같은 것일 때. 


린다 허쉬만이 캐서린 맥키넌을 사랑한다면 

린다 허쉬만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캐서린 맥키넌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린다 허쉬만과 연결될 수 있을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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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의 도덕철학사 강의 책은 찾았는데 

그러고 나서 이 책이 찾아지지 않고 있다. 이 책도 아마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책. "철학의 한계". 윤리학(도덕철학)과 철학의 한계. 

좁아터진 집에 책들이 너무 많아서 찾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집에서 작은 방 하나 공간만 더 확보되어도

못 찾는 책이 없을 것이다. 


책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정리할 수 있는 집. 

식기세쳑기. 


저게 꿈이다. (...........) 

저걸 이루질 못하다니.  

저거 언제 가능함. 

왜 저게 그렇게 어려움. 




바슐라르에게, 그 특유의 참으로 이상한 도덕철학이 없었다면 

이 주제에 관심 없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연금술의 도덕, 연금술사들의 도덕 주제로 얘기하다가, 특히 그들의 "거르기"에 대하여  

"(연금술에서 쓰는) 거름망을 쓰려면, 도덕적 이상이 필수인 것이다" 이런 문장 쓴다. 


One who handles the skimmer must indeed have a moral ideal. 


저런 문장에 영혼이 ㄷㄷㄷ 흔들림 하여튼 전율함. 

그 후 저 문장을 기억하게 하는 곳곳에 "국자의 이상"이라 적어두기 시작함. 


사실 바슐라르의 이런 면모에 대해서는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아직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땜누에 

하다못해 그래서 내가 씀. (....) 정말 그렇기도 하다. 


바슐라르 책들에 저런 문장들이 무수히 등장하는데 (공감하는 이에겐 세계의 비의가 담긴.... 인생의 유혹이 담긴) 

그 다수가 "도덕"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도덕 철학의 곤경을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 든다. (....) 아 어려운 주제라서, 횡설수설이 아니게 말하려면 한 이틀은 생각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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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6-2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게 꿈이다- 부터 왜 저게 그렇게 어려움, 까지
네 줄에 여섯 번 웃었어요.....

몰리 2019-06-25 05:16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 절대적 박탈감! 영혼을 잠식하는...........
 




이거 정말 그렇다. 

이런 짤 찾아질 거 같지 않았는데 찾고 보니 

나 뿐 아니라 다들 그렇구나.... 공감했다. 술 없이 하기 고달프고 

특히 어떤 대목에서는 특히 더 술의 힘이라도 빌어야 할 수 있을 거 같아지는 게 채점. 


얼마 전부터는 

시간대에 따라 굉장히 큰 점수차가 난다. 아마 9시 수업은 다수에게 기피 시간. 

10시 반은 다수에게 선호 시간. 무엇보다 그래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9시 수업에서는 상대 평가 규칙에 따라 성적을 내기에 아무 어려움 없는데 10시 반은 규정 퍼센타일 바깥에 있는 학생이 소수다. 거의 전부가 그 안에 들고 거의 전부가 A 받아도 되는 정도다. (....) 이런 차이가 난다. 


이게 의외로 스트레스 안긴다. 

술을 마시면서 잊어야 할 정도 고통 된다. 

지금 이 포스팅 쓰는 것도, 고통을 잊기 위해서. 

평점을 숫자로 나오는 성적 순위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긴 하고 (사실 그게 다여야 마땅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겠지만, 그런데 내 기준에서 모두 감안하여 다 같은 좋은 성적 받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학생이 너무 많을 때. 




그러나 돈이 없어 오늘은 술 마시지 못함. 

술 마실 수 있게 월급 와야 한다. 내일 하루 더 기다리면 모레 마실 수 있다. 

A와 B를 가르는 고통은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음. 상대평가, 프랑스에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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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입수한 책. 

대학원 시절에 대출해서 읽고 중요한 도움도 받았던 거 같은데 

이제서야 가까이 두게 되었다. 미셸 세르는 최근 타계했다 (6월 초?). 

"바슐라르 친구들의 연합" 이런 이름 프랑스 학회에 이메일 서비스 신청해서 

뉴스레터 받아보는데 세르의 타계 후 온 소식에서: "그는 바슐라르의 지도 학생이었지만 

과학을 과하게 이상화하는 바슐라르의 경향에 혐오감을 느끼며 바슐라르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철학에 스며든 바슐라르의 영향을 감지한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아무튼 웃겼던 대목. 이상주의 극혐. 취미 없음. 굿바이. 


위의 책은 브루노 라투어와 나눈 대담을 기록한 책이어서 

세르의 저술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는 바슐라르 철학을 직접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개혁과 일곱 개의 죄" 이런 제목. 라투어와 대담에서도, "이 정도면 바슐라르 입장도 들어보아야" 순간들이 있다. 

거의 인신공격으로 향하는. 부당한 사감이 개입하는. 더 강력한 비판을 더 세련되고 공정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어렸을 땐 아니었던 거 같지만 지금은 

바슐라르의 과한 이상주의를 극혐하는 세르 유형의 격한 반응들이,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나는 긴장이 좋다. 


도덕철학은 인류학과도 뗄 수 없는데 

인간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냐에 따라 도덕철학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런 얘기 오늘 아침 들으면서 

이 경우엔 그러니까, 인간 본성의 비관론자냐 (마키아벨리, 홉스) 아니면 낙관론자냐 (여긴 누가 속함?) 일단 이 

두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을 테지만 


실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끝없이 충돌하는 전장 아닌가, 각 개인의 삶들이? 도덕철학이라는 학제로 갈 것도 없이? 

그 전쟁을 계속 유지함이 (어느 쪽에든 완전히 지지 않음이), 그게 인생의 의미 아닌가? 


같은 잡념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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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thought 42 quote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 인용은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는 "언어 게임"에 관한 것이고 


언어는 전체를 관장하는 하나의 규칙 체계를 갖는 단일체가 아니다. 

언어는 다수의 언어 게임들로 구성된다. 언어 게임은, 우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활동 안에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다. 


저런 내용 해설이 있다. 






"언어를 말한다는 건 삶의 한 형식에 속한다."

그냥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한 이 정도 말만 놓고도 

위의 해설이 맞기는 한데 극히 협소하게만 맞는, 사실 그래서 맞다고 할 수 없는 

내용인 거 아니냐는 생각 든다. 비트겐슈타인이 위대한 철학자인 게 맞다면, "삶의 한 형식" 같은 말을 

한편 정확하지만 한편 구멍이 숭숭 나게 쓰지 않았을까. 그게 퇴로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불어가 하는 언어 게임이 있고 영어가 하는 언어 게임이 있다는 게 아니다. 똑같은 언어 게임들이 

각기 다른 자연 언어 안에서 수행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요약하면 그걸로 끝나는, 그게 다인 얘기를 (비트겐슈타인이 위대한 철학자인 게 맞다면) 했을 거 같지 않다. 





뭐 했던 걸 수도. 

그런데 했을 거 같지 않은 것이, 이제 이 시점에선 완전히 샅샅이 연구되고 다 털린 거 같은 책 <계몽의 변증법>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대목 하나가, "언어의 재신비화" 이런 걸 요청하는 대목이고 


그러니까 

마이너의 마이너의 마이너 취향에 속할 무엇이라면 

그게 실은 한 사상가의 전모를 단번에 보게 할 마스터키 같은 것이라 해도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마이너의 마이너의 마이너 취향일 누군가는 (혹은 그 모두가) 인문학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문학이 재미있어지려면 

인문학은 만인의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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