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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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미에 대하여


  요즘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일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면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하는 행동들이 가치가 있다.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배척당한다. 수집품을 모으는 사람들이나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잉여인간으로 취급 받는 세상. 기업의 입사 지원서에는 취미, 특기란이 있는데 이로써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하는 취미, 또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해서 특기가 되는 일도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취미의 사전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하지만 면접에서 좋게 말하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위해서 취미는 ‘즐기지는 못해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 혹은 전문적으로 보이는 일’이라고 재정의를 내려도 좋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그는 무의미를 찬양하고(제목이 무의미의 축제이듯이), 책에서는 무의미한 에피소드들의 연속이었다. 책은 배꼽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배꼽티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배꼽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무의미한 고민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짧은 내용의 장편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무의미와 의미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 의미 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프로게이머의 게임과 청소년의 게임은 다른 것인가. 철학가가 자유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일반인이 지나가는 배꼽티를 보며 고민에 잠기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인가. 나는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의미 있는 일은 의미가 없으며 모든 의미 없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 둘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둘 모두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노래를 수없이 듣는 것, 주말마다 등산을 하는 것 모두 무의미하면서 의미 있는 일이다. ‘예술수업’이란 책을 쓰신 오종우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학기 말미에 이 책의 저자처럼 무의미한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우리 모두 하나씩 의미 없어 보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내 것도 아닌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필요하다고 역설하셨다. 의미만을 찾는 사람들은 메말라 갈 뿐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을 통해 우리는 충전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무의미를 찬양하시며 예시로 보여준 영화가 타르콥스키의 ‘희생’이란 영화인데, 영화의 시작과 끝이 주인공의 아들이 죽은 나무에게 물을 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무의미적인 행위를 통한 의미의 발견. 지금 이 책을 읽고 교수님의 그 강의가 다시 생각나는 것을 보니 저자와 교수님은 같은 것을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리라. 나 역시 그 수업 내용을 듣고 무의미해 보이는 취미를 가지고자 했지만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취미도 가지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오래 전 어떤 모임에서 나를 소개할 때 나의 미래 꿈은 호숫가에서 바늘 없이 낚시를 해서 걸리면 놓아주고 석양이나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꿈이 상당히 노인네 같다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 얼마나 무의미하고도 무의미한 일인가 라는 느낌이 든다. 그 무의미적인 꿈을 계속 간직해야겠다. 무의미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란 개인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무의미를 찬양하자.



- ‘자신의 죽음을 구하기 위해’에 대하여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특히 이 구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단순히 활자를 읽는 것뿐인데 어떻게 그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은 구절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죽음을 구하기 위해’라는 문장이다. 이 부분은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다리에서 강으로 몸을 날렸는데, 지나가던 행인 발견하고 구하러 오는 과정에 그녀가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면을 설명한 글이다. 나도 솔직히 왜 내가 이 부분에서 그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그 문장이 완벽한 모순이자 완전한 문장 같았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구한다’라는 단어는 정확히 극과 극에 있는 단어인데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문장. 나의 죽음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건데, 그런 구한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인가, 항상 무언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새로운 접근. 이런 다양한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그 문장을 완전하게 만들어줬다. 자신의 죽음을 구함과 동시 자신의 목숨은 끝나는 이 아리송한 문장에 나는 그저 감탄했다. 이런 문장을 쓸 줄 알아야 책을 쓸 수 있구나 라고 혼자만의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지 않을까 싶다.



-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하여 


     세상은 지금 한심하게 굴러가고 있다. 가깝게는 취업 문제부터 멀리는 국제 경제 문제나 정치 문제까지, 기술의 발전으로 더 살기 편해지는 것이 맞기는 한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 한심한 세상에서 개인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은 점점 좁아진다. 대중 권력의 시대다.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권력이 무너지고 있다고 빙산의 일각만 부숴져 내린 것일 뿐, 해저에 있는 빙산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 저자는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라고. 사회의 지식인들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외친다. 젊은이들이여 투표를 하라. 대자보를 붙여라. 너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결코 바뀔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정반대의 말은 묘한 끌림이 있다.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장난으로 대하자. 연회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해서 자신은 전혀 한국말을 못하는 듯이 장난을 치자. 뱅크시처럼 재미있는 벽화를 그리자. 한심한 세상을 만든 것도 그들인데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한심해질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뭐 세상을 평생 진지하게 보지 않으면 문제가 많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진지하지 않게 무의미하게 대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겠다. 인생은 재미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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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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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에 대한 단상

  어느 누구도 행복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게 일을 하냐고, 저축하냐고 묻는 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위해서 살고 일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행복의 의미가 묻는 다면 명확하게 대답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본주의의 사회는 돈이 행복의 척도라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있고, 나의 자유가 늘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을 많이 때까지는 행복을 포기해도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그러면 결국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같은데 막상 한번 깊게 생각하면 그런 같지는 않다. 세계인의 행복도를 비교한 연구 결과에서 스리랑카나 부탄 ,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일컬어지는 나라들이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하지만 행복도를 비교한 기준도 역시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 누가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역시 행복을 단순히 명예, 돈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읽었다. 책은 제목에서 유추할 있듯이,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서술해 놓은 책이다. 우리는 흔히 수용소라고 하면 고통과 절망만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괴로워하고 희망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주인공 이반은 수용소 내에서 생활한다. 벽돌공의 능력을 살려서 일도 잘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서 좋게 밥도 얻어 먹는 어떻게 보면 쾌활한 삶을 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놀라운 점은 책의 중간중간 주인공이 행복하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좋게 난로 옆에 자리를 잡아 발에 온기를 있을 그는 행복을 느꼈고, 담배를 오래도록 피우다가 몰래 하나 피웠을 , 정신 없이 일을 하다가 결국 일을 완벽하게 끝냈을 때에도 그는 행복하였다고 말하였다. 책의 말미, 하루를 정리하면서도 데니소비치는 오늘은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있는 그런 날이었다.’라고 까지 하였다. 자유도 잃고, 음식도 없고, 추워 죽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말들을 통해서 어쩌면 행복이라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원래 행복이라고 하면 행복한 감정이 지속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인 알았는데, 오늘 점심에 정말 기가 막힌 음식을 먹었을 때에나 좋게 수업에 늦지 않았을 때에 잠깐이나마 느끼는 감정들이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들은 이런 행동들을 통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통해 행복은 상대적으로 말할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돈이 없는 내가 느꼈던 순간의 행복을 돈이 많은 사람이 똑같이 해도 느낄 없듯이, 행복은 서로 비교 있는 상대적인 감정이 아닌 것이다. 결국 행복이란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고, 각각이 느끼는 행복도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 행복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여전히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성공하고 돈을 벌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의 의미를 물어보고 싶다.  그들이 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 자기가 생각했었던 행복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놓은 행복인지에 대하여.

-          하루에 대한 단상

책의 내용은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여 잠들 때까지의 하루만을 다루고 있다. , 아니 년의 기간을 설정하는 여러 많은 책들과는 다르게 24시간도 되는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는 내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현재만을 생각하며 어떻게 일을 할까. 어떻게 음식을 받아낼까를 걱정한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를 보지 못한 자는 결국 뒤쳐지고 쓰러질 것이라고 하며. 하지만 미래를 너무나 강조한 탓에 우리는 현재를 너무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미래에 혹시 모를 일을 위해 현재의 돈을 저금하고, 미래의 풍족한 생활을 위해 20대의 청춘을 희생하고 있다. 우리에게 오늘이란 미래라는 꼭대기층을 위한 하나의 계단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데니소비치는 오늘이 꼭대기 층이고 마지막 층이다. 하나를 먹을 때에도 먹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일을 때에도 결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루를 어느 누구보다 온전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장기간의 형량이 있는 수용소이긴 했지만 미래라는 것도 현재가 있어야 존재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닌지라고 생각해본다. 미래를 꿈꾸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          집에 대한 단상

 책의 중간에 영외 노동을 하던 수용자들은 수용소의 기적소리가 들리자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하였다. 참으로 인상 깊은 문구였다. 춥고 끔찍해 보이는 수용소를 집이라고 표현하다니.   집이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가족과 함께 사는 공간? 그렇다면 내가 나중에 결혼하고 아파트를 사면 어떤 것이 집이 되는 것이지? 내가 아파트를 샀으니까 아파트가 집인가?  대학교 근처의 자취방에 사는 학생들은 모두 그네들의 자취방을 집이라고 부를까? 자취방을 것도 아니고 월세로 사는 것인데도? 이런 끊임없는 물음과 책에서 나온 집이라는 표현을 같이 생각해보니 결국 마음의 안식처라고 있는 공간이 집이라고 있을 같다. 주인공에게 수용소는 이제 이상 고통의 공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항상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그는 그곳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이라면 수용소는 절대 애정을 가질 없는 공간이고 절대로 집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그곳에서 관계를 맺고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집이 단순히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텐트가 되었든, 상자가 되었든, 월세가 되었든, 궁전이 되었든, 결국 집이라는 것은 공간에 대한 나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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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선 을유세계문학전집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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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 희곡선 을유문화사

 강형철 감독, ‘써니 과속스캔들 만들어낸 감독이다.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하여 관심을 받았는데, 특별히 영화, 강형철 감독이 칭송을 받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일반인의 이야기를 영화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판타지나 액션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쉽고, 멜로와 같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대상으로 영화는 흥행하기 힘들다고 한다. 관객들은 피로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 화려한 세계를 보고 싶어하여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 영상이 화려한 영화, 화려한 액션이 들어간 영화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강형철 감독의 작품들은 영화와 현실을 절묘하게 비벼내어 사랑을 받았는데, 군데군데 나오는 반전과 같은 재미와 강약 조절이 관객의 사랑을 받는 데에 일조했다. 이러한 강형철 감독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여러 읽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안톤 체호프는 영화 이전의 연극에서 이미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각색한 희곡들로 크나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희곡선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특히, 러시아의 문화나 정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루한 가정사나 일상사를 다룬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상적인 책의 형태가 아니라 대본형태의 장막극이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역시 그러했다. ‘바냐 아저씨라는 장막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하나의 장소에서 몇몇 사람들이 가정불화에 대해 얘기하고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이름들이 익숙하지 않아 누가 누구와 무슨 관계인지 다시 찾아봐야 때도 있었고, 설명이 없는 대사뿐이라 내용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며 서서히 드러나는 이야기 구조와 생전 그의 직업이었던 의사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그의 생각이 드러나는 것을 이해할 있었고, 그의 희곡의 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있었다. 체호프는 일생에 인터뷰에서 어떻게 일상생활을 극에 활용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바로 앞에 있는 재떨이를 가지고 소설을 한편 있다고 답하였다. 그만큼 그는 주변의 사물, 사건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의미를 찾고 연결시키는 같다. ‘체호프는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라고 대문호 톨스토이가 말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을 꿰뚫어 같다.

   사실 나는 이전에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를 다른 작품들을 통해 만나본 적이 있다. 과거 교양 수업에서 러문학과이신 교수님께서 러시아문학에 대해 여러 종류의 책들을 추천해 주셨고 과제로도 내주셨는데, 안톤 체호프의 작품 역시 추천해 주셨다. 그러한 계기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같은 단편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과거의 기억과 지금 읽은 장편들을 비교해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호프의 장막극에 박수를 보내지만 여러 편의 단막극들 역시 깊이와 내용면에서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장막극이 각각의 인물을 세분화하여 깊이 있게 드러낸다고 보면, 단막극에서는 인물들과의 관계, 빠른 호흡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고 간결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반전과도 같은 재미요소는 일상의 이야기에 신선함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체호프의 여러 희곡들을 보면서 생각은 우리들의 역시 하나의 연극과도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연극과도 같은 삶은 신문에 나오는 화려한 기업인들의 이야기, 연예인들의 이야기이지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의 이야기는 별볼일 없는 일상사라고 생각해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에서 인생이 뒤바뀔 만한 재미는 찾아볼 없고, 그래서 하루 빨리 성공해서 신문에 나오고 유명해져 연극과도 같은 삶을 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체호프의 작품을 보며 나의 일상생활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나의 하루하루가 똑같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교를 하며 우연히 재미있는 장면, 이별한 친구를 위로해주었던 , 라면에 대신 커피를 부었던 사건 , 희로애락이 하루 안에 모두 들어있었고, 반전과도 같은 재미가 있었다. 어쩌면 체호프는 우리에게 화려한 삶의 겉면보다는 우리 주위의 소소한 재미를 알려주려고 그러한 희곡들을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연극배우처럼 살고 우리 앞에는 매일 다른 연극이 펼쳐진다. 연극이 희곡이 되느냐 비극이 되느냐는 주인공인 우리에게 달려있다.

대학로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편의 연극을 보았었는데, 편의 연극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났었다. 연애 위주의, 재미 위주의 다른 연극들과는 달리, 침울하고 조용한 연극이었는데, 주네의 하녀들이란 연극이었다. 교내 불문학과 학생들이 제작, 연기한 연극으로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자막에 의존하여 보게 되었었다. 귀족의 집에서 일하는 명의 하녀들이 이야기의 주축이 되어 장소는 집으로 한정되었고 등장인물도 3,4명에 불과 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등장인물들이 적고 상대적으로 정적인 연극임에도 상당히 몰입하며 보았는데,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구성이 요소였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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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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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카레닌에 대하여

  주인공, 토마스와 테레사가 체코로 돌아간 , 토마스는 테레사를 위해 개를 마리 데려온다. 토마스의 외도를 알고 있는 테레사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남편인 듯이 카레닌에게 애정을 쏟아 부었다. 개의 이름 역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그녀와 토마스를 연결해 , 안나 카레니나로부터 가져온 이름이었다. 4명의 주인공이 서로 다른 인간의 존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면 카레닌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존재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카레닌은 매일 아침 잠에서 행복을 느낀다. 잠에 때에는 어둠 속으로 자신이 사라지는 같은데 다음날 자신이 세상에 한번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환희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의 침대로 뛰어 올라 주인의 얼굴을 핥으며 자신의 행복을 공유하고자 한다. 하지만 주인은 개로 인해 마지 못해 일어난다. 우리는 개와 다르게 잠에서 깨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짜증을 내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따르면 우리는 매일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있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의 생각은 멈춘다. 어둠의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며 몸도 정신과 마찬가지로 멈춘다. 다음날, 아침이 와서 눈을 뜨고 나서야 생각을 시작하고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한다. 자각조차 못한다고 해야 맞는 얘기일 있다. 우리는 우리가 다음날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잠을 자면서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있을까. 물론 행복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능이 높다고 행복 또한 느끼는 것은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우리는 아둔하고 모른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 연애에 대하여

주인공인 4명의 연애 방식은 모두 다르다 .최대한 많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목표인 토마스, 토마스만을 바라보는 테레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인 사비나, 틀에 박힌 일상처럼 평범한 연애를 해온 프란츠까지. 누구의 연애가 옳다고 말할 없다. 모두의 삶이 있듯이 모두의 연애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유명한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만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다. 연애 또한 무거운 연애가 있을 있고, 가벼운 연애가 있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토마스나 사비나와 같은 연애방식을 폄하하고 지적한다. 연애란 언제나 무거워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한편으로는 동경,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일상적인 연애,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연애를 하다가 돌연 사비나에 대한 동경으로 자유로운 연애를 선택한 프란츠의 이야기에서 있듯이 우리는 어쩌면 모두 가벼운 연애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존재에 대하여

책의 처음을 여는 문장은 니체에 관한 글이다. 그의 재귀론에 대한 설명인데, 우리네 인생은 결국 돌고 돈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삶은 살게 된다는 말로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의 존재는 가볍다는 것이다. 수많은 같은 존재 하나이니 가벼울 뿐이고 참을 없이 가볍다는 것이 작가의 말인 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우리의 존재는 무겁다. 존재라는 것은 지금을 바탕으로 생길 있는 것이기에 지금 순간만을 생각한다면 더할 없이 무겁다고 표현해도 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존재라는 것은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고, 귀중하다. 나의 인생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라 하여도 나는 지난 나의 인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하여도 다음 생애에 영향을 끼칠지는 수가 없다. 없는 미래의 일로 인해 현재를 가볍게 본다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말이 아닐까 싶다. 떠오르는 하나의 질문은 우리의 존재가 무겁다면 과연 무엇을 위하여 무겁냐가 궁금하다. 존재가 자체로써 이미 귀중하다면 무겁다, 가볍다는 부수적인 설명일 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우리들은 각각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존재의 이유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존재하는가. 지금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생각이 과연 존재의 척도라면 생각하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존재를 창조해내는 것인가. 우리는 존재함으로써 존재를 영원히 의심하는 것이 아닐까.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존재의 목적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들고, 노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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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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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말이다. 외국에서 음주문제로 경찰에게 걸리자 말도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우리의 한글을 전파한 고위 공무원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국회의원이 대리기사에게 한번 말을 날리고 거기에 모자라 폭행까지 했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유행어라고까지 만하다. 유명 개그프로에서 쓰이지 않을 뿐이지 고위공무원이나 상류층의 자리에서는 종종 쓰이다가 이렇게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김두한. 책을 읽으며 실존인물 인물이 종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다. 종술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주먹깨나 쓰면서 자리를 잡은 김두한은 정치권에서 완장을 달아주자 몇몇의 의미 있는 활동을 남겼으나 도를 넘은 그의 행동은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단번에 이해할 있다. 물론 상황자체가 사카린을 밀수입한 상황이기에 지탄 받아 마땅한 상황이지만 그것의 표현 방식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완장을 찼다는 것은 그에 맞는 행동, 책임도 따르겠다는 의미인데, 오물을 투척하는 것은 시장 싸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지 대표성을 지닌 국회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통쾌해하고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걸 용인하는 우리들의 태도로 인해 지금의 폭력정치, 주먹정치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임종술의 몰락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더해지는 임종술의 횡포에 그의 몰락도 극적이었으면 통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종술은 해고를 당했음에도 다음 내정자를 반협박하여 모두 고사시켜버리고 완장을 끝까지 지키다가 부월이와의 사랑을 위해 완장을 버리고 도망가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도망가기 전에 과거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에게 꼼짝없이 걸리어 훈시의 말을 들어 그의 잘못을 고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부월이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완장과 완력으로 악랄하게 살았던 종술이를 사랑으로 약간은 낭만적으로 포장하여 보내 버린 것이 아닐까. 물론 마지막 그가 완장을 부월이에게 건내며 포기하는 장면은 그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으로 있는데, 더욱 극적인 추락이 시원하고 통쾌했을 같다. 힘으로 과시하는 사람에게는 훈계나 지적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익삼의 입장이었다면 장정 네다섯을 써서 반죽음이 되도록 혼쭐을 내주었을 것이다. 상당히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방법일수도 있지만(사실상 그러하다.) 몰상식하고 야만적이게 완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완력이 결코 독보적이지 않다는 보여주어야 깨달을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종술은 교장선생님의 집에서 훈시의 말을 오랜시간 듣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언제 지루한 훈시가 끝나고 부월이를 보러가냐는 걱정으로 가득 있었다.  완력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원시시대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갈때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대의 시대에서는 교화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처음에도 말했듯이, 한국에는 완장에 살고 완장에 죽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흡사 임종술이가 명도 넘게 있는 같다. 완력이 세지 않아 다행이지 완력까지 스스로 갖추었다면 일반인들은 완장을 몰라봤다는 이유만으로 원산폭격 해야 할지도 몰랐겠다.  이렇게 완장에 죽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세우기 문화부터 없애야 한다. 성적 세우기, 대학교 세우기, 업무 세우기 등등 모든 것을 줄을 세우고 제일 잘한 사람에게만 감투를 씌어 주는 사회는 완장의 힘이 가장 강력할 있는 사회이다. 만약 남이 완장을 차던 말던 내가 상관하지 않는다면 완장은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책에서도 저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어도 완장을 보면 괜히 피하고 무서워하였다. 그런 스스로의 완장에 대한 인식이 완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누가 알아봐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장이 아닌 단지 왼팔에 두른 두건의 역할 뿐일 것이다.  그런 개인의 인식은 사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를 우선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를 바꿀만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완장을 현인이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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