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자크 라깡 - 백의신서 31
마단 시럽 지음 / 백의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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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에 대한 개론서가 여러 권 나와 있지만, 그 중 많이 찾고 추천하는 책이 아니카 르메르의 개론서이다. 정신분석의로서의 라깡의 초기 문제를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은 전체의 일부분을 가시화함으로써 해저 심연 속에 가려진 전체를 비가시화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즉 대중적인 라깡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논의의 상당 부분을 베일에 가려둔 것이다.

라깡의 전반적인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적절한 책이 르메르의 책이다. 현재 번역된 책 중에서 그나마 가장 이해하기 쉽고 전면적으로 라깡을 다룬 책이 바로 사럽의 이 책이라고 생각된다. 라깡의 이론이 형성된 지적, 철학적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텍스트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라깡의 중심 저작인 <에끄리>의 대표 논문을 해설함으로써 원저작 이해의 실마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라깡이 페미니즘, 영화, 문학 연구와 어떻게 접맥되는지를 밝혀 놓고 있다.

물론 다른 개론서들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 책처럼 라깡 이론의 전반을 일관된 체계로, 이 정도로 명징한 언어로 풀어낸 책은 발견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국내 저자가 관여한 책들도 대체로 특정한 관심을 기반으로 편한 책들이라서 초심자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번역이 안 되어서 제대로 공부하기 어렵다는 게 흔한 불평이다. 원서를 찾아보면 될 게 아니냐 하는 반론도 나올 법하지만, 번역서가 있으면 그만큼 수월한 것도 사실이다. 번역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만 아니면 있는 게 좋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번역의 문제 때문에 약간은 괴로움을 느낀다.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국책사업으로 번역소를 만들어, 번역에 큰 역량을 집중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도 무언가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간 지식의 식민화는 계속 심화되어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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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이론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민승기.이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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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 원저작의 번역서로서는 아직까지 이 책이 유일하다. 번역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영어나 불어 실력이 있다고 라깡을 번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라깡의 지적 깊이와 폭을 아우르겠다는 열정 없이는 아무도 라깡 저작을 번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에끄리>, <여성적 성욕>(편저) 등 라깡의 저작 중 이해에 필요한 몇 편의 논문을 가려서 번역하였다. 라깡 저작 전체를 인간의 육체라고 한다면 아마 이 정도 분량은 엄지 손가락 정도나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미약하나마 이 정도의 번역은 최소한 라깡의 원저작을 접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가뭄 속의 몇 방울 빗줄기 정도는 되리라 생각한다.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역의 가능성인데, 내가 보기에 이 번역서의 작업자들의 경우 번역에 있어 그다지 큰 오류를 범한 바는 없다고 생각한다. 라깡을 신비화한다, 라깡 이해가 부족하다 등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무엇을 근거로 이야기하는지 선뜻 감이 오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이 정도의 번역이라도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번역서 이후 그럴 듯한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적어도 이 번역서의 작업자들의 수준이 적어도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해 준다고 생각한다.

라깡 하면 거울단계나 상상계, 상징계, 아버지의 이름, 팰러스나 욕망, 기표나 결여 같은 용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라깡의 문제 의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유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계속 상상계와 상징계, 거울 단계 같은 초기의 라깡 문제 의식만을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그 이후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라깡의 문제 의식을 창의적으로 계승한 지젝이 지적 유행화하면서 라깡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고조되고 있다. 지젝을 통해 본 라깡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지젝의 창의적 접근에만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협소화된 틀로만 접근해 온 우리의 지적 풍토에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작년에는 푸코, 올해는 라깡 하는 식으로 단기간 정복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라깡의 이론이나 학설은 수십년에 걸친 말과 글쓰기의 결과였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 수십 년이 걸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몇 년을 투자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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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위치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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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탈식민주의가 문제시되기 전인 90년대 중반 이 책의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특별한 인상도 없는 한 권의 원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탈식민주의의 중심에 놓인 문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될 만큼 바바의 책은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서를 읽어나가면서 논의 내용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되돌아보면 나의 무지와는 달리, 바바가 구사하는 표현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분량에 역주까지 붙여가며 번역의 수고를 다한 저자의 노고에는 두 손을 마주쳐 박수를 보냄이 당연하다. 그런데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 간혹 본문과 중복되는 내용이 역주에 포함되어 있다. 역주라면 풀어서 알기 쉽게 함이 목적이지, 저자의 말을 반복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불필요한 구석도 꽤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요건 또 다른 문제이겠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오류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번역이나 교정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지치게 마련이라 허점을 노출할 가능성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색인 역시 해당 단어가 언급된 전체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서 부족한 느낌이 있다.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인쇄된 한 권의 책에만 의존할 경우, 생각하지 못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4페이지 저자의 서문에는 조안 고프젝(joan gopjec)이라는 인명은 이와 같은 오류의 전형적 사례일 것이다. 원서에서는 C와 G를 구분할 때 가끔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이와 같은 착오에서 빚어지는 실수이다. 조안 콥젝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대충 알고 있다는 말씀. 이 외 이 책의 독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적이 출판사나 저자에게 전해졌을 것이라 믿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직접적인 식민지 경험 속에서 근대화를 추구해온 우리 입장에서 탈식민주의는 새삼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서구와 우리라는 이분법 속에서만 사유하고 저항을 생각해 온 우리에게 있어 탈식민주의는 우리의 지난 근대적 경험들을 우리라는 정체성을 분열과 혼성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게 만든다. 단순한 반식민주의가 아닌 탈식민주의는 본질적 정체성을 가정하지 않으면서 그 혼성화의 계기들이 만들어내는 제3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거기에서 문화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시사한다. 굳어진 이분법적 사유에 식상할대로 식상해진 우리에게 있어 이런 제안은 참신한 발상이다.

그러나 바바가 주장하는 기호의 공간, 언표작용과 분열의 공간이 우리의 경험을 반추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흥미로운 서사를 제공해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런 입지점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거대서사를 가볍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대사서와 미시서사가 결합된 관점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바바의 논의는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바바의 탈식민주의가 비서구를 가정하는 것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서구 지식을 세련되게 변형시킨 산물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 것은 당연하며, 전략적으로도 필요한 태도이다. 바바가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로 상찬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서술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공허할까. 바바의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바바의 이론은 198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신역사주의와 비슷한 입지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역사에서 배제된 소수자의 관점으로 역사를 읽어내겠다는 것과 특히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사로서 위치짓겠다는 것 등이 그 둘의 유사점이다. 그러고 보면 신역사주의나 탈식민주의는 서구적 산물, 그것도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중심부 학계에서 발생한 문화적 산물이다. 그 점을 인지한 상태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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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학과 도상해석학 사계절 Art Library 1
에케하르트 캐멀링 엮음, 노성두 외 옮김 / 사계절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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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학은 기독교 전통의 회화나 조형 예술 작품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도상학이 추구하는 의미가 작품의 탄생 근거를 밝혀주는 문헌학적 기록에 의존하기에, 이런 방법이 예술로서의 진정한 의미 해석에 이르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 속에서 시대사적, 정신사적 의미까지 포착하려는 것이 도상해석학의 탄생 배경이나 추구 방향이라고 할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 예술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등장한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은 일반인들이 교양적 가치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분야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도상(해석)학을 해석학이라는 일반적인 방법론의 측면에서 보면 생각보다 한층 폭넓은 시야를 마련해 줄 수 있을 듯하다. 인간이 무언가를 보면서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지니는 의미일진대, 우리는 하루에도 한번 정도는 특정한 물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한다. 처음 볼 때는 대충 어떠어떠한 모양이다로 시작해서, 그것이 주는 느낌까지 파악하고, 이후에는 이것이 특정한 주제를 표현한 것이라든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간혹 너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물에 대해서는 이해 불가능, 해석이나 판단 불가능이라는 결정을 내려버리고는 한다. 표현될 수는 있지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이 해석학적 과정이다. 그러나 일상화된 해석 활동이 예술에 대한 해석 활동과 차이를 가지고 있다면, 훌륭한 예술 작품은 그 속에 시대사적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예술 작품 속에서 그 작품이 내포한 시대의 중요한 의미까지 포착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그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은 미술사학도들에게는 필수 교양서이겠지만, 예술 전반에 관심을 가진 사람, 특히 해석학적 이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일독의 권할 만한 책이다. 도상해석학의 선구자 파노프스키의 이론을 여러 학자가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 체제를 갖추었는데,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관심을 가진 여러 학자들의 글을 모아놓은 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난점이라고 하겠다. 특히 번역이 깔끔해서 읽기가 편하다. 그러므로 책의 분량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분량이 적고 난삽한 번역보다는 분량이 많아도 깔끔한 번역이 훨씬 읽기 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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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지식 나남신서 88
콜린 고든 지음 / 나남출판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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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지금 우리가 사상적으로 언급하는 학자들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 확정적인 언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태도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그가 구사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가장 많은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는 인물이면서, 그가 제공하는 지식이나 이론의 차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언가 푸코의 언급을 인용하는 차원에서도 그다지 명료하지 못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무언가 푸코의 진의를 왜곡한 것같은 느낌을 가지게도 되고, 어떨 때는 그런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주장의 개요만을 따서 자기 논의의 문맥에 맞게 인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은 독자들의 지적 수준의 문제라기보다 그가 구사하는 발화 전략상의 특징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인 것같다. 프랑스 본국의 학자들까지 푸코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 쩔쩔매는 걸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 자신의 문제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런 현상을 사물을 바라보는 코드나 전략상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역시 궁극적으로 세계관이나 인식론상의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저작을 통해서 그것에 접근하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의 발화들은 일련의 조리 있는 개념 체계로 정리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며, 때로는 각각의 발화들이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탓에 푸코라는 사상가는 대체로 아주 대중적인 논점, 예를 들면 미시권력론을 주창한 이론가로서 범박하게 제한된 상태로 대중화되거나 전문적 지식의 영역에서만 논의되는 양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적 지식과 전문적 지식 사이에 가로놓인 이 늪을 건너는 일은 푸코식 사유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기존의 푸코에 대한 저작이 여러 권 출간되어 있다. 가장 권위 있는 연구서로 알려진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라는 번역서가 있기는 하지만, 번역상의 문제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데는 상당한 인내심을 요한다. 명저가 難箸로 돌변한 기막힌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글보다 말 속에 진리가 더 많이 담겨 있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문자보다 소리에 높은 권위와 진정성을 투영하는 이런 통념에 대해서 데리다는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학문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현장성, 그러니까 직접성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주의력과 환기력을 월등히 고양시키기 마련이다. 비록 그 현장성을 다시 문자로 옮긴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대담집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대담이나 강연 형식의 책은 대중적 지식과 전문적 지식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 <권력과 지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책은 푸코 사상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그 어떤 푸코 관련 서적보다 이 책을 더 권하고 싶은 것은 형식상의 이점과 함께 푸코 사상의 요체가 될 만한 이야기들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서 번역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의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인명이나 지명을 영어식으로 옮긴 잘못이 간간이 눈에 띠지만, 그것도 큰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문제를 가감하고 남을 정도로 번역이 깔끔하게 되어 있는 편이라, 국내 학자의 저서 이상으로 잘 읽힌다는 점은 순전히 번역자의 재능으로 돌려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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