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질문들
스티븐 히스 지음, 김소연 옮김 / 울력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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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은 즐거운 일이지만, 쇼트나 앵글같은 전문용어를 들먹이며 영화를 해부하는 일은 참 재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전문가의 일이지 평범한 관객이 할 일은 아니다. 영화가 볼거리의 일종으로서 기능해온 역사 속에서 이런 문제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요, 비단 영화만 아니라 소설이나 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출판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영화 읽기 식의 책은 좀 팔려도 히스의 이런 책들은 영화학도 외에는 관심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나 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저작이나 화제작들 중 해외 저작 상당수의 미번역 상태에 놓여 있다. 히스의 이 책이 읽힌다면 그것은 연구실이지, 지하철이나 버스깐이 아니다.

물론 나같은 사람은 번역이 안되면 원서로라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히스의 이 책처럼 누군가의 노력으로 번역되어 나오면 반갑기 그지없다. 번역된 글을 읽으면서 역자가 상당히 애로가 많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히스의 문체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역자가 번역한 지젝의 <비딱하게 보기>가 선사한 번역서 읽기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한글책 읽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번역서는 많지 않은 법.

꼭 한 번은 읽어보고 싶었던 히스의 이 책을 번역하신 역자와 맹목적 투기(?)의 용기를 낸 출판사에 감사할 뿐이다. 역자의 머릿속에도 있겠지만, 영화 관련 서적 중 아직도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은 줄 알고 있다. 로레티스나 멀비, 메츠의 책도 번역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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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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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방송의 해외 취재 과정에서 벌어진 담당 pd의 비리를 고발하고 자기 스스로 비판한 박홍규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번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하다. 법학 전공자이면서도 문학과 회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을 썼을 정도로 그는 심미적 소질의 학자이다. 또 그는 서구적 사대주의에 물든 한국의 풍토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비판 의식을 가진 한국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세상을 타계한 사이드이고 보면 사이드와 그의 주저를 번역한 박홍규 교수가 매스미디어 속에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같은 느낌을 준다.

1970년대 후반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이 책이 전세계의 지식계에 끼친 영향은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로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미국 중심의 세계화 편향에 대한 비판과 서구화 일변도의 문화 풍토에 대한 성찰의 도구로서 사이드, 촘스키같은 미국내 반제국주의적 지식인의 저서가 광범위하게 번역, 유통되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심화되어가는 서구와 아랍 사이의 대결 국면은 여중생 사건과 같은 국내적 상황과 맞물려 미국내 반제국주의적 담론은 한국내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논의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사이드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에서는 마치 <오리엔탈리즘>이 전공자들이나 봐야 할 책으로 취급되는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사이드의 인생 역정에 있어서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같은 책들이야말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고, 그의 논의가 발전해온 기나긴 여정과 그 결실을 보여주는 핵심 저서인데도 말이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같은 책들은 평범한 독서 패턴으로는 결코 소화하기 힘든 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역자의 해설과 함께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가진 <오리엔탈리즘>(증보판)의 경우, 300페이지 남짓의 포맷을 표준으로 하는 출판 관행과 이에 익숙한 독서 관행으로는 엄청난 부하를 주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익숙한 풍문이나 자기류의 개념 정의에 입각하여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관행이 있고, 그 역사와 발전 과정,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지적인 관용어처럼 남발하는 풍토가 지배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파’의 과정은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필수적인 과제이다.

사이드의 이 책은 그 엄청난 분량이 말해주듯이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나 지적 영합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 페이지마다 그가 제도화된 학문적 범주가 요구하는 지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고심하며 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결코 과격하고 과장된 지적 과시주의나 선정주의로 속인을 끌어들이려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파고드는 것속에서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해명하려는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특히 이 책은 1970년대 ‘중동 사태’라고 불려지는 일련의 혼란 속에서 구상되고 씌어졌다는 점에서 망명 지식인의 정신적 고투가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tv 스크린에 조명되는 투사형 지식인만이 모범적인 지식인의 정형처럼 이해되는 우리 풍토를 되돌아볼 때, 정작 우리 주변에는 사이드형의 지식인이 부족함을 느낀다. 물론 투사형 지식인의 역할을 폄하할 필요는 없으나, 우리의 심성 속에 내재한 폭력과 기만, 위선 등을 해부함으로써 깊은 반성과 모색을 추동하는 사이드형 지식인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의 근대 교육의 결핍된 지점일 것이다. 사이드보다 더 하면 더 했을 격동의 시절을 살아오면서 적당히 보신주의와 기회주의에 영합할 줄 아는 지식인 외에는 키워오지 못한 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긴 방대한 구상과 야심뿐만이 아니라, 순응과 타협, 영달의 길 앞에서 자신의 심연 속으로 돌연히 잠입하는 인간적매력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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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창해ABC북 1
마리 엘렌 당페라 외 지음, 신성림 옮김 / 창해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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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쿠로사와 아키라의 [꿈]이라는 영화에는 고흐가 등장한다. 프랑스의 어느 한적한 밀밭을 배경으로 태양에 노출된 자연 풍경을 담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한쪽 귀를 자른 상태였으니 아마도 그가 자살하기 얼마 전의 모습일 것이다. 고흐 역을 연기한 마틴 스콜세지의 모습이 고흐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서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고흐는 미술가들 중에서는 가장 세계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다.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떠나 전세계인의 가슴 한 켠에 간직된 예술가의 원형적 인물인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흐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그의 예술의 비밀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그림에 집착했던 열도에서 삶을 대하는 어떤 자세를 배우고자 하는 듯하다.

가난과 냉대 속에서 자기만의 절대를 꿈꾸었던 예술가로서의 고흐는 그의 사후에, 그러니까 생전의 그에게는 하등 조금의 삶의 용기도 심어주지 않는 칭찬과 존경을 남겼다. 자기가 죽은 후의 명성이나 영광이란 과연 무엇일까. 다만 비참하게 죽으면서도 불멸과 절대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그것으로도 예술가에게는 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흐에 관한 책들은 아동용 도서에서 성인용, 그리고 화보나 전기, 허구의 이야기 등 다양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림만으로, 혹은 허구만으로 고흐의 예술적 성취와 관련된 비밀에 다가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호사가의 취미나 아니면 극적인 감동을 기대하는 세인들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가장 풍부하게 고흐의 예술적 성취를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예술적 풍토와 결합되지 않은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조명은 특정 예술가의 성취를 제대로 조명할 수 없다. 바르비종화파나 인상파, 일본 판화와의 연관성, 그리고 고흐가 교류한 화가들과의 상관관계 등 이 책에는 고흐와 관련되어 언급되어야 할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예술가의 병은 창조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작업을 중단할 때, 그의 생명은 끝이 나는 것이다. 고흐의 정신적인 고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는 그가 죽기 전 그린 작품의 숫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예비군훈련을 떠나면서 챙겨 가지고 갔다. 그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까 하다가 고흐를 선택한 것이다. 무릇 삶이 따분하다고 느낄 때면, 항상 나는 화가와 그의 그림을 생각하게 된다. 결코 쉽게 범접하기 힘들지만,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나는 결론 삼아 독서의 결실로 챙기곤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프랑스, 그러니까 고흐가 거닐며 작품을 구상하던 그곳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남프랑스의 강렬한 태양을 맞으며 고흐를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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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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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들어 인문사회과학 쪽에서 가장 주목받는 몇 권의 책 중 하나가 이 책이다.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과 앤더슨의 이 책은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들은 한번쯤 꼭 거쳐야 하는 입문서가 되었다.

언어가 그 기원을 따지기 힘들만큼 자연적 사실로서 인식되듯이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우리에게는 그 역사적 기원을 따지기가 힘든 자명한 실재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분열된 왕조의 근대적 통합 단계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공동체 개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 놀라운 인식론적 전환을 이끌어내는 논점이다. 과거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온 단군 이래의 단일 언어, 단일 혈통설에 기반한 민족만을 상상해온 관점에서 보자면 앤더슨의 이와 같은 주장은 '폭언' 수준의 해체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황산벌]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을 우리는 하나의 민족 내부 간의 갈등이라고 기억하지만(배웠지만),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망각한 바탕 위에서 건축된 의식적인 기억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과연 그들을 형제간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신라 중심의 삼국통일을 왜 우리는 민족의 통합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이런 논리는 적어도 앤더슨의 관점에서는 근대적 산물로서의 민족 탄생을 위해 조작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누구도 단군 중심의 단일 민족으로서의 한민족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단일 민족이 배태한 부정적인 영향을 우리는 지금 주변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피부와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성실하게 노동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정당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강제출국 시점을 눈앞에 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살은 단일민족에 대한 상상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섞이는 것에 대한 불안, 맹목적인 순수성에 대한 집착.

이 책은 우리가 상상하는 민족 공동체를 해체적으로 접근하는 데 유용한 시사를 여럿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흔히 알려진 기본 논점보다는 페이지를 넘겨가며 문득 떠오르는 것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어떻게 상상하게 되었는가? 제주도는 언제부터 우리의 상상에 포함되었는가 하는 것들. 제주도 4.3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어떤 번역서도 그렇지만, 오역은 바로잡아야 한다. 몇 가지를 지적한다.

역자가 영어에 익숙한 탓인지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영어화하고 있다. 이렇게 바꿔야 할 것이다.
허난(->에르난), 버버(->베르베르) 허더(->헤르더) 찰스 페롤(->샤를 페로) 고유명은 고유명대로 번역하는 것이 번역의 기초 아닐까.

번역이 의심스러운 부분. 이 부분은 나중에 개정판 낼 때 확인해 주길 바라면서..

조지아(소련에 조지아란 데가 있던가요?)(->그루지아?)
데끼유꾸(Tekijuku->모르면 일본 전공자한테 물어서라도 주를 달아놓으셔야지...)
반-셈족주의(anti-semitism)(넓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요즘의 어법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므로, 반유대주의라고 해주는 게 정확할 것임)
1978년에 미슐레(이 사람 아직 살아 있나요?)
미디의 대학살(les massacres du midi-> 정오의 대학살, 조금만 찾아봐도 프랑스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함)
성 마태에 의한 복음서(->마태복음, 왜 이렇게 길까)
관찰한다(observe, 이 말에는 주장한다는 뜻도 있다. 중3 수준의 영어 실력이면 충분함.)

정확하지 못한 번역은 명저를 태작으로, 혹은 난해서로 둔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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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역사 - 누벨 끌리오 총서 02
사빈 멜쉬오르 보네 지음, 윤진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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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느 순간부터 거울이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모습을 반사해주는 매개체가 필요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거울이 발명되지 않았거나 이용 가능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맑은 샘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비쳐지는 반사상은 평면거울과는 달리 보는 위치에 따라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에서 보는 이는 자신과는 다른 괴물을 본 것처럼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거울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거울 속에 반사된 자신의 상을 정확하고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상을 보면서 만족과 불쾌를 느끼고, 자신에 대한 환영이나 환상을 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이나 동영상이 보편화된 요즘에는 자신의 반사상을 보는 일이 더 이상 두려운 일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거울은 외양을 확인하고 수정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아의 정체성을 시험하고 욕망과 환영을 개입시키는 정신분석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예술가나 철학자의 경우 거울은 우리가 보는 것의 이면에 보이는 것을 규율하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측면에서 거울은 신성이나 우주의 섭리를 보여주는 성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거울은 결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 수많은 예술 작품의 비밀에 다가가는 중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거울의 존재론이나 현상학에 다가가려 할 때, 서적이나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정치사나 제도사 위주의 역사 연구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미시사적, 문화사적 접근이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고는 하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인 듯하다.

거울을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으로 다룬 책을 찾다가 찾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프랑스 학자의 연구 결과이므로, 프랑스 중심의 역사 서술이 책의 초반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후반부의 서술은 거울과 관련해서 내가 기대한 점들을 잘 다뤄주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의 거울의 역사가 본질적인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거울과 관련된 지적 갈급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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