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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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혼자 보는 미술관』

『혼자 보는 미술관』









예술작품 체험은 단순한 시각 훈련이나 지식 과시가 아닌 예술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기분을 바꾸며, 관습에 도전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한다. 


안전한 선택으로 쉽고 예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초콜릿 상자 효과'라고 한다. 당장은 편하지만 더 좋은 작품을 감상할 때면 무용지물과 같을 것이다. 작품 감상은 둘이 추는 춤과 같다고 한다. 적당한 거리를 가지고서 보는 것. 가까이 가서 보거나 뒤로 더 물러나 보거나 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에 고전 작품에 대한 감상법을 알아보는게 이 책의 주요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고전미술을 독창적으로 감상하는 방법 - 타볼라 라사


존 로크의 인식론에서 막 태어난 인간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용어로 작품을 바라볼 땐 백지상태에서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이를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할 때의 방법을 기억해보도록 한다.



"TABULA RASA"


시간, 관계, 배경, 이해하기, 다시보기, 평가하기

Time, Association, Background, Understand, Look Again, Assess


리듬, 비유, 구도, 분위기

Rhythm, Allegory, Structure, Atmosphere



T.A.B.U.L.A


1. 시간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여기에 저자가 말하는 팁은 세 번 심호흡 하기이다.


가능한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면 좋겠지만, 때론 가차 없이 판단하며 재빠르게 보는 훈련도 필요하기에 지나치게 번잡하고 따분하다 느끼는 작품에는 서둘러 시선을 거둘 수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훈련을 통해 재빨리 작품 수준을 알아보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2. 관계

작품과 처음 관계를 맺을 때 삶 전체를 활용해보는 것. 

고전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물이나 형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현대 미술보다 더 쉽게 다가올 수도 있다.



3 배경

작품 제목, 작가, 제작 시기만 알아도 작품 감상 시작하기 충분, 일단 그림을 먼저 찬찬히 감상하고 난 다음에 설명을 읽어도 늦지 않다.



4. 이해하기

감상은 훑어보고, 샅샅이 살펴보고, 골똘히 바라보아야 이해가 되는 것이고, 처음 시작할 때는 자신의 직감을 따라가는 게 좋다고 한다.



5. 다시 보기

그림을 볼 때에도 놓친 게 있는지, 성급하게 생각하진 않았는지, 처음 추측한 게 옳은 건지 스스로 다시 물어봐야 한다. 겉만 보고 판단하기 쉬운데 다시 보기는 이를 바로 잡는 단계이다.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인 것. 계속해서 탐구해야 한다.



6. 평가하기

이제는 작품을 보고 내 마음에 둘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작품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으니 정답이 없다. 전 단계들은 대개 직감이 의존한 것들이 많았다. 평가에 어려움이 있다면 나중을 기약하는 것도 방법이다. 



R.A.S.A


1. 리듬

배치, 화음(조화), 음조(색조), 음의 높낮이 등의 특징은 그림을 감상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며, 그림에는 그만의 리듬이 있다. 여기서 리듬이란, 전체적인 흐름이나 조화를 의미한다. 몸을 움직이면서 보는 작품도 있고 자세를 바꾸면서 보아야 하는 작품도 있다. 

리듬은 그림의 음색, 흥얼거림, 전체적인 흐름과 같은 것.



2. 비유

그림 밑에 숨어 있는 상징, 의미, 징후를 읽어내는 것.

대단한 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해당 작품에 공감하면 된다.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이라면 알아서 관람하는 이에게 말을 걸어줄 것이다.


3. 구도

그림의 짜임새, 뼈대, 토대, 구성요소

기하학적인 선, 형태와 구획 혹은 지평선, 수평선, 소실점이 구도가 될 수도 있음. 화가의 구성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4. 분위기

그림에 감동한 후 그 영향이나 여운, 즉 분위기를 계속 느낄 때가 많다. 분위기는 작품을 바로 앞에서 실제로 보았을 때 가장 잘 알 수 있는 전체적인 느낌, 여운을 뜻한다. 책에 실린 사진, 고화질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는게 더 나을 수도 있지만, 고전 미술은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볼 때의 느낌을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 철학과 캔버스


견고함은 되레 추상적인 모호함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여백, 그림자 허공과 대조를 이루며 작품의 분위기에 빠져들어 일상적인 사물에서 다른 이의 모습을 그려보는 상상의 여지를 준다. 덧없음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바니타스에서 이름을 따온 '바니타스 정물화' 같은 경우에도 견고한 정물화를 통해 허무, 덧없음을 상징되게 표현한다. 클라스의 그림 <해골과 깃펜이 있는 정물> 을 보면 예술과 정신을 작품 중심으로 삼으면서 정물화가인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한 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각기 상징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견고한 지, 빛을 얼마나 받았는지 등 정도에 따라 달리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자가 그림을 볼 때, 성향과 기분에 따라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가 전혀 달리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쟁점이다.


고전미술은 논리로만 접근해서 온전한 감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보단 그림 뒤에 숨겨진 사상을 중요시하는,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지점을 20세기 작가들이 추구했던 현대적 발상이라 여겼지만,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림의 지적인 가능성을 시험한 미술 작품도 많다고 한다. 우화를 재현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작품 그 자체가 실존적인 생각과 철학적인 문제를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고전 미술의 최고의 작가들도 이같은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보이는 그대로, 사실주의


자고 일어난 후 정돈되지 않는 침대의 흐트러진 상태라든지, 노동하는 평범한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든지, 시골 풍경이나 전원생활을 묘사한 그림을 지극히 사적인 모습에서부터 시골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곤 한다. 다만 평범하지만 잔잔하게 빛나도록 묘사를 하기 고심했고, 빛의 효과를 주어 분위기를 표현했다. 소박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마치 잠시 시간이 멈춘 그 공간 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련되지 않지만 화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뒷모습을 포함하여 곳곳을 있는 그대로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그 작품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정직하게 묘사하다보면 정작 감추고 싶은 것들의 실태까지 드러나게 되지만, 후세를 잊지 않기 위해 이를 테면 전쟁 범죄의 폐해를 기록하기 위함으로 그려지기도 했던 것이다. 


더불어 흑인을 묘사하며 시대의 관습을 깬 작품도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흑인, 노예와 같은 인물들을 위축되어 있지 않고, 기품마저 느껴진다. 인종의 차이, 주인과 노예라는 간극을 무너뜨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꼼꼼하게 관찰하여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것보다 보편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거나, 개별적으로도 가질 수 있는 공감을 이끄는 표현이 더 중요하다. 위대한 작가란 그 시대의 지혜에서 정수를 뽑아내듯,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대상을 향한 진실을 도출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무대, 그리고 명연기


조명을 활용한 감상법을 위한 환상적이고 일상적인 장면이 과장되게 표현했던 존 마틴은 이런 그림을 통해 돈도 많이 벌게 되고 '팬터마임 화가'라는 조롱 섞인 별명이 붙여졌다. 이와 같인 속물적인 측면을 가진 19세기 화가 말고도 감상적이면서 과장된 표현을 잘하는 화가들이 있었는데,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도 이중 한 사람이다.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우며 다소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된 그림이 카라바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한다.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역시 카라바조를 뒤따르던 여성 화가로 구약성경의 유디트 이야기를 좋아했다. 하녀의 도움을 받아 남자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에 젠틸레스키는 자신의 얼굴을 넣어 그렸는데 이는 자신의 경험과 연관이 있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의 동료에게 당한 강간과 그의 유죄를 받아내었던 것처럼 이 그림은 적나라하지만 일종의 통쾌함 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림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하는 것처럼.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 출신 화가 후세페 데 리베라는 직접적인 살육 현장이 아닌 앞으로 닥칠 사건의 전말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려 이를 보고 있는 관람자에게 그림 속 인물의 행동을 멈추고 집중할 수 있도록 순간을 포착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세네갈로 향하던 배가 난파된 일에 대해 기록한 책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확한 묘사를 위해 남은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고 병원과 시체 안치소를 찾아가 해체되고 변색된 시신의 팔다리와 부패한 모습을 직접 가까이에서 스케치했다고 한다. 흥미가 아닌 직접적인 사실을 전하는 언론 보도처럼 다루었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한국 미술의 고전과 근현대를 잇는 화가 안중식의 <영광풍경도>를 보면 산맥은 수묵화처럼 전통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앞쪽에 배치된 집이나 길은 서양 미술의 원근법을 사용해 그림의 깊이를 만들어냈다. 사실적인 묘사보다 둘러볼 수 있는 무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세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훌륭한 화가는 극작가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엮고 각본을 만들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를 긴장시킨다. 142쪽


또한,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 <젊음의 샘>을 보면 딱히 그 시대만을 비판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현실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늙고 약한 여성들이 광물질이 풍부한 욕탕에 실려가고 있거나, 그러한 권유를 받는 모습. 그리고 다시 젊어져 매력적인 여성이 되었다는 표현이 그러하다. 


* 아름다움의 기준


아름다움은 케케묵은 개념과 같고, 고전 미술은 아름다움만으로 평가되는 일이 잦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형식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워졌고, 매번 조금 더 수수께끼처럼 변화했으며, 유혹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되었다. 145쪽


이에 저자는 드러나는 아름다움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미묘하고 더 수준 높은 형태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제각기 다르지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다고 한다.


다 빈치의 그림 속 여성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와 똑같이 그린 것뿐 아니라 앉아 있는 자세라든지, 품에 안고 있는 담비의 모습이라든지 모든 생물과 연결하여 자신의 법칙을 활용해 그렸다. 비투루리안 황금 분할이나 신의 비례 등이 있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 욕망의 대상처럼 표현하였고, 앵그르의 그림 역시 나체의 여성을 남성의 탐욕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것이다. 여성의 신체를 통해서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이처럼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나 시선을 표현할 수 있었던 여성 화가들의, 여성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때가 있었지만 정작 누드화 수업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금발, 하얀 피부와 날씬한 몸매의 여성을 묘사한 것 외에도 풍만하고 관능적인 여성을 그려낸 작품도 있으며, 본인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인 하녀의 건강한 모습을 묘사한 그림에서 또다른 외설적인 측면으로 보기도 했다니 하니 이게 과연 독특한 아름다움의 표현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은 관음적인 분위기와 호기심에 추측하게 만드는게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인가..


저자의 말처럼 아름다움이란 용어 자체를 여성에게로 국한시키며 단순히 욕망의 대상으로만 자리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성적 매력, 외형에서만 찾지 말아야 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아름다움에 대한 노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였던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이야기를 다룬 그림처럼 차분하고 고요하게, 인간적이면서 현실적인 모습을 그려냈다.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 공포와 두려움


전혀 일반적이지 않고, 기괴한 느낌마저 주는 작품들이 있다. 한스 홀바인의 <무덤 안의 그리스도>처럼 희망이란 찾을 수 없고, 소박한 관 안에 누워 있는 예수의 몸을,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의 모습의 묘사는 사실적이고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 외에도 현실 그자체를 묘사한 작품도 있다. 프란시시코 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라는 그림은 폭동 다음날 프랑스의 보복을 묘사한 것으로, 전통적인 선악구도의 사고방식을 깨뜨렸으며, 싸움이 일어난 현장에서는 어느 쪽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야의 그림이 속죄의 의미로 그려진 것일 수도 있다면, 앙투안 장 그로의 그림은 선동을 위한 수단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바로 나폴레옹 전쟁의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고야 이전에는 거의 없었지만 그는 공포라는 주제를 무척 잘 다룬 화가였다. 초상화, 여성, 축제, 스페인의 생활과 사회 묘사도 탁월했다고 한다. 특히 말년에 그린 잔혹한 장면의 '검은 그림' 연작은 책에 실린 작품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강렬하고 긴장과 위협감이 바로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타치아노의 작품 <아폴로와 마르시아스>는 잔인한 신화를 더 피비린내 나는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아수라장같은 현장 속 인물들의 역동적인 팔과 다리, 벗겨진 살가죽과 흘러내리는 피, 거꾸로 매달린 몸과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까지 혼란하고 잔인하며 맹렬한 기운이 담겨 있다. 이처럼 잔인한 장면이 담긴 작품들은 세대롤 거듭하며 더욱더 끔찍해졌다고 한다. 전염병, 굶주림, 전쟁, 성적 타락, 환경 파괴 등 공포는 매번 다른 얼굴로 존재했던 것이다. 



* 모순, 암시


풍자와 진실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 듯한 작품에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들 수 있다. 왕족을 멋지게 묘사하려 인물의 경직된 자세를 일부러 따라하기도 했다는데, 왕과 왕비는 마치 유령처럼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화가 본인은 되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니 모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빛과 어둠, 현실과 비현실, 자화상과 집단 초상이 뒤섞여 모호성을 띠고 있다. 자신의 소명과 풍자를 함께 담은 작품이라니 대단한 능력자 같기도 하다. 


반면 정치적인 탄압이 강행됐던 시대에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의미를 숨긴 그림들도 있었다고 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지팡이 하나로 산꼭대리를 오른 신사의 뒷모습을 마음 속으로는 그려낼 수 있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역설적으로 희망적이다. 수많은 장애물과 불안 속에서도 나약한 존재로 지칭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룰 기적에 대한 바람과도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바닷가>는 낭만성도 사실성도 없는, 풍경을 기록하지도 분위기를 보여주지도 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지상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들었다. 미켈란젤로가 사망하기 전까지 10년 전까지 조각한 작품인 <론다니니으 피에타>는 끊임없이 조각된 모양새로 하나로 연결되지 않으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사실 추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창조해내려 한 게 아닐까 하신 암시만 남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농담과 풍자


고전 미술 작가들도 늘 차분하고 진지하게만 그림을 그리진 않았다. 때론 쾌할한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화도 있으며, 남녀관계에 대한 낭만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취향에 맞춰 그려진 그림도 있다. 때론 힘 없고 불편한 웃음 뒤로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감추기도 하는 것처럼.


호가스는 상류 사회와 하류 사회 모두의 허영심과 사회악 등을 조롱하는 풍자 화가였다. 최고의 정물 화가였던 샤르댕 역시 내장을 반쯤 꺼낸 가오리를 갈고리에 걸어 탁자 위에 매달은 그림을 그렸다. 과장난 역사화나 종교화가 아니라 가볍다 비난받던 정물화를 통해 그의 예술가적 야심을 드러낸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고전미술에 원숭이 그림이라는 장르가 있다면 플랑드르 화가인 다비드 트니어스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림 속 원숭이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조롱하며 스스로의 자만심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고대 의식인 바쿠스 축제를 그린 작품을 비롯하여 기괴하고 외설적인 장면을 그림을 그렸던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중세 시대에 실제로 행해졌던 엉터리 수술에 관해 그림으로 기록하였다. 한 프레임에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새, 동물들이 신나게 뛰노는 모습은 유머와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서로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복잡한 상징들이 내포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 액자 너머로


미술사에도 정통적인 길을 벗어난 작가가 많다고 한다. 어떤 작가는 시대를 앞서기도 하고 과거로 거슬러가기도 하며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다시금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예술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거나 다음으로 이어질 세대를 위해 새로이 길을 다져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열된 보쉬, 벨라스케스, 고야,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 등을 비롯하여 시인이자 선각자였던 윌리엄 블레이크, 엘 그레코, 젠틸레 벨리니 등 세잔과 모네까지 그 시대의 유행하던 그림 양식이라든지 주제 등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간 선구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 지라도 현대 미술의 추상적이고 해체된 기법이 등장하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에. 다른 결을 가진 고전 미술 작가들의 작품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본다. 처음의 백지상태로. 겉으로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벗어났기에 어떤 방식으로 봐야 할지 더 난해해졌고 모호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상태로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서 완성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고전미술을 감상하기 앞서 대단한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므로 일단 최대한 편견과 일방적인 견해와 오해를 배제하기 위한 백지상태에서 시대별로 작법별로 저자의 안내에 따라 작품을 감상해보았다. 책에 실린 작품만으로는 감상의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다. 책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인쇄된 책에서 그림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의 말대로 현대 미술은 몰라도 고전 미술 작품은 작품이 있는 그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게 가장 큰 중요한 것 같다. 여건상 여의치 않기 때문에 저자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바라보고 읽어나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고전 미술에 대한 다소 고루한 오해들을 떨쳐낼 수 있었기에 의미 있는 독서였다. 미술에 대한 무지는 작품 감상에 대한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미술사에 대해 어느 정도 꿰고 있어야 하고 잘 감상해야 한다는 강박에 다가서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걸 알지 않아도 작품을 잘 감상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사는 동안 한 번쯤은 고전 미술 작품을 현장에서 감상해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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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후지사키 사오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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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쌍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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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4인조 밴드 SEKAI NO OWAR의 멤버로 피아노 연주와 라이브 연출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같은 밴드 멤버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는데서 작품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데뷔 소설인 이 작품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밴드의 결성 과정을 비롯한 불안하기만 했던 영혼의 소년, 소녀의 성장과 관계성을 그리고 있다. 평소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한 그였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완전 동떨어진 것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것 같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에 같이 괴로워하고 울면서 힘들게 5년에 걸쳐 써 왔다고 하니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화자는 니시야마 나쓰코,  열네 살 소녀이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한 학년 선배 남학생 쓰키시마에게 충동적으로 이끌리듯 말을 건네던 이 소녀는 앞으로 닥칠 수많은 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관계성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가 어떻게 휘둘리게 되는지, 얼마나 비틀거리면서 울고 웃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시작된다.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고 낯설었던 이 소녀는 피아노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그에게 무기력하고 쓸쓸해보이는 쓰키시마가 자신을 '쌍둥이'라고 명명한데서 상처받고 아파하며, 어떤 자리에 서 있을지 몰라 헤매이게 된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블랙홀 속에 빨려들어간 소행성처럼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간다. 


떨어져나가지 않기 위해 간절하게 매달리듯 견뎌내었다가, 변해가는 쓰키시마의 모습에 두려워하며 밀어내버리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주면서도 상처를 주는, 뭐라 정의내릴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상한 관계성이 1부와 2부를 가득 메운다. 그리고 마침내 스무 살 성인이 되기까지 힘겹게 버텨왔던 시간들을 지나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밴드를 결성하기까지, 나아가 밴드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되찾아가게 되었는지를 그려낸다.


 

대체로 충동적이며 불안정했고,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그 시절을 유독 힘겹게 자각했던 쓰키시마라는 인물이 바깥에서 들어왔던 말처럼 사치스러운 어리광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시간만큼, 분량만큼 자신이 이루고자 했기에 열심히 피아노 연습에 매진하는 나쓰코를 책망하는 쓰키시마. 정작 그 곁에서 자신이 어떠한 안도나 평온을 얻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아픈 생채기만 내기 바쁘다. 


큰 열병을 앓는 듯 이기적인 쓰키시마의 심리가 잘 와닿지가 않았다. 힘겹게 그의 유학길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나쓰코에게 얼마 되지 않아 쓰키시마는 돌아가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온다. 발작을 하고 정신을 잃는다. 속내를 드러내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쓰키시마에게 돌아오지 말라며 밀어내는 나쓰코의 단호한 모습은,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듯한 구간이었다. 세상사 풍파를 감당하기엔 너무 여리고 약한 영혼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한 위악을 일삼았지만 뜻대로 잘 되진 않았다. 결국은 자신의 병명을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소년에게 그닥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나쓰코가 왜 그리 휘둘려지기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쓰코는 자신만의 중심이 있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게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어서라니.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 세상에 회의적이었던 소년의 표현방식이었을지라도.  그런 폭언은 되레 반발감만 들게 했다. 나쓰코의 시선으로만 모든 상황과 인물 묘사가 집중되기에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쓰키시마의 내면의 면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글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히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그 시절엔 무언가 명명할 수 없는 기분과 충동에 휘말리곤 한다. 알 수 없으니 불안하고 무턱대고 부딪히기엔 두려운, 스스로도 잘 제어가 되지 않는 그런 상태. 그 부분의 묘사는 한없이 비틀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소설 구석구석 아주 잘 표현된 것 같다. 그러니 읽고 나서도 개운치 않고 뭔가 찝찝하며 어지럽기만 하다.


가독성은 좋지만 부분부분 일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나쓰코라는 인물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담은 일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겐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당사자에겐 실존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 부분이라면 더더욱이. 내면의 담금질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될수록 어쩌면 작가의 모습이 투영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고, 객관화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이를 군데군데 많이 덜어내고 또 다시 다듬고 했을 것 같다. 작가가 만든 세계 속 그 인물과 함께 울고 힘겨워했다니 거리 유지가 퍽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유의 사소설적 특징을 배제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얻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음악을 하는 작가의 본업과 더불어 듣고 읽으며 함께 치유해나갔던 게 아닐까. 그리하여 지금 자신이  왜 그토록 힘겨운건지 정의내릴 수 없었던 시기의 아이들이 그 안에서 흔들린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닐까.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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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타임워프 -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기억하는 방법
김신현경.김주희.박차민정 지음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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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트스 타임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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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타임워프』 는 버닝썬, 강남역 살인 사건, 낙태죄, 유영철, 88올림픽, 박근혜, KTX 등등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현재 뜨거운 화두로 충격과 경악스러운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들까지, 기억의 '병치'를 통해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들은 성 산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학을 전공하며 가르치고 있는 교수와 연구자이다. 다수의 연구와 논문, 강의을 통해 여성학 문제를 다뤄왔던 사람들이다. 생각보다는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어서 여성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된 사람에게도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 같다. 일단 큰 틀에서 다루고 있는 사례(사건들)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부분 알만한 주요 사건들을 다뤘기 때문이다. 


작금의 여혐 전쟁과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목소리가 하나 둘씩 터져 나오는게 한편으로는 조금 생경하고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변화는 어려운 것이며, 아주 멀고 희박한 지점에 있을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점차 모여 외치는 목소리가 반갑기만 하다. 물론 이와중엔 본질을 오염시키는 종자들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와 편견이 더해지고 폄훼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지만 신념과 소신으로 무게 중심을 잘 가지고 가는 이들이 있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저자들이 다루는 주제에 관해서도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젠더, 군대내 동성애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뤄왔는지에 대한 지점 역시 흥미로웠다. 이는 사실 크게 의식하지 않고 관심두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폐쇄적인 조직내 엄격한 규율이 존재할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과 단순화로 행해졌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또한 방송계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폐는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손에 쥔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치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검찰세력과 언론, 소위 윗선들이 행하는 부조리, 행패에 분노가 치민다. 성범죄자들은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집행유예를 받고 사회에 나와 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들에겐 온갖 조작과 가설로 함부로 씌운 프레임에 가둬두려 하고 있다. 이런 행태가 길거리의 시장 잡배의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 모를 정도이다. 왜 가해자에게 가야 할 화살이 오로지 피해자로 향하는 것인지, 피해 입은 사실을 왜 스스로 증명해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지러운 판결의 여러 사례 중 황당한 것 중 하나가 왜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거부하지 못했고, 피하지 못했냐는 지적이다. 무지몽매함에서 오는 답답한 벽을 어떻게 깨부셔야 하는지 막막할 뿐이다. 


지금도 해결되지 못하고 어영부영 흩어져 있는 사건들은 현재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있어 알고 있었지만, 과거 88올림픽이나 변소에 대한 이야기, 유영철 사건에서 그가 했던 발언들에게 대해서는 새롭게 알아가는 부분이 있었다. 또한 양공주에서 원정녀라 칭하며 혐오하는 발언을 일삼는 그들이 성매매 자체를 소비하는 자들이라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여성은 땀을 흘리며 뛰는 모습도, 단장이 덜 된 모습도 보이면 안 됐으며, 미적인 요소로 존재해야 했다. 또다른 신분사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여성 인권이 이제와 제자리를 찾아보려는게  왜 불만과 혐오로만 받아들이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러하다. 그동안은 민족주의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잘못을 지적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자국 내에서도 피해를 입은 사실 자체가 족쇄처럼, 주홍글씨처럼 여겨져 바깥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감추고 또 감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과 사회의 성문란이란 잣대로 낙태의 선택과 권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죄라 칭하였다. 판단하기 무척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왜 이런 문제를 다루는 주체가 당사자가 아닌 그 고통을 알지 못할 완전한 타인인 것인지도 황망한 현실이다. 묻지마 살인, 사이코패스 등 매체에서 다루는 이유 모를 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나, 유독 성범죄 관련해서 많이 갖다붙이는 논제이기도 하다. 그저 여성과 약자이기에 살인과 폭력을 행한 범죄가 있었음에도 묻지마 살인이었다며, 정신감정을 통한 감형 등 병증에 집착하며 그에 따른 합당한 사유를 찾으려는 방식도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읽는 내내 분노하고 안타까웠으며 때론 공감하기도 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어떤 텍스트를 읽어도, 아주 잘 읽어내야 한다는 주의문이 붙어도 '박근혜'를 말하는 텍스트에서는 역시나 거부감이 든다. 그가 '여성' 대통령으로 실패가 아닌 여성 '대통령'으로서 실패했다고 말하는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여성이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떠한 여지라도 주는 부분에서는 공감할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라는 더러운 권력 아래 편안히 살아온 생에서 '여성'이라고 무얼 더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게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일 따름이다.


핸디북 같은 작은 책자 속에 다루는 내용은 거대하고 깊으며 무궁무진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나에게 여성학 입문서처럼 다가왔다. 그것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살펴봤기 때문에 더더욱이 그러하다. 페미니즘이라고 말할 때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주 많다. 관련된 서적도 조금 읽어보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상상을 더해 재탄생된 문학작품도 읽어보았으나, 아직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부분도 있다. 중심을 잡기 어려울 때도 더러 있다. 자꾸만 '나'의 자리로 겹쳐보여 아프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게 더 큰 게 사실이다. 우선 이렇게 점차 모이는 목소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해갈 수 있다는 그 시작점이 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고통을 끊어낼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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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병치시킨 사건들에 현재 진행형인 사건들을 창조적으로 병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최근 헌법재판소의 낙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명랑한 수술'과 겹쳐 본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 권리에 대한 언어와 세계가 더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서울올림픽에서 수행된 여성들의 환대 역할은 평창동계올림픽에서의 북한 여성들에 대한 집중적인 재현과 은밀한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은가? 10 · 26의 여성연예인들이 고 장자연 사건뿐 아니라 김학의 사건과 버닝썬 사건을 해석하는 새로운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일본군 '위안부' 기억 활동을 현재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성폭력 부정의 담론장과 병치시킨다면 앞선 기억 활동은 낯설게 응시될 수 있을 것이다.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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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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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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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회피형 인간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나 기억에서 도망치고 외면하기 바쁘다. 그게 나에게는 일종의 생존방식이었던 것 같다. 모른 척 덮어두면 시간이 지나 쌓인 두꺼운 먼지 속에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보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 그럭저럭 살만해진 듯 했다. 찌질하고 창피한 지난 날의 나는 그렇게 어두운 구멍 속에 쳐 넣어두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사회성이 부족했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으며 수동적이기만 했다. 지금이라고 많은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나아진 듯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희석되어 괜찮아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제목에서부터 나를 콕콕 찌르는 이 책과 담고 있는 주제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나의 상처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왕따"라는 문제는 복합적인 측면이 있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절실하지만 여기엔 같은 반 학생들부터 선생님까지 방관자가 존재하고 이미 형성된 깨트릴 수 없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이를 깨고서라도 용기내 손을 내밀어 줄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했다면,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지도, 무기력하게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거란 말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게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할 거란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가정을 덧붙이게 되지만.


왕따를 당한 기억을 인터뷰로 풀어내, 여자반 남자반 나눠 이야기를 한다. 언어폭력부터 물리적인 폭력까지. 그 범위와 정도는 지나치고 유해하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자각이 없는 게 태반이다. 가해자들에겐 가해자들이란 인식이 없고, 이를 오로지 피해입는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이다. 학창시절 학교는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 즉 전부와도 같다. 그곳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하게 되는 순간 손발이 묶인 듯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보면 그토록 힘든 시간에 반드시 학교에 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를 깨닫고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도움을 청할 어른도 없고, 부모님께도 말할 수 없어 혼자서 끙끙 앓아야 하는 것뿐 세뇌당하듯 들어온 폭력적인 말에 갇혀 자신의 잘못으로 몰고 가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할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다. 



강인한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신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닌 강한 멘탈과 자존감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학교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가정폭력에 노출되기도 쉽다. 그러니 그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인터뷰를 한 어른이 된 왕따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읽고 보며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당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종종 스스로를 혐오하며 파괴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사는 것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용기가 부족했던 것만 같다. 지나친 엄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되돌아보면 난 왜 그토록 유리멘탈이었고, 강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원망스러웠다. 내가 당한 고통보다 나의 가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더 괴로웠었다. 나만 당하면 그만이지 싶은 고통이 다른 부분에서 나의 형제도 같이 겪고 있었구나 싶으면 속이 너무 상했다. 밝은 빛만 전해주고 싶었는데 필요없는 어둠까지 떠안고 있었구나 싶어서. 



그래서 이들이 용기를 내어 왕따를 당했던 과거의 기억,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그 전엔 어떤 학생이었는지, 방관자와 가해자에 대한 생각 등 고백하고 이야기하는게 지금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이들에게, 혹은 겪었던 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는 듯했다. 



그저 텍스트로만 봤을 때도 가슴이 너무 아팠는데, 육성으로 말하는 걸 보고 들으니 울컥한 심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은 이렇게 선동과 같은 정치질에 휩쓸리지 않을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고, 솔직한 속내를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도 견뎌낼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그건 꼭 행운과도 같다.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오히려 그저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잘 지냈을 것이고, 오히려 밝고 쾌할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다. 자존감이 바닥치지 않았을 것이고 무기력하게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 덕분에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는 정말 심지가 굳건한 사람같아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해보다는 인정이란 말이 있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완전한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나조차도 스스로의 본질의 근원과 어디서오는지 알 수 없는 의식, 생각들을 일일이 짚어보기 힘든데,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하는 수밖에. 아직 가해자들까지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을 가지기엔 속이 너무 좁아서.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튜브라는 매체가 새로운 소통의 창구가 되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양한 반응이 오고 있다는 후기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꿈꿔보게 된다. 불안정하고 알 수 없기에 더욱 잔혹하고 정도를 모르는 폭력이 난무한 그 시절에 대해. 어떤 부분에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의 흔적들에 대해.



 때문에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 같다.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버텨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참고 견디면 시간은 지나가겠지만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으니, 도움을 청하고 소리쳐야 한다고. 너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트라우마란 결국 스스로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는 일이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도 용기가 부족한 내겐 다소 버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던하게 지나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잊고 싶으니까 조금씩 흐려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해지는 건 기질 탓이 크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얘기를 제외하고서 리뷰를 써야 하는데 그저 감정만 나열한 부끄러운 글만 남기게 되어 부끄럽지만...


상처받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본다. 그래서 소중한 그들의 삶이 더욱더 찬란히 빛나고, 아름다운 기억들만 새겨지길 바란다.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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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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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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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작가가 정리한 고전문학 읽기에 대하여-



이 책은 각각의 작품속 특화된 주제나 성격에 따라 총 7개의 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근대, 야망을 다루거나 문학 이상의 역할을 한다거나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거나, 일상을 속속들이 보여준다거나 성장과 청춘을 말한다거나, 실존과 부조리를 다룬다거나, 문학과 정치,메타픽션을 분석한다거나 해서 말이다.


여러 시대를 걸쳐 고전문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데는 일단 가장 먼저 작품성을 들 수 있겠다. 몇 세기가 지나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읽는 이로 하여금 매혹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게 분명하며, 마음을 잡아 끌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신뢰가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시대에 쓰인게 신통방통할 정도로 지금 현실에서의 고민을 담고 있을 때도 있으니 결국은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여러 특장점에도 불구하고, 고전문학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유 또한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번역의 문제가 들 수 있다. 작품이 써진 언어의 뉘앙스나 행간을 번역을 통해 전부 전달받기에 한계가 있으며, 특유의 번역체 문장이 가독성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지만 현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작품이 써진 배경이 되는 나라나 문화 등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특히 길게 나열된 이름이나 복잡한 명칭, 사회적 분위기 등이 걸린다면 소화시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전문학에 대한 입문서, 안내서 같은 설명이나 감상이 담긴 에세이나 산문집이 참 다양한 것 같다. 고전문학을 읽고 싶지만 이에 어려움을 겪는 나와 같은 일반독자라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해설보다는 부드럽고 친절한 안내서들을 통해 도움을 얻기 좋을 것이다. 그것도 직접 번역하고 공부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가 쓴 글이라면 더더욱이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 김연경은 소설가이자 문학과 창작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했고, 관련 러시아 문학 작품 여럿을 번역한 경력이 있다. 앞선 서문에서 느낀 인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쉽게 전달해주는 발화 방식에서 일단 신뢰가 간다. 단정하고 성실한 느낌을 준다. 더 넓은 문학을 읽기 위한 노력을 했고, 이 책은 이러한 자신만의 독법과 생각을 정리한 독서에세이로 보면 될 것 같다. 책이 써진 배경, 주전부리같은 지식과 어떻게, 어떤 지점을 중점적으로 짚어 가며 읽어냈는지에 대한 포인트를 삼아 공략하듯 읽어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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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독법을 서술한 이 독서에세이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겪고 느꼈던 것들에 큰 도움을 준다. 작가의 성장배경이나 그가 삶속에서 추구하려 했던 가치나 열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요소들은 물론, 작품을 읽으면서도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이나 물음에 대해 나 혼자만 갖던 호기심은 아니었구나, 이런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더 알기 위해 읽었던 것이구나, 이런 갈증은 당연한 것이었구나, 하는 공감도 얻게 된다.


이를테면 괴테의 대표적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파우스트』 를 보며 가졌던 의문이 다소 해결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인간의 끊임없는 방황과 갈구, 욕망 등이 그의 인생 자체에서 드러났다는 걸 새삼 그의 삶의 배경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대 문학가들이 문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에 대해 갖는 견해가 각기 다른게 매우 흥미로웠다. 꼭 자신의 작품세계와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해석하였다는 걸 보는 게 또 다른 재미였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을 두고 논하는 부분이 그러했다. 이전까지 햄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진 어렴풋한 인상도 다소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을 읽는 묘미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사에서도 워낙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고, 지금까지도 당연스럽게 회자되는 작품을 쓴 주역인데 글을 잘 쓴 것도 모자라,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대중적 인지도와 풍요로운 삶으로 백년해로까지 했다니 너무 부러운 삶이라 배가 다 아플 정도였다.


반복되는 표현이지만, 어쩜 그렇게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의 성향이랄까, 특성이 맞닿아 있는지 새삼 글은 곧 창작을 하는 작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신으로 평생 살았지만 여성의 삶은 곧 결혼이라는 명제하에서만 존중받을 수 있었던 시절 속에서 구혼에 관한 소설을 써왔던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창작된 작품들 속 인물의 성격과 특징, 동화의 위치를 굳건히 했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열과 성을 다해 아부하는 삶을 살았던 안데르센, 빅토리아 시대 하층 계급에서 시작해 전형적인 신사의 삶을 이어갔던 동화같은 디킨스의 삶, 어설프고 촌스러운 매력의 체호프처럼 말이다.


일개 독자에겐 작품의 성격에 맞닿아 있는 작가의 삶의 형태가 재밌는 배경지식처럼 느껴져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곁들여진 저자의 생각이 구절구절 공감가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부분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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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 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조롱하는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52-53쪽



과연,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74쪽



“꺼져라, 짧은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84쪽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표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94쪽



우리는 모두 마지못해, 적어도 엉겹결에 태어난다. 이것도 억울한데, 태어나는 순가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죽는 순간도 알지 못한다. ( …) 고전들이 경고하듯 문제는 단순히 창조가 아니라 창조 이후, 즉 조물주(신/아비)와 피조물(인간/아들)의 관계이다. 자연-신의 입이 적어질수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도 커질 것임을 명심해야겠다.  101쪽



이 소설의 사상을 대변하는 이반은‘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입장에서 출발, 만약 신이 인간을 자신의 닮은꼴로 창조했다면 왜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3차원(유클리드)’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모순 앞에서 그는‘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아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근거로‘반역’을 선언한다.“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23쪽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암컷의 삶을 통해서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단, 그녀에게는 그럴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148쪽



작가는 작기이기에 앞서 현실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둔 생활인이라는 것,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전제이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는 물질적 토대, 즉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166쪽



마땅히 우화도, 그림 동화도, 그렇다고 소설도 아닌 이 매력적인 책의 장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하다.『어린왕자』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장르다. 247쪽



이렇듯『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를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266쪽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즉‘체포’와‘처형’, 그사이에 위치한‘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271쪽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글쓰기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무력한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인간의 산물’이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까. 

306-307쪽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 내랴. 311쪽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학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불한당들의 세계사』) 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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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생뚱맞지만, 지금 이토록 어지럽지만 혼란한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게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부와 계급 차이는 존재하지만, 과거 모든 유구한 역사를 지나 빛났던 작품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빛을 내며 생명력을 가지며, 많은 이들이 찾아 읽고 또 사유思하게 한다. 문학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당장 밥 벌어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데 갖는 물음과 생각에 아주 작은 실마리만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중에 내 삶은 여전히 퍽퍽하고 나아지는게 하나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이와중에 문학마저 몰랐다면 더 회의적인 태도와 허무함에 몸서리 쳤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흥미로운 것들이 참으로 많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쓰는 것도 참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버는 주체인 나는 과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과연 무의미하고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것일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하기도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의문을 갖고 방황하며 욕망도 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바로 그런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다른 작품보다 우선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읽고 싶은 작품이 더 많아졌다. 막연히 가졌던 어려움도 다소 해소되었다.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닌거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이전에 했던 숱한 다짐들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다. 실행력은 매우 더디겠지만. 일단 실천에 옮기는 걸로, 가지고 있는 텍스트 먼저 일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이 리뷰는 출판사 민음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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