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이미 1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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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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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만에 출간된 최영미 시인의 시집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엔 참다 못해 터뜨린 고백에 되돌아온 소송과 고소장을 받아들게 된 시인의 생활 속에 파고든 싸움의 흔적에 지쳤던, 시를 놓쳤던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치매를 앓고 있는 병든 어머니의 간병의 시간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뜨겁고 차가웠던 연애, 사랑의 말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애정하는 모든 시집이 그러했지만 일상속 언어가 특히 다수 자리하고 있으니, 더 마음에 파동을 일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최영미 시인이 「괴물」 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내 암암리에 감춰졌던 추악한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보이게 했을 때, 미처 잘 알지 못하였다. 부끄럽지만 한 번에 그를 잘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이 시인은 누구였던가 되짚어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떠올리게 되며, 순간의 감탄사가 나왔던 것 같다. 이만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 이름의 무게를 심상치 않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모두의 존경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원로작가는 매년 거론되는 그 대단한 상에 대한 수상여부로 호명되는 사람이었으므로.


용기내어 고백함에 깊이 경이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고, 문단내 실태에 대해 내심 실망도 하였지만. 글쎄, 존경하는 시인이자 한창 문학을 공부할 때 나의 교수님으로부터 문단에서 '여류 시인'으로 불리며, 어떠한 처우를 받아왔는지 한 번쯤 언급해주신 덕분에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래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실로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지금쯤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하고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모성으로 대체되었던 여성의 자리가 주체적인 자아를 가지고 외칠 수 있게 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감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하였고, 확실히 그 내공은 가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수식어가 따르지 않아도, 행간의 폭이 좁은 듯 보여도 깊게 느껴지고, 에둘러 가지 않아도 탄성과 생기가 있다. 근데 왜 이렇게 아프게만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인의 말처럼, 삶은 늘 그렇듯 '계산이 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고(「밥을 지으며」),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내가 먼저 시들지 않'으려고 하지만(「꽃들이 먼저 알아」), 사는게 피곤해서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시가 자꾸만 도망간다(「시작메모 中」).


때론 '지겨운 이 땅을 떠나지 못했고(「오래된」), 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제발 그냥 내버려'(「내버려둬」)주길 바랬으나, 세상은 오지랖 넓게도 관여하곤 했다. 이에 '엉망진창인 세상을 정리할 순 없지만/쉼표와 마침표의 질서를 사랑하고'(「수건을 접으며」) 용기내어 내었던 얕은 목소리가 점차 한데 모여 큰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

여성의 이름으로 우리의 역사를 써야겠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가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래야, 이 삐뚤어진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머뭇거리던 목소리들이 밖으로 나와

하나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로 이어지고

행성이 되어 벽을 무너뜨린다



두려움을 넘어

내가 우리가 되는 기적


보석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너희들은 서로의 가슴이 별이 되리라




48-50쪽, 「여성의 이름으로」중에서




시인은 또 소송에 치여, 아픈 어머니를 간병하며 다른 것 하나 제대로 못하는 생활 속에서도 '내가 아는 똥은 더럽지 않다'(「간병일기」)며, 어머니의 배변활동에 잠시 기뻐할 수 있는게 젊었을 적에는 모르던 기쁨이라고도 말한다.


도망가버린 시를 잡지 못하여 아쉬웠지만, 그의 시집에는 그의 언어로만 가득하다. 바위로 깨뜨린 계란, 세상속에서도 숱하게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굳건히 두 발을 내딛고 서있는 모습이 위태롭지만 다시 일어서 굳건히 외치리란 믿음이 생긴다. 얽히고설킨 관계에 있어 주저함을 보인 것에 어찌할 수 없었지만 씁쓸한 현실을 실감한다. 시집을 내고 싶어 출판사에 연락해보았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만 남겨졌다. 결국 스스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시집을 발간할 수밖에 없던 현실이 시인 앞에 놓여진 것이다. 이에 시인의 피 대신 사업자의 피로 채우는 것에 씁쓸함을 느낀다. 하지만 고생스러움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하고, 힘차게 나아가는 태도가 더욱 좋았다. 


모든 걸 놓아버릴 수도 있고, 놓고 싶을 때도 있었을텐데, 끝까지 양손 모두 간절히 붙잡고 여기까지 와 이 시집을 펴내준 것에 대해. 


그리하여 이 시집에 실린 여러 시들에 동요하였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아무래도 그 당시 많은 이들의 만류에 미처 싣지 못했던 시인의 등단소감이다. 거침없고 솔직하며 활력 넘치지만 씁쓸한 뒷맛을 기록한. 이 굵직한, 울림있는 소감이 그 어떤 수려한 문장과 다짐보다 더 잘 와닿았다. 


또한, '인생은 낙원이야/삶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낙원」)이라 이를지니,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살아갈 날들 속에 또 어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랑은 계속 해야 하는 것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고생을 더 해야겠다던 시인의 다짐이 무색하지 않게, 그만의 힘이 가득한 시를 앞으로도 만나보게 될 것이다.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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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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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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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순적인 동물이라고들 한다. 바깥 사회에서, 혹은 주변의 이웃들에게는 물론 어디서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자 사회 발전에 헌신하며 베풀 줄 아는, 독재 치하의 환경에서도 올곧은 신념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있다면 당연히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지 부러워하며 경외할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훌륭한 사람이 가정 안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무자비한 독재자와 같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화자는 열여섯 살 소녀 캄빌리이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인물이며, 진보 성향의 언론사 《스탠더드》를 통해 민중의 목소리를 전하는 메신저이자, 자신이 가진 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자,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독실한 신앙심으로 종교계에서도 믿음으로 헌신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소녀가 누리는 여유롭고 안락한 환경에 감사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캄빌리 역시 아버지의 신념과 믿음 그대로 물려받은 형태로 강요받은 규칙들에 대해 감히 저항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의 신뢰와 마음을 얻고자 노력한다. 


아버지의 강압적인 가톨릭 교리와 행동양식에는 독재와 폭력으로 가득한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뜨거운 차 한 잔을 가족 모두 돌아가며 한 입씩 마시기를 하는 것에서도 매번 혀가 데여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긴다. 벨트 버클을 풀어 채찍처럼 휘두르고, 뜨거운 물을 발등에 붓고, 손가락을 뒤틀어버리며, 두꺼운 미사 경본을 집에 던지는 폭력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면 당연한 수순처럼 벨트를 풀고 가차 없이 휘두르면서, 이내 멈추고 방금의 행동을 참회하듯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자식과 아내를 끌어안는 모순된 행동에 합리화가 고작 상대에게 그 잘못을 전가하는 것에 불과한대도 이 소녀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지속되었다. 



죄악이 아님에도 죄악이라 불리는 것들에는 의지가 깃든 것들이었다.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캄빌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은 좁고 단단했으며, 어떠한 틈도 존재할 수 없었다. 은수카에 있는 이페오마 고모의 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생활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세계 속에서 처음으로 자산의 의지로 '저항'을 하게 된 오빠 자자의 행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단단하게 둘러싸여져 있던 그들만의 세계 속 벽에 조금씩 틈이 생기게 된다. 일등이 아니면 모두 실패한 것이고, 규칙에 어긋난 행동은 죄악에 가까우니 벌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임신한 아내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연약한 어머니는 그런 사람으로부터 자신과 자식을 지키기에 어려움이 있었고, 어느새 길들여져 있었다. 폭력으로 지배됐던 사람들에겐 이를 벗어날 용기와 생각조차 가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기에 행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폭력은 그 어떤 이유에서건 용인될 수 없는 것이고, 행해져선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도 목표도 오직 아버지께 순종하며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캄빌리는 웃는 법을 모르는 소녀이다. 정해진 일과표에 따르지 않으면 벌이 있기에 친구들과 같이 하교할 수 없었고, 기사 케빈이 데리러 오는 시간에 정확히 맞춰 나가기 위해 매번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사업체인 음료 공장의 신메뉴가 나올 때면 맛을 전혀 알 수 없어도 맛있는 척 연기를 해야 했으며, 어떤 상황이든 신의 가호를 청하는 말을 해야만 했다. 이를 먼저 말하지 못한 것을, 그리하여 아버지께 위안과 애정을 표현하지 못한 데에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아버지가 전통을 중요시하시는 자신의 아버지(파파은누쿠)를 이교도로 칭하며 인정하지 않고 마치 병균을 대하듯 행동하는 것을 그대로 행했던 캄빌리는 공부 이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었지만, 이페오마 고모와 그의 자식들인 아마카, 오비오리, 치마와 함께 생활하며 조금씩 배워나가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몰랐던 소녀가 받지 않아도 될 상처에 울며 소리치게 될 줄도, 의견을 말하게 될 줄도 알게 되었으며,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할 줄도 알게 되었다. 파파은누쿠, 할아버지의 믿음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믿음과 다르다 하여 결코 이교도라 괄시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니라는 것도.



심한 매질로 쓰러진 그녀 앞에 울고 있는 어머니를 힘껏 밀어 넘어뜨리고 싶다고 생각한 캄빌리에게서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대개 폭력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식들의 경우 가해자인 아버지보다 자신을 감싸주고 지켜주지 못한 어머니에게 더 원망을 품는다는 분석을 본 적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과 남자와 여자로 신분이 나뉜 것처럼, 재력이 있는 남자에게는 아내가 하나일 필요 없다는 낡은 세속에 따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임신을 생각하게 된 사람이라면. 과연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때론 그렇게 내기 어려운 용기가 더 무서운 행동을 실천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읽는 내내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에 몇 번이나 책장을 덮어야만 했다. 편안한 생활과 누릴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던 이 가족들이, 또 그런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캄빌리에게 거부감이 들었다. 한구석엔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부모님께 순종하였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공부하였으며, 자신의 선택과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대해 떠올리게 되어 불편함이 일었다. 여기에 더한 폭력이라니. 하혈하는 어머니를 본 후로, 눈에 보이는 모든 글자가 붉은 피로 보였던 캄빌리,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을 상처를 감히 가늠할 수도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 존재하여 그에게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었고, 이내 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에 담았던 사람에 대해 이뤄질 수 없음을 알았고, 절망했지만 심신에 자리 잡은 상처에 새살이 돋을 때쯤 캄빌리는 한층 더 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주 웃게 되었고, 목소리를 낼 줄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비극적인 결말 앞에서 결코 해피엔딩을 말할 순 없지만, 그 안에서도 변화는 그만큼 값진 것이다. 의지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버지로부터 아마디 신부로 옮겨간 것뿐이라도. 


애초에 자아가 형성되었어야 할 어린 시절에 자신을 보호받지 못하고 억압된 환경에서만 자라났기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주체성을 찾기 위해 더 수많은 노력을 하려고 해도 몸에 박힌 습관처럼 잘 깨부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돌아보면 너무나도 놀랍다. 수적으로는 절대 밀리지 않을 터인데. 한 사람이 가진 권력과 힘이 그렇게 크게 작용될 수 있는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힘 있는 인물이 권력을 잡았다. 남자와 여자 굳이 나누라고 하면 신체적인 부분에서는 당연히 좀 더 우위에 서게 되는 남자가 가졌을 힘과 권력을. 오늘날 젠더에 대한 질문과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아디치에의 강연을 통해 보았듯 그 역시 과거에는 공격할 거리로 페미니스트라며 지칭되었지만 그 말의 함의를 살펴보면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종종 말해왔던 '불편'에 대해 누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당연히 걱정하며 염려하며 살아가야 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떨쳐낼 수 있도록, 그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싶다고 외치고 말하는 것뿐이다. 아디치에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 부분이다.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 자신을 위해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신는,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단, 자신이 입고 싶어 예쁜 옷을 찾고 꾸민다는 선언에 대해. 어디에 더 비중 둘 것 없이, 똑같은 위치에서 동등한 기회를 가졌다면 더 많은 걸 이루고 행동하였을 많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외치는 것이다. 



어느 단편적인 이야기 하나로 가지게 되는 편견이 가지는 무게. 그리고 이를 반복적으로 접하고 강조하게 되면 그건 사실이 아니어도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것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됐다. 자신이 가졌던 생각과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반성하고 깨달은 사실을 되새겼던 아디치에의 태도가 대단했다. 재치 있는 유머와 또렷한 목소리로 전하는 그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이 듣고 알아갔으면, 그리고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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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조율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27쪽 



쿠데타는 쿠데타를 낳아. 아버지가 유혈이 낭자했던 1960년대 쿠데타 얘기를 하며 말했다. 37쪽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혁신된 민주주의지. 혁신된 민주주의. 이 말은,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말투 때문에 중요하게 들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원래 아버지가 하는 말은 대부분 중요하게 들렸다. 38쪽 




두 눈이 텅 빈 것이, 마치 자기 인생의 파편이 든 더럽고 찢어진 캔버스 가방을 질질 끌며 시내 길가의 쓰레기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미친 사람들의 눈 같았다. 49쪽



아버지는 오빠나 내가 성 다대오를 향한 열세 번째 간구에서 졸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는지를. 51쪽



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 54쪽



"누니에 음, 때로는 결혼이 끝나면서 인생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어요." 99쪽



고모는 너무나 쉽게, 너무나 자주 웃었다. 그 가족 전부가 그랬다. 막내 치마까지도. 111쪽



그때 나는 이페오마 고모도 사촌들에게 똑같이 해 왔음을 깨달았다. 엄마가 자식에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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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렌즈 앞에서 빛나는 아디치에의 존재감에 대하여-

https://blog.naver.com/minumworld/221600869527




(이 리뷰는 출판사 민음사의 '아디치에 소설읽기'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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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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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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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나기 발레단 사무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용의자는 해당 발레단 단원인 발레리나 하루코. 그녀는 갑자기 침입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위협을 느끼고 정당방위로써 행한 것이며, 남자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가가 형사와 오타 등 형사들은 사건 해결을 위한 조사로 곧 죽은 남자의 정체를 밝혀낸다. 그러나 발레단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한 상태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최종 리허설 도중 발레단의 연출가인 가지타가 객석에서 독살되어 살해당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게 된다. 이어 야기유라는 발레리노에게 향한 테러와 최종지점에 다다다른 순간 발생한 자살 사건까지. 



이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가가 형사의 눈에 들어온 발레리나 미오는 열렬한 팬심으로 가장한 가가의 이성적 호감과 긴장감 속에서 묘한 관계성을 가진다. 그동안 접해왔던 여타 다른 추리소설에선 잘 등장하지 않는(아닐 수도 있음), 용의자 중 한사람에게 흑심을 품는 형사의 수사 이야기라니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또한, 가가의 인간적인 면모는 곧 모두에게 두루 적정선의 거리를 지키며 대하는 부분을 통해 그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란 걸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겉표지에서도 이미 수식되어 있듯이 이건 추리소설을 가장한 약간은 미지근한 로맨스물이다. 그러나 이전에 접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적 특성만 살펴봐도,「명탐정의 규칙」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각 사건마다 꼭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요소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요소중엔 범행 동기에 가장 가까운 특성으로 '미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없이 약해보이고 지켜주고픈 존재로 비춰지지만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는. 하지만 이건 특별히 매력적인 장치는 아닌 것 같다. 



또한 추리소설 속 사건이란 몇몇 인물이 죽임을 당해야 전개되기 때문에 2~3명 정도 죽었다 싶은 지점에서 슬슬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범인의 정체가 공개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가진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사건이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우연적 속성, 그리고 엮이게 된 사람들의 사정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무엇일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개인적으로 추리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셜록이 대표적이고, 셜로키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어쨌든 아직까진 호감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 캐릭터 중 하나이다. 내겐 이런 인물이 가진 매력이 추리소설을 찾게 하는 요소로 작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교묘하고 기발한 트릭? 매력적인 인물? 촘촘하게 짜인 서사? 여기서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주로 언급되는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말해볼 수도 있겠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초반부터 터뜨리는 플롯을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시켜 호기심을 끈 다음 인물간 관계성과 그 바탕이 되는 동기에 사연을 부여하는 식이었다면, 미야베 미유키 같은 경우 초반부 다소 늘어지지만 세세한 묘사로 서사를 촘촘히 쌓아간 다음 중반부터 몰아치며 동기, 인물, 배경 등을 한데 어우러진 상태로 끝까지 내달리며 읽게 한다. 


사건의 다양성과 폭넓은 세계적 특성을 가진 히가시노 게이고와 인물의 심리와 사회적 구조에 따른, 그에 휩쓸리게 된 보통 사람들에게 대해 말하는 미야베 미유키. 결국엔 이런 비교는 무의미하고, 각자 끌리는 방식에 따라 선택하여 읽으면 될 것이다.


다작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때론 작품성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고, 워낙 영상매체로도 많이 만들어졌기에 이를 스스로 비판하듯 언급하며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상으로 표현하기에도 적절한 사건과 이야기, 인물까지 고루 갖추었기에 가볍게 읽기 좋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건이 발생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많은 읽을거리를 제공하는데서 장점으로 발휘된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내게 히가시노 게이고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인 작가가 아니다. 꽂히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읽는 재미와는 별개로. 초반부에는 이 발레단이 가진 특수성과 그안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지 범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고 가독성도 좋았기 때문에 술술 읽히는 힘이 있었지만, 연이은 사건에서 점차 밝혀지는 실마리에 허탈함이 들었다. 예술적 특성에서 비롯된 태도, 프로가 가지는 자세. 그리고 그러한 신체를 만들기 위한 고된 노력과 제약, 사고, 그리고 관계성을 들여다보면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허무함만 남게 된다. 


가가 형사의 연정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의 끈질긴 시선이 사건 해결의 중요요소로 작용되었으니, 이는 곧 형사의 직감으로 봐야 할까,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곧 추리소설을 가장한 로맨스물인 동시에 특출한 트릭과 서사보다는 형사의 직감과 우연적 요소가 겹친 사건 해결 이야기라고 말 할 수도 있을까.


시리즈물은 곧 기본 바탕인 플롯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떻게 매력적인 인물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가가 형사의 첫 출발점은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 다음으로 펼쳐지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면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에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개정판으로 고운 새옷을 입었고, 가가 형사라는 인물에 매혹되었다면 소장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에.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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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스
워푸 지음, 유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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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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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두드리기>

문단 내 꽤나 이름을 떨치는 작가인‘그’는 신작발표를 앞두고 있다. 이번에 발표할 신작은 사회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문학적인 깊이는 물론 추리소설의 묘미까지 느껴지는 작품을 발표하려는 중이고, 인쇄만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그에게‘아귀’라는 이름의 독자가 작가의 새로 발표할 작품에 여러 오류가 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온다.




<당신 없이는 미소 지을 수 없어요>

20년 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제의 작품은 세 남녀 사이의 치정관계와 연관된 살인사건으로 흥미롭게 연재가 되던 도중,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작가가 사망한데 이르러 완전한 결말에 다다르지 못하고 종결되고 말았다. 연재했던 잡지사는 점차 발전하여 다시금 이 작품의 재연재를 예고하며 유고 원고를 찾았다는 광고를 내건다. 진실은 대필 작가로 활동하는‘그녀’가 편집자를 통해 독자‘아귀’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나머지 부분의 원고를 완성하는데 있다. 그리하여 도대체‘아귀’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웅들>

경찰 정년퇴직을 한 아버지가 수술 후 병상에 입원하고 계시는데 방문한 동료 샹 아저씨 덕에 과거 수사한 여러 사건에 대해 듣게 되고, 글 쓰는 일을 꿈꿨던‘그’는 이를 소설로 옮겨 적어보기로 한다. 블로그에「영웅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하고 좋은 반응도 얻는 와중에‘아귀’라는 독자로부터 범인 묘사에 대한 지적을 받게 된다.



영웅도 보통 사람이고,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하지만 잘못을 직시하고 바로잡으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마땅히 영웅이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한 지점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64쪽



<우리와 그들>

은행에서 일하는 그녀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남자친구와의 순조로운 연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좋아하는 SF소설을 읽고 시놉시스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연재 플랫폼에 직접 연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도전해보기에 이른다. 서툴지만 열심히 하는 그녀를 위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추리소설에 대한 힌트와 아이디어를 주고 그녀 역시 열심히 연재하는 끝에 독자도 서서히 늘어가 이제 유료 연재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적인 작가 포스를 풍기는 독자 네티즌‘아귀’로부터 미스터리를 풀어나가기 앞서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것들에 대해 지적하는 메일을 받게 된다. 작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던 이 독자는 반드시 그 영향을 미치고 만다.



“사실 좋은 소설은 인간 내면의 깊은 심리를 파헤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정치적인 현실을 반영하기도 해.” 221쪽



<커다란 노란 택시>

추리소설 「커다란 노란 택시」로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게 된‘그’는 그로 인해 문단에 등단할 수 있는 영광을 동시에 누리고 되었고, 수상작을 포함한 심사평이 실린 합본집이 출간될 예정을 앞두고‘아귀’라는 인물로부터 메일을 받게 된 그는 기능적으로 설치된 플롯에 허점이 많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미 인쇄과정에 들어간 책을 수정할 수도, 심사위원들에게 이런 사정을 논의해볼 수도 없어 막막했던 그는 새롭게 구상한 플롯과 인물묘사로 이야기를 이어가 후속 작업을 이어갈 계획을 밝힌다. 아직 인쇄가 채 마치지 못한 수상작을 과연, 누가 어떻게 읽고 지적할 수 있었을까?


전제, 주제, 인물, 플롯 그리고 설정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입니다. 266쪽



<점점 더 하얗게 창백해졌네>

연애소설 작가인‘그녀’는 오랫동안 안정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으나, 점차 출판사의 형식에 맞춘 작품이 아닌 자유롭게 다른 형식의 작품을 써보고 싶은 열망에 미스터리와 연애를 접목한 작품을 신작으로 발표하게 된다. 연애소설 이외에 가장 좋아하는 장르 역시 미스터리와 스릴러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반응에 독자 반응을 살피던 도중‘아귀’라는 네티즌의 댓글에 자신의 생각과 같이 속편은 나오지 않을 거란 말에 호기심에 질문을 이어가게 된다.



아귀는 많은 연애소설에서 인물이 충분히 입체적으로 설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지적했다. 설령 작가가 감정이 풍부하고 다양한 층위가 있는 역할을 그려낼 역량이 있다 해도, 연애소설의 경우는 주요 줄기가 애정 관계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인물이 다른 사건에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기에 인물의 다른 성격적 면모를 표현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296쪽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든 아니면 대반전이 일어나는 결말이든, 둘 다 추리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으로, 모두 플롯 안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많은 추리소설 작가가 일단 플롯들을 먼저 생각하고 나서 인물을 욱여넣는다. 문제는 독자가 이야기를 읽을 때 보게 되는 플롯이 실은‘인물이 일으킨 일’이라는 것이다. 301쪽




<얼룩진 사랑>

출판사의 대대적인 판매량과 직원들의 월급을 책임지는 대표작가의 연작시리즈의 원고는 잡지 연재로도 이어지게 된다. 열정 넘치는 신입 편집자와 드디어 밝혀진‘아귀’의 정체는 뜻밖으로 보이지만, 아!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아귀’는 편집자와 작가가 토론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



간만에 굉장히 재밌는 작품을 만나 모처럼 즐거운 독서가 되었다. 일곱 개의 작품, 일곱 편의 추리소설이 소설 내에 액자소설과 같은 형식으로 부분부분 전개되고, 어느날 작가 앞에 나타난 유령 독자 '아귀'는 잘 풀리지 않는 이야기, 플롯이 가지는 허점에 대한 힌트를 던지면서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지를 말한다. 작가들은 모두 3인칭으로 표현되고 말하며, 처음엔 경계를 느끼던 태도 역시 '아귀'의 논리와 타당한 근거에 따른 의견에 수긍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를 묻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마치 소설 속의 소설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메일이나 댓글로. 작가와 의견을 주고 받고 토론을 하는 아귀의 정체는 맨 마지막 챕터에서 밝혀지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또 다른 재미요소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직업군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국내는 어떠할 지 모르겠지만 해외같은 경우와는 작가와 같이 작품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의 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각기 다른 플롯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도 읽을 거리가 참으로 풍부하다. 또한 군데군데 대화의 형식은 매우 직설적이다. 이걸 호방하다고 표현하다고 해야 할지, 유쾌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만의 특성이 느껴져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아주 간간히 유머도 섞여있다. 생각치도 못한 포인트에서 터지기 때문이다. 독자의 특징들 역시 흥미로웠다. 

이 작품 속 독자들은 늘 자신들이 읽는 작품을 두고 토론을 하는 게 일상처럼 표현되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다. 물론 국내에도 독자 개개인의 서평활동을 제외하고도 북클럽이라든지 독서토론 모임이라든지 많이 있지만, 그보다는 뭔가 더 일상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힌트로 등장하는 여러 작품들과 곡 제목을 통해 차용된 챕터별 제목 구성도 좋았던 것 같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소설 쓸 때 가져야 할 미덕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풀어가는 재미가 있는 추리소설,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특히. 아귀의 표현대로 소설에서 플롯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결국 인물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사건들과 플롯, 그리고 탐정이라는 캐릭터적 특성을 활용한 많은 작품들을 보며 추리문학을 열렬히 사랑하는 독자에게 의문점이 드는 구석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는 또한 글을 쓰고, 작품을 창작해내는데서 가져야 할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자료조사의 중요성과 작품 속 인물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고찰도 필요할테도 관계성과 심리묘사 또한 무척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창작이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밀도 높은 완성도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게 되었다. 실제로 열혈독자들은 맑은 눈과 깊이 있는 독서력으로 발달된 날카로움을 가졌을테니 더욱더 그러하다. 


작가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사건을 증오한다고 밝혔다. 이 소설집 전반적인 플롯 모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아귀'라는 역할을 내세워 자신 나름대로 진실을 밝혀보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런 과정에는 픽션의 속성도 가미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억울한 심정을 풀어내고 있을테고, 누군가는 괜히 지나간 사건들을 들쑤신다 여겨 마땅치 않아 할 것이다. 어느 것이든 진실에 관한 것이라면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의 이목을 끌었으니 좋은 영향력이 될 수도 있겠다. 너무 과신하지만 않는다면.


재미와 완성도를 두루 갖춘, 가독성 좋은 이야기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작품 속에서 한결같이 느낄 수 있었던 작가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을 내보인 탓에 다소 직설적으로 느껴지지만, 덕분에 신뢰가 간다. 이는 소설 쓰기에 관심갖는 사람이나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 워푸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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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에번 핸슨
밸 에미치 외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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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에번 핸슨』




"Anybody Have a Map?" from the DEAR EVAN HANSEN Original Broadway Cast Recording

(뮤지컬이 소설로 재탄생되다니, 기대되는 작품
 『디어 에번 핸슨』)








(굿즈 선물도 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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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어 에번 핸슨』 은 동명의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사회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소년이 한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온갖 오해와 혼란의 중심에서 스스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뭉클한 메시지까지 전달하고 있다. 보통의 경우 텍스트가 영상이나 무대로 구현된 사례가 많았으나, 이 작품은 그와는 반대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컨텐츠에서 읽고 상상하는 것으로 전환되어 생소하고 매력적이다. 이미 흥행한 작품이라면 단연 재미와 감동을 겸비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에, 또 운좋게도 유유브에 검색하면 훌륭한 무대 영상과 특별 영상, 사운드 트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함께 텍스트를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한 번 쭉 읽어본 뒤, 뮤지컬의 구간별 사운드와 연결하여 들으면서 읽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


사회 불안 장애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에번 핸슨/에반 한센. 어렸을 적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지금은 어머니 하이디와 같이 살고 있는 에번. 낮엔 병원에서 간호사로 밤엔 로스쿨 학생으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하이디는 에번을 잘 챙겨주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에번을 걱정하고 있다. 심리 치료를 받으며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어야만 진정이 됐던 에번은 여름방학 동안 공원관리원으로 일했던 곳에서 팔이 부러지는 추락사고를 겪게 된다. 깁스를 찬 에번에게 하이디는 친구들의 메시지와 낙서를 받아보며 친밀감을 갖길 바래보고, 내색하지 않지만 고운 심성을 가진 에번은 하이디의 말대로 친구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조심스러운 시도를 이어간다. 

 한편 치료의 일환으로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과제를 해야만 하는 에번은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형식적인 내용의 편지만 썼다가, 아무도 없는 학교 컴퓨터실에서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담은, 마치 유서와 같은 편지를 쓰게 된다. 투명인간 같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사라져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거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담긴. 

그러나 혼자 있다고 생각했던 컴퓨터실엔 교내 문제아로 낙인 찍힌 코너가 있었고, 웬일인지 에번의 빈 깁스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는 코너. 오전에 그와 부딪혔던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 뜻밖의 행동을 이어간다. 에번이 자신의 동생 조이를 짝사랑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편지 내용에 조이의 이름이 보이자 화를 내며 가져가버린다. 

불안했던 3일이 지나고 갑작스러운 교장선생님의 호출에 가보니 에번의 앞엔 코너 부모님(래리, 신시아)이 와 계셨고, 당황스러운 소식을 전해온다. 며칠 전 코너가 자살을 하였고 그가 자신에게 남긴 유서가 있다는 말에 에번은 자신의 편지를 가져간 코너를 떠올리고 오해를 풀고자 하지만, 그의 깁스에 새겨진 코너의 이름을 보고 안도하는 그들을 보며 믿고 싶어하는 대로 사소한 거짓말을 하게 된다. 

무심한 아버지와 바쁜 어머니 사이에서 외로웠던 에번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계기로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집이 가까운 이유로 그나마 친구인 것 같은 제러드와 코너와 주고 받았다는 가짜 메일을 만들고, 매사 적극적인 엘레나의 교내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코너 프로젝트'의 영향력도 점차 커져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원했던 조이와의 관계도 가까워지고 더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일상이 편안한 에번에게는 코너의 환상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역시 커져만 간다. 무엇보다 코너와 가깝지 않았지만 거짓말로 그와의 친밀성을 꾸미다 보니 정말 가까운 듯 느끼게 되어 진심어린 마음을 전한 추모식 연설은 널리 퍼져나가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기 이른다. 한순간의 유명세와 많은 친구를 얻게 된 에번. 

코너와의 추억의 장소로 말했던 게 우연히도 맞아 떨어진 어느 농장, 그리고 그 농장을 다시 재개장 하기 위한 모금. 어머니 하이디와의 대화 단절이 지속되어 가고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듯, 갑작스럽게 위기가 닥쳐온다. 가짜 메일을 의심하는 엘레나, 자신의 아들이 다른 집에서 더 친숙하게 지내고 있었고, 대학 학비마저 지원해주겠다는 의견을 듣게 된 하이디는 에번과 크게 다투게 되고, 오해를 덮기 위해 전달한 편지는 코너의 유서로 다시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사람들의 공격적인 관심에 다툼과 혼란이 이어지는 코너의 가족들 앞에 결국 진실을 고백하고 모든 걸 바로 잡기 위해 애쓰는 에번은 앞이 캄캄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한다.

가족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늘 해왔던 생각이지만 누구보다 가깝지만 누구보다 먼 존재같은.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기에 때론 남에게는 잘 보였던 모습을 감추려고 애쓰는 듯한 양상. 화목한 가정을 바랬던 신시아와 바른 길로 가길 원했던 래리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며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애매모호한 흔적으로만 남기고, 소중한 친구를 지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고 좌절하게 된 코너처럼. 모든 게 쉽지만은 않다. 이렇게 어딘가 한 구석 상처 하나 없이 맑은 가족은 대체로 흔치 않을 것이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슬픔에 잠식된 코너네 가족을 위한 거짓말은 어쩌면 각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방황하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개선과 그저 방치했다는 죄책감, 오빠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했고 자신을 싫어했을 거라는 오해와 함께 남겨진 미안한 마음. 모든 복합적인 마음들에 한 줄기 희망이자 안도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번의 말처럼 다행스럽게도 코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였고, 진심을 나눌만한 친구가 있었으며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진실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그 결이 아주 다르다라곤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코너 역시 스스로 간절했을 것이다. 그만큼 모든 게 불완전하고 서툴렀다. 



"You Will Be Found" | DEAR EVAN HANSEN



에번의 추모식 연설이 다수의 마음 속에 가닿을 수 있었던 건 그 역시 코너와 비슷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어떤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면 서로에게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 같다는 게 더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코너의 시도는 원하는 대로 이뤄졌고, 에번은 실패에 그쳤는데, 이 실패가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는지...그 마음을 감히 가늠할 수 조차 없다. 왜 글로써 다시 재탄생하게 되었는지 읽어나갈수록 선명히 와닿는 기분이었다. 직접 보는 것으로 다 전달할 수 없었던 섬세한 면면들이 글로 표현되어 있다. 두 가지 형식 모두 너무나도 매력적이므로 이 모두를 감상하기를 추천해본다. 


성장을 담고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굳이 꼽자면 그래도 이야기 속 주인공은 행복했으면 하는 해피엔딩 지지자이기 때문에, 현실은 비루하지만 반짝거리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좌절하며 넘어지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그 동력을 닮고 싶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들로 보자면 결국은 좋아한다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SNS라는 새로운 매체를 차용한 것도 현실성 있고 좋았다. 사람들의 수많은 관심은 금방 확 불타오르기도 하고 또 금세 팍 식어버리기도 한다. 일회일비 하지 말자고 하지만 쉽지 않은. 아마 대개 누구든 관종끼는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호의적인 관심을 받는 게 마냥 싫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듯한 관심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때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의 걱정과 염려를 받고도 싶고, 때론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어 위로를 받고 싶은 것처럼.

 때론 나와 같은 상황에서 무사히 잘 살아가고 있는 이에게 힘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겐  『디어 에번 핸슨』 이 그런 힘을 주는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



다들 달라진 것 아무것도 없는 듯 다닐 테지만 나는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16쪽

이 편지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때도 있다. 원래 목적은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시키는 건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20쪽

환상은 언제나 근사하지만 들이닥친 현실이 나를 땅바닥으로 밀칠 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38쪽


내 팔에 적힌 그의 이름. 내가 무얼 하든 어딜 가든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눈을 뜬다. "그것이 그가 제게 준 선물입니다……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 것 말입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렇다. 나는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게 그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선물이죠. 다만……."
이게 가장 끔찍한 부분이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우리도 그 선물을 그에게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232쪽

나는 땅으로 추락한다. 나는 절대 하늘 위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 추악하고 무거운 진실이 나를 계속 잡아당기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265쪽

나는 알맞은 대가를 치를 수 있길 기다렸다. 가끔은 두 손에 머리를 묻고 이미 지난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애원했다. 코너가 내 편지를 어떻게 할지 전전긍긍하던 때와 비슷했지만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심했다. 위험부담이 훨씬 컸다. 405쪽


깁스를 떼도 내 살갖에 남은 그의 이름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를 영원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을. 411쪽


세상에는 우리처럼 외로운 영혼이 너무나 많다. 우리 모두가 여길 건설하는 데 일조했다. 여기가 자라는 걸 지켜볼 사람들.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들. 우리는 함께 행진한다. 함께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모든 것의 중심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우리 자신에게 가까워지려고. 서로에게 가까워지려고. 진정한 무언가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422쪽 


"Only Us" | DEAR EVAN HANSEN


"Disappear" from DEAR EVAN HANSEN performed
by Taylor Trensch and Alex Boniello | DEAR EVAN HA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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