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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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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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브렉시트, 폴린보티, 의식의 흐름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인 앨리 스미스의 글쓰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 인물의 기억 속을 오가는 장면 전환이 차분한 어조로 서술되지만, 때론 연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때론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계절 4부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된 이 작품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와 그 이웃인 팔십 노인 대니얼과의 특별한 우정을 다루는데 등장하는 현실의 면면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 여백의 틈으로 현실이 등장할 때면 차가운 바람을 맞은 듯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여권을 재발급 받는 것 하나에도 쓸데없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행정 절차가 소모적인 관행처럼 불편함만 남기며, 혼란스러운 사회의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니얼에 대해 혐오와 편견을 일삼던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마지막엔 자신이 사회의 차별과 소외를 받게 된 입장에서 그에 따른 변화를 이룬 것이 생각치 못한 반전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이웃을 인터뷰해야 하는 숙제를 통해 시작된 대니얼과의 우정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서른두 살의 미술사 강사가 되었고, 대니얼은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 누워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과거의 그들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고 가는 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로 인해 피어나는 창의성과 온정이 잘 드러나게 표현되고 있다. 깊고 너른 사고 방식을 심어주듯이. 


그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폴린 보티'라는 인물이 매우 흥미롭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팝 아티스트는 당시에는 당연했을지도 모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편견과 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수식어로 폄하되었기에 때때로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 스스로는 본인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지성적인 나체에 대한 언급, 크리스틴 킬러라는 여성의 스캔들을 다룬 작품, 시선의 폭력성에 맞서는 당당함이 좋았다. 어쩌면 모든 걸 다 가진 사기 캐릭터가 아닌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예술가이니 뭐 하나 흠집을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못난 이들의 어리석은 치부와 같은 공격이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우정에는 있는 그대로의 특별함을 간직한 채 두고 싶다. 대니얼이란 역할은 내게는 한 번쯤 꿈꿔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내가 엘리자베스처럼 영민하고 자신만의 감성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있었을지도 모를 특별함을 이끌어 줄 좋은 어른 사람과의 우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늘 수동적이었고, 가지고 있는 게 딱히 없었으므로 그런 인연이 없는게 당연한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들기도 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창작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표현 방식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고, 여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백을 가진 호흡은 소설보다 시적인 특성으로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섬세한 묘사가 아름답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여러 번 음미하듯이 반복해 읽어야 하니씩 그 의미를 아로새긴다는 느낌으로 접하기에 좋고, 오랜 여운도 남길 것 같았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두 인물간의 우정, 그 사이에 끼여든 혼란한 현실, 그리고 무의식과 기억을 오가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관계성, 계절의 변화 등 한 편의 가을 그림동화같기도 하다.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이란 나라가 배경에 있다.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휩싸인 이웃에 대해 편견과 차별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엘리자베스가 무척 사랑스러웠고, 그가 항상 무언갈 읽고 있길 바란다는 대니얼의 바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시대성의 공감을 자아낼 거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물론 이와 같은 차별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저쪽의 낡은 행정 절차와 혼란함보단 지금의 한국 사회의 면면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사회 곳곳마다 썩은 고인 물들이 많고, 적폐는 자신이 적폐인 줄 모르고 깨인 지식인마냥 지껄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통해 얻은 민주주의가 있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문장이 아름다운 작품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단순히 표현하는 방식이, 그 수식이 아름답다는 것뿐 아니라 현실 사회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기가 느껴지기에 이러한 말을 반복하게 된 것 같다.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는 표현은 묘하게 거대 장벽처럼 느껴져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들었지만, 막상 책장을 열어보니 유려한 문체와 서사를 진행하는 방식이 좋아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앨리스미스의 사계절 연작의 첫 작품이라 무척 다행이다. 다음을 기다리고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명명높은 여러 상들에 종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니 언젠가 꼭 수상 소식이 전해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앨리 스미스라는 작가 역시 믿고 읽는 작가가 되었기에, 스스로는 결코 먼저 찾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이 작품을 민음북클럽을 통해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북클럽의 순기능이 아닐까.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하나씩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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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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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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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보통 철학에 가지는 편견의 벽을 부시고, 철학을 배우는 목적이 삶의 고민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고, 유사시 대비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깊게 고민할 때 그 고민을 잘 살필 수 있는 거울, 해결할 수 있는 도구 같은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방향성임을 아주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주춤거리며 한 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의 철학자들이 교양시간에 한 번쯤은 언급되며 배웠던 이름들이지만, 그들의 사상이랄까 관련된 모든 지식과 사고가 소 귀에 경 읽기마냥 그저 흘러가기 일쑤였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쯤 던져보는 질문들에 스스로 골머리 앓다 속을 끓이는 순간이 들면 떠오르는 학문이기도 하다. 여러 학자들이 호명 되었지만 그중에 기억에 남아 다시 자세히 찾아 읽어보고 싶었던 인물은 실존에 대해 말한 키르케고르와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을 찾았던 니체 그리고 언어구조학자들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등이다. 


시대별로 차례대로 읽어나가다 보니 앞선 체계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전복시키며 자신의 신념을 구축하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절망이라는 질병은 반드시 앓을 수밖에 없으며, 존재와 있다의 깊은 굴 속에서 내가 읽고 있는게 한국어가 맞는지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양한 예시가 등장하며 한 번 쓱 훑어보기가 가능한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제목은 다소 비약적이지만 실은 절대 하룻밤에 다 읽을 수 없는 철학에 대해 이렇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 또한 대단한 능력인 게 분명하다.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정리 능력에 존경을 표한다.



삶에 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아날로그 감성을 찾는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고 고된 일상이 지속될수록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찾기 위해 과거에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우리의 현실이 담긴 작품에서 위안을 얻는다. 과거에도 이와 같은 무거운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의문을 가졌지만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나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 내가 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실존이란 무엇인가. 문득문득 낯선 감각이 일 때마다 궁금하였지만 잘 해소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번 기회에 살짝 맛만 보게 된 철학에 대해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다. 




1장 사색하는 사람의 기원_고대, 중세 사상



1. 소크라테스: 윤리적 주지주의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어떤 테마에 대해 대화(질문과 대답)를 해나가면 반드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옳은 것'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로고스(논리,이상,언어 등 근원적 질서)를 구사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모두가 똑같은 하나의 결론(객관적, 보편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이성을 신뢰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성 중시'입장은 이후의 유럽 철학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24쪽



'지식과 행동은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덕에 대해 논의하고 음미하는', 즉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6쪽



옳지 않은 행동을 저질렀을 때 파괴되는 내면의 존재란 아마 '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쪽



철학은 혼을 보살피는 것이며, 이는 죽음에 대한 훈련이라는 것.



2.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르케는 세계의 원리, 시원, 근거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자연현상이나 물질 등을 아르케로 정의했다. 그중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모두 포섭한 주장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32쪽



플라톤에 의하면 현상세계 안에 있는 빨간색이 사라져도 다른 빨간색이 나타나는 것은, 빨간색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현실에 떨어진 다른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빨간 색에서 좀더 사고를 확장해보자. 색뿐만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는 원형이 있다. 그 원형이 있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이 되풀히나는 이 세계에 일정한 유지가 유지돤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34쪽



이데아, 영혼의 환생, 상기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인 형이상학이란 사실 존재 전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4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에 따르자면, 주어가 되고 술어가 되지 않는 개체가 바로 실체가 된다. 현실에 있는 개체로서의 실체는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고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술어를 받아들이는 존재인 것이다. 43쪽


질료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말하며, 그 가능성이 실현된 상태를 '현실태'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의 '가능태'는 종자고, 현실태는 생장한 나무다. 이미 최고도의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을 '순수형상'이라고 하며, 이것은 '신'이라고도 불린다. 44쪽


그렇다면 세상 전체는 항상 목적을 갖고 완성하고자 하는 작용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세상은 대체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46쪽



3. 예수 그리스도, 바울



'세상은 봉사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원리란 이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대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으려는 행위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59-60쪽


4.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찰은 유명하다. 그는 시간은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여겼다. 시간 밖에 있는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신은 '영원'하다. 69쪽



물체는 자신의 무게에 따라 자기 자리로 향하려고 합니다. (…) 물체는 정해진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정해진 자리에 놓이면 안도합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 나는 사랑에 의해 어디서나 사랑이 가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 고백록  ≫ 제13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피조물은 존재 그 자체인 신에게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눈부시게 신의 완전성과 신비를 반영한 모습이다. 피조물 세계의 모든 존재자는 신의 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것을 반영하는 최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76쪽



2장 신을 파헤치는 사람들_근대 사상




5. 데카르트



절대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의심하는 일에 철저하게 매진했다. 이러한 의심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아무리 의심을 하고 또 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절대 확실한 것'이다. 85쪽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단 한 가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 나는 의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한 순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저절로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86쪽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존재한다. 나란 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지위로도 이름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다. 이 육체도 아니다. 나란 '생각하는 것' 자체, 즉 사유뿐인 존재다. 89쪽



고대철학에서 절대 진리로 통하는 필연적인 존재 신에게서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참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이성의 독립선언'으로 그 체계의 중심이 인간으로 돌아갔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실체를 신과 물체, 정신으로 한정했다. 그중 물체의 속성의 연장, 정신의 속성은 사유라고 봤다. 이로 인해 공간이 균질해지고 역학적 ·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가 창시한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이후의 과학의 특징인 자연의 수량화를 실현했다. 90쪽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신이 가진 성질로서의 불변성에서 운동량의 항존성을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신의 불변성에서 물체의 관성의 법칙 등 자연법칙을 도출해내어 물리학의 체계를 구축해나갔다.  95쪽


자기 자신의 내적 감정, 지적인 감정의 힘에 의해 우리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서 커다란 지침으로 삼기 좋다. 100쪽


6.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로지 존재할 뿐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모습이 '자연'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신인 것이다. 정신과 물체라는 두 속성은 서로 독립해 있다. 물체적인 것은 물체적인 것밖에 원인으로 가질 수 없고 정신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밖에 원인으로 가질 수 없다. 정신과 물체와의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를 찾을 수 있다. 107쪽


신은 구원을 하거나 재판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원리이고 자연 자체이다. 신은 '산출하는 자연'임과 동시에 '산출된 자연'이다. 110쪽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안심하기 좋다. 세계를 '영원한 상의 토대'로 인식하고 필연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자유였다. 112쪽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는 변하지 않고 계속 본질을 유지하려는 의지, 경향이 있다고 봤다. 이를 코나투스라고 한다. '노력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말은 사물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존재에게 코나투스는 본능적인 것이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113쪽


[정리3]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한 명료 · 분명한 관념을 형성하면, 순식간에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게 된다. - ≪에티카≫ 제5부


불행하다는 수동적인 감정은 고귀한 능동적 감정으로서의 '신에 대한 지적 사랑(신을 영원한 것으로 인식하는,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이는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신神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과의 일체감이 생기고 지복이 찾아온다. 116쪽


7. 로크, 버클리, 흄


로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간은 경험에 의해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마치 백지 상태와도 같다고 설명했다. 120쪽


제1성질은 실제로 물체 안에서 존재하지만, 제2성질은 인간만이 느기는 것이고, 마음속에만 있는 주관적인 관념이다. 122쪽


이렇게 버클리는 어떤 물체도 '지각되는'것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며, 이를 토대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정식을 완성했다. 125쪽


인상과 관념은 모든 인식의 기원은 인상에 있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흄은 '관념의 관계'에 관한 지식과 '사실'에 관한 지식으로 구별한다. '관념의 관계'에 관한 지식은 수학이고 흄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혹은 논증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고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지하고 있어 잘못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26쪽


8. 칸트



이 세상은 우리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성과 이성의 기능이 능동적으로 세계를 완성한 결과 덕분이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르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을 칸트는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칭했다. 134쪽


도덕적 자유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거나 구속되지 않고 자기의 실천생활을 스스로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존엄이다. 인간은 어디로부터랄 것도 없이 들려오는 무조건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140쪽


9. 헤겔


철학의 역할은 착각을 타파하고 더욱 커다란 사고로 고양시켜가는 방식을 제공하는 데 있다. 145쪽


변증법이란 헤겔이 감각적 확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으로, '존재 및 구체적인 현실의 운동 · 변화를 지배하는 윤리'다. 동시에 '모순과 대립, 그리고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발전하는 운동과 변화를 파악하는 사고'이기도 하다. 148쪽


세계는 착각의 총체다. 인간은 그 안에서 단련되고 힘을 늘려가도록 만들어졌다. 149쪽


모든 현상은 ① 아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은 안정된 단계(정, 즉자), ② 모순이 드러나는 단계(반, 대자) ③ 모순이 해소되고 고양되어 보존되는 단계(정이나 합, 즉자)를 거치며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151쪽



3장 인간에게 존재를 묻다_현대 사상


10. 키르케고르


헤겔 철학은 근대 사상의 종말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 니체 등 현대 사상가로부터 총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상은 근대 사상의 거인인 헤겔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했다. 162쪽


실존이라는 개념은 이미 셸링이 주장했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에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라는 뉘앙스를 추가했다. 실존이란 가능한 존재도 추상적 존재도 객관적 존재도 아닌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현실적, 구체적, 주체적인 나의 존재를 말한다. 163쪽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을 갖고 있다. 그 불안은, 인간은 자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킬지는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부자유)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166쪽



인간은 계속 스스로와 마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결정할까, 저렇게 행동할까 등으로 생각해보면서 자기라는 것에 대한 의식을 심화해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대로는 안 된다'는 초좜과 절망감이 깊어진다. 다시 말해 자기의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절망의 정도가 늘어난다. 166쪽



절망이라는 질병. 인간이기에 걸리는 질병이며, 걸리지 않는 존재는 오히려 불행할 수 있다는 게 역설적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혹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정열적으로 믿는 태도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를 올곧게 믿음으로써 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170쪽




11. 니체




과거의 철학은 진실을 추구하고 세계와 인생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해왔다. 그러나 니체에 의해 그런 것들은 '힘에의 의지'에 따른 해석이라는 것, 나아가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진리가 없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과거의 철학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무無뿐이다. 

니체는 철학을 니할리즘으로 이끌었다. 니할리즘이란 목표나 의의가 상실된 상태를 말한다. 인류가 오래도록 믿어온 최고의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무목적 ·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체는 이처럼 최고의 가치가 상실된 상태를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182쪽




어떤 일에도 등 돌리지 않고 견디며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사랑하는 강한 인간. 이러한 '힘에의 의지'순수하게 발휘해 강인하게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초인'이다. 니체에 의하면 '초인'의 사상은 니할리즘을 극복하고 인생의 위대한 긍정으로 향하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183쪽



괴로울 때도 변명을 하거나 순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극한 상황으로 쫓기는 심정이 된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다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괴로움을 지그시 참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을 괴로운 상황으로 몰아치는 것이, 즉 자신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86쪽



12.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인격이 '에스(ES, 이드Id와 같음)' '자아' '초자아'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에스'는 무의식이고 본능적인 에너지의 저장고이며 쾌락원칙에 따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성질을 가졌다. 이를 억압하는 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자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적응반응 가운데 하나로, 본래 자아의 힘으로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통해 욕구를 채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192쪽


13. 후설, 하이데거



현상학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에 두는 철학으로 현상의 구조를 통해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창시자인 후설은 철학은 주관과 상대성 대신 수학적 법칙과 과학적 논리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4쪽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 자체와는 구별된다. 존재자는 세계 안에 각각 존재하는 것이며 '사물이 어떻게 존재할까(존재론적 물음)'는 다르다. 213쪽


하이데거는 존재가 작용하는 장이 되고 있는 인간을 두고 '현존재'라 불렀다. '현존재(인간)'가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면 존재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214쪽



하이데거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대상(세계)에 과학적 인식을 매개로 하여 외부로부터 파고든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이미 자신이 일정한 방식으로 세계 안에 있음을 기정사실로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봤다. 216쪽


하이데거는 시간을 살아가는 현존재(인간)가 미래에는 이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궁극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 가능성의 끝은 죽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죽음은 확실하며, 먼저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나보다 앞서 있는' 가능성이다. 222쪽



14.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자신이란 항상 자신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슬퍼해야 할 일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어떠한' 존재라고 정해진 게 아니라 이 세계에 내던져져 스스로를 만든다고 봤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표현했다. 228쪽


인간관계란 이렇게 서로에게 '시선'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주체끼리에 의한 불가피한 상극의 상태이다. 229쪽


인간의 행위는 그것과 행함과 동시에 즉시 타자의 음미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인간관계가 자유로운 주체끼리의 연결인 이상, '시선'이라는 둘 사이의 공간에서 타자로부터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32쪽


메를로퐁티는 내가 살 수 있는, 지각한 상태의 현실 세계를 '현상야'라고 불렀다. '현상야'를 살아가는 주체는 '자기의 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몸이야말로 다른 누구와도 대체시킬 수 없는 '실존'이며,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자아의 표현'이로 봤다. 234쪽




15.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은 각각의 생활 가운데 일정한 규칙을 토대로 언어 게임을 하고, 언어의 의미는 그 문장이 사용되는 문맥이나 그 문장이 속한 게임 규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언어의 의미는 사물과의 대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촉발시킨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의 철학 작업은 언어의 용법이 야기시킨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고, 그 열쇠는 일상 언어의 분석에 있다. 251쪽



16.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소쉬르가 언어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세 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시니피앙은 음성의 청각적인 영상으로서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시니피에는 언어 기호인 시뉴가 그 내부에 지니는 개념(의미)을 의미한다. 256쪽


물건과 일을 말을 통해 구별하는 것은 곧 언어에 의해 현실세계를 구분 짓는(분절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구분지어진 세계에 말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59쪽



세계는 언어였다. 언어가 늘면 세계가 확장된다. 그렇다면 언어와 언어의 관계를 분석하면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260쪽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도구이며,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구조주의를 활용하는 것이 의미있는 이유다. 265쪽



17. 마르크스, 알튀세르



이처럼 노동이란 본래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운 자기실현의 수단이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것이 바로 노동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노동은 괴로운 것,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으로 치부하는 걸까? 272쪽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사회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생산관계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존재 방식인 토대가 되고 그 위에 계층에는 법률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상부구조로서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즉 먼저 경제적 토대가 있어야 비로소 그에 맞는 정치 · 법률 · 문화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77쪽



우리는 사회가 인간이라는 주체의 총체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의사를 초월한 구조가 지닌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쟁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개인과는 전혀 관계없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는 주체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조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282쪽



18. 데리다, 들뢰즈




지금까지는 대화언어,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 내면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며 예크리튀르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실은 에크리튀르가 어떤 언어들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288쪽



'지금 여기'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서 떠나 확산되어 가는 에크리튀르를 내포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두고 데리다는 '다르다'와 '연기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differer을 이용하여 차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연'으로서의 나는 '지금 여기'의 구속에서 해방됨으로써 무거운 자의식이나 이기적인 사고로부터 해방된다. 290쪽


쓰인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차연'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무방하다. 오히려 그것이 바로 텍스트를 실천적으로 읽는 행위일 것이다. 이처럼 탈구축이란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대상의 내면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그 내부부터 스스로 파괴시키고 거기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291쪽



서양 철학은 그리스 이후로 자기동일적인 존재(이데아, 신, 이성, 진리 등)를 강조해왔다. 들뢰즈는 자기동일성은 배제의 논리로서 기능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성의 폭력이라고 설명한다. 292쪽



애당초 차별의식이란 이러한 이데아적 발상에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집단 따돌림 등의 가장 밑바닥에는 서로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본래 있지도 않은 실체를 절대시하는 왜곡된 사고법이 있다. 293쪽


우리의 경제를 구성하는 자본 · 화폐 · 상품 · 노동은 정치적, 법적, 문화적인 모든 요인을 포함하며 모든 것이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화폐는 그 욕망을 교환 · 순환시키는 장치다. 295쪽



자본주의는 욕망이 사상으로 구현된 것이다. 그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는 그 점을 절감하고 있다. 보고 싶은, 먹고 싶은, 채우고 싶은 다양한 욕망의 수요에 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형성된다. 예컨대 편의점은 온갖 욕망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견본 시장이다. 295쪽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스키조에 머물면서 파라노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그들은 노마드라 불렀다. 297-298쪽



노마드는 자기동일적인 것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방기한다. 그들은 닫힌 것, 굳어진 것을 잇달아 파괴하고 '도주'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 298쪽



19. 제임스, 듀이, 로티



프래그머티즘의 사고법은 실제적인 결과와 총계가 모든 일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딱딱하다'라는 것은 다른 물건으로 할퀴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무겁다'라는 것은 받쳐주지 않으면 낙하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이처럼 개념의 의미 내용을 대상이 초래하는 실제 결과로 생각하고자 하는 원칙을 프래그머티즘의 준칙(실용주의의 격률)이라고 한다. 304-305쪽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관계없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 자체가 진실이다. '회사는 지겨운 곳'이라는 당신의 생각은 진리다. 그리고 '학교는 지겨운 곳'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김없는 진리다. 당신이 세상의 모습을 창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부정적인 발상이라면 당신이라는 신은 스스로 시시한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307쪽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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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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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아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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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이모 토울스는 미국 보스턴 출신으로 예일대학교 졸업 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석사논문으로 썼던 프로젝트 단편소설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금융업으로 진로를 결정하여 투자전문가로 20년 동안 일하였다고 한다. 일하는 동안에도 종종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고, 4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첫 작품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시작은 다소 늦지만 그래서인지 더 신중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작품 하나 하나가 세공된 보석 같은 느낌이다. 


작가의 살아온 배경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처음 접했던 『모스크바의 신사』 도 그러했고, 이번 작품도 귀족적, 상류계층에 대한 실재적인 묘사가 꽤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인물 또한 실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강점이 있다. 대단한 자료조사와 더불어 본인이 겪고 접했던 부분들이 들어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인물이 사는 집 속 소품 하나, 옷 재질 하나 세심한 손길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당연스럽게 분량은 어마어마하게 나올 수밖에 없으며, 덕분에 인물과 배경에 대한 정보나 묘사가 늘어나 더 생동감 있게 인물을 표현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대단한 장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도한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해주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잔잔한 울림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문장도 있었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여러 번 담금질 하고 또 정밀하게 세공한 후에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완성시킨데에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글을 쓰는 작가들 모두 각기 다루는 주제적인 측면들이 다르지만 결국엔 창작하는 이로 하여금 그와 가까운 것부터 다루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다수의 평론가들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개츠비'를 많이 언급하였는데 왜 그런 언급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짐작 가능하다. 하지만 역시 그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 결이 어떻게 다른지 잘 설명하지 못해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만.

이는 추후 피츠제럴드 작품을 다시 찾아 읽어봐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는 1966년, 중년의 나이가 된 케이트가 남편 밸과 함께 참석한 뉴욕 사진전시회에서 옛 연인이자 인연이기도 했던 팅커 그레이의 사진을 발견하고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한 불빛과 재즈, 열정의 음악으로 가득한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 플래시백 효과처럼, 사진 한 장을 통해 격동과 혼란의 시대 1930년대를 회상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1938년 뉴욕, 여기 세 남녀가 있다. 동일인물이 여러 이름으로 호명되는데, 자주 불리우는 이름으로 말하자면 케이트, 팅커, 이브가 되겠다. 주로 말하고 있는 화자는 이민자의 딸이자 노동 계층인 케이티(캐서린)이다. 열아홉이 된 그 해부터 법률사무소에서 비서(속기)로 성실히 일하고 있으며, 하숙하는 곳에서 만난 룸메이트 이브(이블린)와도 소울메이트처럼 잘 지내고 있다. 그런 그들 앞에 젊고 매력적인, 장래가 유망한 은행가 팅커 그레이가 나타나고, 이들 사이에는 사랑과 우정의 얼굴을 한 채 미세한 균열이 일게 된다.


세 사람은 우정을 빙자한 만남으로 그동안 감춰오기만 했던 대담하거나 시시껄렁한 꿈에 대한 생각과 말들로 웃고 떠들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상류사회로의 진출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으로 인해 겉으로는 예의있고 선을 지키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억눌려 있던 팅커는 소로의 <월든>을 무인도에 가져갈 물건으로 꼽는 케이트에게서 호감과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파란의 소용돌이 중심에 선 인물 앤 브로딘이 있다. 그의 대모로 소개된 앤 브로딘은 남성 사업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며 흔들림 없이 자아를 지켜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세 사람 사이에는 어느 순간 사소한 자리 다툼이나, 미묘한 신경전 같은 질투가 싹트기도 한다. '셋'이라는 불완전한 숫자에 언제든 한 명은 떨어져나가 정리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행은 그렇게 불현듯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케이티와 팅커의 미묘한 기류를 감지한 이브는 그들 사이에 자신이 끼여들기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우연히라도 따로 만났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렇게 위태로운 상태에서 세 사람이 탄 차는 뒤에서 달려오는 트럭으로 인해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조수석에 앉았던 이브는 충격으로 깨진 유리창 밖으로 튕겨나가게 되는 바람에 얼굴이 짓이겨져 큰 흉터가 남게 된다. 운전석에 앉았던 팅커는 이 불행한 사고로 인해 생긴 이브의 상처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그를 부양하고 곁을 지키려 한다. 사랑이라는 전제를 가진 남녀 관계라기 보다 함께 큰 일을 겪고 난 후 생긴 끈끈한 전우애처럼, 의리만 남은 이상한 관계 속에서 끝끝내 행복한 결말을 오지 않는다. 


이들의 위태로운 관계는 헐리우드 드림을 꿈꿨던 이브가 사고 이전의 비범했던 면모를 되찾으며 떠나는데서 마무리된다. 비록 얼굴에는 큰 흉터와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를 하게 되었지만 용기가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떠날 수가 있었다.



한편 두 사람 사이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던 케이티는 여전히 열심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그 사이 다른 인연을 하나 둘씩 맺게 된다. 팅커로 인해 이브와 케이티 모두 사교계 인사와의 만남과 파티를 통해 사교계 진출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관련한 관계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때론 거짓과 오해를 여지로 두며 부유한 귀족계층의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이브가 꿈을 쫓는 인물로 묘사되는 반면 케이티는 똑같이 꿈꾸는 열망은 있으나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노동은 필수적인 것이었고, 먹고 사는데에 더 중점을 두면서도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 위한 연기와 거짓말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이는 보기 좋게 들어맞아 어떻게서든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가 낯설고 새로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지적인 매력을 충분히 발휘하기에 퍽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람을 대할 때면 상대방이 원하는 의중을 잘 파악하고 이를 적절하고 과하지 않게 표현하여 입밖으로 내뱉기 때문에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욕망은 결코 잔잔하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승진을 앞두고, 전망없는 출판사지만, 원했던 곳에 들어가기 위해 대담한 연기를 했던 것처럼. 그리하여 소개로 들어간 출판사에서 편집자 역할을 가장한 비서일을 하면서 자신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게 강단있고 멋지게 느껴졌다. 이는 그가 사람의 감정과 관계성에 대해 기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그도 팅커에게만큼은 속수무책인 태도를 보인다. 팅커에게 끌리고 있지만 애써 참고 인내하였으며, 이내 두 사람이 함께 하고자 했을 때 다시금 닥친 위기에 격분하였고, 차분함과 이성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팅커의 형인 행크는 돈이 궁하지만 자신의 그림을, 예술을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진중한 태도를 지녔던 윌러스는 케이트와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책임감에 더 가까이 다가섰으며, 별다른 목표나 목적은 없지만 천진난만했던 명문대생 디키는 순수한 애정과 마음으로 케이트의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이며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케이티의 여러 인연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강렬한 이끌림이었으나 안타까움만 남게 했던 팅커보다, 편안했고 꾸밈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던 윌러스가 기억에 남았다. 첫 인상은 다소 퉁명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수줍음도 많았으며 다시 재회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인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케이트는 그에게 사격을 배우는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키우게 되기도 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 흐르는 묘한 긴장감이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며 펼쳐질 앞날을 기대하게 했다. 물론 읽는 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에선 웬일인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속 다아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냉담한 태도와 겉모습에 오해가 있었지만, 리지에게는 그 누구보다 진실된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처럼. 케이티에게 윌러스가 그런 인물 같았다. 수줍어하는 태도에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고, 별다른 호감도 보이지 않았기에 금방 단절될 관계로 보였으나, 다시 재회하게 되었을 때 케이티는 그 어느때보다 안정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고 충동적이며, 혼란했던 화려한 배경 속에 파묻혀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찾고자 했던 여러 인물들이 당시 시대적 상황을 대신해서 표현해주고 있다. 신분으로 나뉘는 차별과 인종 차별도 여전히 존재했음을 신문 속 사교계 인사란이 별도로 있는데서, '검둥이'라며 일상적으로 표현한데서, 잘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오랜 집필 기간을 거쳤다고 하는데 정말 그 시대를 대변해주는 1930년대의 정수를 보는 듯한 작품이었다. 여기에는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욕망과 그로 인해 지켜야 할 규칙들로 결국은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인물도 있었으며, 그런 욕망을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는 길을 찾는 선택으로 행동하는 인물도 있었다. 무엇이 됐든 결국은 다시 희망을 찾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안도하였다. 가독성이 좋아 읽는 즐거움도 아주 컸고, 당시 유행했던 음악, 그리고 예술작품에 대한 견해, 자주 등장했던 디킨스와 헤밍웨이의 작품은 언제고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언제나 그랬듯이 생각만..) 그래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루 갖췄다는 평에 기꺼이 동의한다. 이토록 훌륭한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부럽고 정말 대단한 작가이다.


셈세하고 아름다운 세계속에서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보게 되어 더할 나위없이 기쁜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작품도 당연히 기대가 되지만, 이렇게 신분사회에 대한 주제로 나아갈 거라면 작가가 그리는 또다른 세계 또한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도 든다. 당연히 상류계층은 제외하고 말이다. 어찌됐든 이 바람은 조심히 한켠에 남겨두고. 오늘은 Billie Holiday의 Autumn In New York을 들어야 할 것 같다.



**



하기야 그런 변화를 이해하기 힘든 것도 아니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세상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서 주머니에 든 동전까지 챙겼다. 유럽은 가난한 친척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문의 문장만 남았을 뿐, 식탁을 제대로 차릴 수 없는 존재.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비슷비슷한 나라들은 우리의 학교 교실 벽을 장식한 지도 속에서 햇빛을 받는 도롱뇽처럼 막 잽싸게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 참이었다. 10쪽




요람처럼 아늑하게 흔들리는 지하철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조심스레 꾸며놓은 표정이 슬그머니 벗겨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생각이 걱정거리와 꿈 사이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초자아가 녹아내린다. 13쪽



이건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을 고를 때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골탕 먹일 의욕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66쪽



따라서 상대가 좋은 질문을 던졌을 때 최선의 대응책은 주저하거나 억양에 변화를 주지 말고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다. 77쪽



나는 손을 빼내서 그의 매끄러운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모든 것을 참아내라는, 인내에 관한 훌륭한 조언에서 위안을 얻었다. 128쪽



대화 중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일보다 책을 읽는 한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더 꺼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 기묘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부분이다. 설사 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 멍청한 로맨스소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133쪽



증오에 물든 사람은 상상력과 용기를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시간당 50센트를 버는 사람은 부자에게 감탄하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면서, 시간당 임금이 자기보다 1센트 많거나 1센트 적은 사람에게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혁명이 10년마다 한 번씩 세상을 휩쓸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193쪽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209쪽



우리 사이의 로맨틱한 상호작용은 진짜 게임이 아니라, 수정된 버전이었다. 두 친구가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도 보내고 조금 실전연습도 할 겸 해서 만들어낸 수정판. 299쪽




하지만『월든』에서 지금까지 항상 내 곁에 머무르는 구절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소로는 진리가 멀리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 멀고 먼 별 뒤에, 아담이 태어나기 이전과 심판의 날 이후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 모든 시대와 장소와 일들이 모두 지금 이곳에 있다.”‘지금 이곳’에 이토록 찬사를 보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만의 별을 따라가라는 권고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말도 별을 따라가라는 말만큼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도달하기가 훨씬 쉽다. 372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한 것보다 원하는 것이 더 많아요.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필요한 것이 원하는 것을 능가하는 사람들이에요.” 414쪽



“우리가 자신과 완벽히 맞는 사람하고만 사랑에 바진다면, 애당초 사랑을 둘러싸고 그런 소동이 벌어지지도 않을 거야.”477쪽



옛 친구를 이어 잊으리, 어이 다시 생각지 않으리.*


하지만 가끔은 옛 친구를 잊어버리고 다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인생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몇 년마다 한 번씩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던져버리며 빙빙 돌아가는 원심분리기와 같다. 그러다가 이 원심분리기가 멈추면, 우리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삶이 들이미는 수많은 새로운 걱정거리에 둘러싸인다. 507쪽


* 노래<올드랭사인>의 가사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여행보다는 허니문 브리지와 더 가깝다. (…)

게임을 하면서 카드를 하나 뽑으면 그 카드를 그냥 갖고 다음 카드를 버릴 건지, 아니면 먼저 뽑은 카드를 버리고 그다음 카드를 가질 건지 곧바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탁자 위에는 우리가 뽑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내린 결정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517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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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가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4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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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본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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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 미스터리 중에서도 애정하는 해미시 맥베스 순경시리즈가 근 일년만에 신작이 출간됐다. 트위터에서 접한 현대문학 편집자님의 데스크 사진에서 『각본가의 죽음』 이 꽂혀 있는 걸 보며 설레어 검색해보기도 했다. 코지 미스터리는 정통 추리물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지만, 사건의 크기와 무게 등과는 상관없이 흥미로운 인물들과 관계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현실이 지루하고 피로할 때는 이런 작품들 속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아무 생각없이 그저 관망하는 것만으로도 큰 재미와 위안을 주기에 찾게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 플롯 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인물간 애정전선이 아니겠는가. 작품 속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같이 수다떨듯 읽어나갈 수 있으니, 이만큼 재밌는 구도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에피소드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솔직히 좀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일단은 반갑다. 다음 편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더 기다려야 하지만, 다음이 있음을 감사하기만 하다.

                                                                                                                                                                                                                                           

이번 『각본가의 죽음』 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70대 탐정소설 작가 퍼트리샤 마틴브로이드에게 그의 작품인 『만조의 사건』을 드라마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오며 시작된다. 그러나 작품을 더 쓰지 못했던 그가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다시금 새 작품 집필의 꿈과 자신의 작품을 더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게 된 기회가 생긴데에 대한 부푼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을 때 소위 방송국 놈들의 작당으로 전혀 다른 색으로 바뀌어간다. 



소설 속 지적인 귀족 탐정 레이디 해리엇 비어는 중년여성이었으나, 드라마에서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자유연애주의자이자 히피 귀족인 인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계약서에 이미 서명 완료한 작가는 더이상 극에 개입할 수 없도록, 온갖 유혹의 말들로 구술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어진 갈등 속에서 방송사에 신뢰로 인해 지대한 영향을 가진 각본가 제이미가 온갖 밉상, 진상짓과 갑질로 인해 제작 과정중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제이미를 죽인 범인으로 주인공역 배우인 퍼넬로피의 남편 조시가 지목되면서 사건의 국면 전환을 이루는 듯 했으나, 자신을 억압하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이 인물은 갑작스럽게 고약한 심보를 보이기 시작하고, 곧 두 번째 살인사건 피해자가 되고 만다.  해미시의 활약으로 돌고돌아 결국 범인은 밝혀지게 되지만, 알게 모르게 찝찝함이 남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시리즈의 공통적 특성으로 여전히 모두의 노여움과 미움을 사는, 마땅히 죽어야 할 인물이 등장하며, 해미시와의 애정전선으로 엮이는 매력적인 여성도 있고, 해미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로흐두 마을의 풍경 묘사 또한 있었다. 다만 프리실라의 부재로 그와의 투닥거리는 케미를 볼 수 없는게 좀 아쉬웠다. 런던에 체류중인 프리실라는 이야기 진행에 있어 전혀 등장하지 않았고 잠깐 통화로만 그 존재감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이번 에피소드 내내 바람 맞게 된, 짠한 해미시에게 왜 프리실라 같은 인물이 짝으로 설정되어 같이 등장하였는지,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새삼 실감하였다. 이상하게 읽어나갈수록 프리실라가 없는 해미시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지 사람 특유의 고약하고 심술궂은 유머와 위트도 있었고, 허술하고 직관적인 수사방식과 떠보기식 취조도 있었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슬럼프에 빠진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로 해미시는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둥이로 소문날 수밖에 없는 어설픈 이 남자의 미남자로 표현된 외관이나, 재치있는 성격도 빛을 바랜 느낌이 들었다. 프리실라 외에 다른 여성이 등장하여 그와 엮일 때도 느껴지는 소소한 긴장감과 재미가 있었는데 그게 모두 상실된 느낌이었다. 오히려 목사 부인으로 자신의 개성을 억압당하며 살아와야 했던 아일린이라는 인물이 아마추어 영화 제작 등에 도전하며 독립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그의 꿈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데 위안과 발판이 되어준 그의 우정이 깨진게 조금 안타까울 정도로.



이렇듯 해미시가 애초에 야망이 없는 인물로 설정되었기에 가지는 매력도 있지만, 이제는 스트래스배인 본부로 파견을 나가든, 진급을 하든 성장을 하는 모습도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비슷한 설정으로 시리즈가 나열되려면 상황이 전환되는 시점도 필요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로 한 마을에서만 사건이 일어나기엔 공간적 한계가 있을 뿐더러 결국은 인근 마을이나 외지인의 방문으로만 사건이 발생되어야 하는데, 비슷한 플롯 나열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고, 지지부진한 연애전선은 긴장감 없이 그저 널부러져 있다는 인상만 주기 때문이다. 



직관적이지만 사람의 내면을 날카롭게 꿰뚫어볼 줄 알았던 해미시가 이번엔 영 맥을 못 추는 느낌이 들었다. 경질당한 블레어 경감 대신 잠깐 등장한 러브레이스 경감에게 지적을 당하여 풀이 죽은 채로 눈치를 보는 모습에, 블레어 경감에게 심술궂게 대처하던 해미시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이쯤되면 해미시와 블레어 경감 사이 지독한 관계성이 되레 또다른 재미로 다가온다. 그가 가진 능력에 한에 상사로써 신뢰와 호의를 보이는, 멀쩡한 인물로 보이는 데이비엇 총경이 상사로 있을때 앞으로 한발자국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경찰직에 대한 스스로의 적성과 자질을 고민하는 부분이 있는 걸 보아 다음편 에피소드에서 해미시는 좀더 생기 있고, 더 심술궂은 태도로 프리실라와 투닥거리면서, 어슬렁 마을을 배회하며 사건을 해결해줄거라 믿는다. 



사견으로 최근 우연히 접한 예전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의 기후와 풍경을 보게 되었다. 한번쯤 찾아 보기도 했어야 했는데, 이번엔 운명처럼 접한 그 영상물을 통해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기후와 가파르고 광활한 지대의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다워 지금껏 읽어왔던 해미시 맥베스 순경시리즈의 이전 작품들을 다시금 읽어보면 또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앞으로는 가상마을인 로흐두이지만 그 배경에 대한 묘사와 특유의 분위기를 좀더 잘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아직까진 읽을 수 있을 기회가 더 많을테니 역시 다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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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야말로 지구상의 쓰레기로 간주되는 인간들이 아니던가.   37쪽



처음에는 아일린도 그에게 맞섰지만, 남편은 갈수록 난폭하고 공격적으로 변해 갔다. 결국 그녀의 개성은 천천히 그의 개성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분노한 그가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상황에 또다시 직면하느니, 굴복하고 포기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220쪽



"남편들이야 늘 화가 나 있는걸요. 그게 그 사람들 천성이에요. 그리고 우리 여자들 천성은 남자들이 그러는 거에 콧방귀도 안 뀌는 거고요."

아일린의 뇌 속 어딘가에서 반란의 작은 불꽃이 번뜩였다. 아일사는 늘 "우리 여자들"이라고 이야기해서 외로운 목사 부인이 남편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자유연대의 일원이라고 느끼게 했다.   223쪽



해안가를 따라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저녁 빛에 고요한 로흐두가 이전과 똑같아 보인다는 사실에 일종의 경외감이 들었다. 어선들은 통통거리며 항구에서 협만 쪽으로 빠져나가고, 아이들은 조약돌이 깔린 해변에서 뛰어놀았으며, 산세는 맑은 공기 속에 솟아올라 있었고, 사람들은 늦게까지 여는 파텔 씨의 잡화점에 드나들었다.    241쪽



대체 해미시 맥베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352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독자단 3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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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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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메리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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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 미국적인 것들이란?



아디치에의 네 번째 작품 『아메리카나』의 큰 틀은 단순하게 보자면 연애소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애소설의 얼굴을 한 인종차별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야기 속 화자는 이페멜루와 오빈제로 현재와 과거의 시점에서 교차되며 서사가 진행된다. 소울메이트 같은 두 사람이 중학생 때 처음 만나 사랑이 빠지고 미래를 함께 꿈꿨지만 상황에 따라 멀어졌다 다시 재회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당시 나이지리아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 곪아터진 문제가 곳곳에 발생하여 대학은 파업하여 문 닫는 날이 지속되었고, 이에 이페멜루는 주변의 도움과 권유에 따라 SAT 시험을 보고 75% 장학금을 받기로 한 것에 감사하며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 즉 아메리칸드림을 꾸기 시작한다. 떠난 자와 남겨진 자의 이야기 같았으나, 미국에서의 삶과 문화를 동경하던 오빈제는 결국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돌아와 나이지리아의 거물이 되기에 이른다.



지나치게 강박적이고 헌신적인 종교활동에 맹신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아버지. 군사 정부의 거물로 장군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내의 정부가 된 우주 고모까지. 이페멜루의 주변 환경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우등생이었지만 딱히 꿈이나 목표가 뚜렷하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재력과 힘을 가진 남자에게 기생하는 우주 고모의 삶의 형태를 혐오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일어서보려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페멜루는 어떤 측면에서는 타인의 티끌과 같은 흠을 아주 크게 보고, 자신의 흠은 모른 체하는 그저 그런 약은 인물로 보일 수 있으나,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진 데는 단순히 외관에 대한 묘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한 지적에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이나 생각, 고민 등을 해본 적이 있나보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저 다른 이가 겪었던 일화들에게 대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공감하고 같이 감정이입한 약한 분노만 있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지점은 다양하겠지만, 어떨 땐 나의 삶의 형태나 관심사에 따른 것이기에 순수 한국인, 즉 한국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경험과 이해는 직접 경험한 것과 알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차이로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겪어본 적이 없으니 와 닿지도 않고 관심이 가지도 않는 것이다.



어떤 창작물에서든 무조건 주인공(화자)에 이입하여 보는 사람인 나 역시 이페멜루가 겪는 타국에서의 소외감, 차별과 고단함에 같이 분노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유색인종이 받는 차별보다 유색인종 여자가 겪는 차별까지 더해진 걸 보며 더 답답해졌다.



이페멜루가 십년 이상 미국에서의 삶을 유지하며 이룬 것들만 보더라도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회 보장 번호를 임의로 사용하여 생활했던 시절보다 잘생기고 낙천적인 부유한 백인 남자친구의 전화통화 하나로 해결되는 일이 더 큰 기회가 되었다. 반면 오빈제 역시 어머니의 도움으로 영국에서의 비자를 얻어 잠시 머무르게 되었지만 다른 이의 국민 보험 번호를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의 생활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도 등록금과 월세를 내는데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무수한 일자리 면접을 봤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마지막 벼랑 끝에서 할 수 없어 선택한 어느 테니스 코치의 긴장을 풀어주는 일이란 이페멜루 스스로를 갉아먹고 상처 입히는 일이었고, 자신이 더럽혀졌다는 수치심에 안식처와도 같은 오빈제와의 연락도 끊게 되었다.



오빈제 역시 처음엔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해야 했고, 위장결혼을 하며 시민권을 얻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었고, 부유한 거물이 되기까지 주변의 투자와 도움이 있어야 했지만, 두 인물 모두 나이지리아에 돌아와 가지게 된 생활수준을 보면 차이가 아주 컸다. 물론 이페멜루가 자신이 살고 싶었던 곳에 집을 얻었고, 그동안 쌓은 이력으로 거짓말 조금 보태 잡지사 일자리도 구했으며, 이년치 집세를 미리 낼 수 있을 만큼 재정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야기 속 여자들은 왜 늘 남자의 재력을 기대해야 하는 것인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이페멜루가 자신의 친구를 염려하며 지적한 블로그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젊고 매력적인 여성은 대개 부유한 거물들의 애인일 것이라는 암시는 불쾌하고도 씁쓸한 현실이었다. 지적인 인물로 묘사된 대학 교수 블레인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해고 위기에 처한 경비원을 위한 시위활동을 하는데에 이페멜루가 다소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경비원은 그에게 성추행, 성희롱을 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페멜루가 인종에 대한 문제를 생활 깊숙이 뼈저리게 느끼고 이를 표현하게 되며 블로그를 통해 세상에 대해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후원금과 광고 요청, 인터뷰, 강연까지 활동의 저력을 넓혀가며 잠시 동안은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간 강연에서 진지하게 인종에 대한 문제를 말할 때면 찾아오는 침묵은 그런 인종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포지션, 즉 포즈만을 원했던 위선이라는 걸 알게 된다. 실망스럽지만 겪어보지 않는 문제에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열성적으로 외칠 만큼 트인 사람이란 얼마나 될 것인가.



흑인 대통령의 당선에 대한 열망, 설렘, 기대 등에 대한 언급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벅찬 일이었을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인 독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저 조용히 차분히 읽어나갈 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서평에 잘 알지도 못한 정치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는 친일파인데다, 한국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곤 전혀 없이, 암울한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허울만 좋은, 이미지 메이킹이 잘 된 인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데 여기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미국계 아프리카인, 아프리카계 비미국인 등 또다시 나눠 각자의 입장에서 은연중에 행해지는 차별에 대해 뭔지 모를 회의감이 들었다. ASA(아프리카인 학생 협회)과 BSU(흑인 학생회). 미국에서 태어난 사촌 디케는 어느 모임에 들 수 있는 것일까 자문하는 이페멜루를 보며 태어난 배경에서도 계급이 나눠지는 것에 대한 씁쓸함 때문이었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서울공화국이 아닐까?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해 터전을 잡고 사는 사람은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살기 힘들 테니 말이다. 형이상학적인 집값에 서울에서 태어난 것도 스펙이라는 말에 너무 공감이 간다.



다시 돌아와서 이들은 결국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딱 맞는 반쪽이기에 재회가 반가웠지만, 오빈제는 이미 번듯하게 이룬 가정이 있었다. 물론 자신이 휘청거릴 시기, 갑작스럽게 얻게 된 부가 부담스럽고 낯설게 느껴져 이를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아 줄 사람이 그때 만나게 된 코시였을지라도. 그들에겐 사랑스러운 딸 부치가 있었다.


서로가 애틋하고 강렬히 원하는 관계성이라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관계이므로 끝은 언제나 엇갈리고 깨지게 될 것이라는 예감과 다르게 서로를 위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페멜루의 타국에서의 생활로 참담하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통스럽기만 했던 시절에 대한 내용이 전반적으로 펼쳐진 1권보다 어느 정도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고 스스로에 잘 알게 된 때의 두 사람의 생활을 다룬 2권이 더 술술 잘 읽혔던 것 같다. 과한 이입은 이렇게 괴로운 것이다.



인용된 블로그 「인종 단상 혹은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비미국인 흑인의 별난 생각」 글은 실제로 작가가 운영했던 블로그 글로 읽어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차별에 대한 말과 행동들의 예시가 나와 있다. 그 부분만 읽어봐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생활 가까이 느끼는 인종차별에 대한 일화만 보더라도 말이다.



이 작품을 통해 ‘차별’ 이란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종, 성별 상관없이 모두가 사람으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데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신분이라는 형태만 사라졌을 뿐 계급사회의 성격은 여전하다. 그게 아니라면 갑과 을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재산의 급에 따라 생활수준은 왜 차이가 나는 것인가. 단순화하여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사회’ 라고 칭하는 요즘엔 ‘미래’ 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면 모두에게 똑같은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유연한 태도와 사고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함부로 대하고 차별할 권리란 없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을 잘못 악용하여 선동질하는 무리에 휩쓸리며 부유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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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떻게 자기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는 게 가능할까? 블레인은 그녀가 줄 수 없는 것을 필요로 했고, 그녀는 그가 줄 수 없는 것을 필요로 했으며 일어날 수도 있었던 미래의 상실을 슬퍼했다. 19쪽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확신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자기 인생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를. 43쪽



오빈제는 나중에 알게 된다. 거물들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할 뿐이라는 것을. 47쪽



약간 부유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 앞에서, 부유한 자들은 굉장히 부유한 자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돈을 갖는다는 것은 돈에 사로잡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됐다. 49쪽



그 밖에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곤 바싹 마른 취업난의 황무지로 굴러 들어가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희망에 굶주려 있었고, 자동차들은 땀 흘리며 기나긴 주유소 줄에 며칠씩 서 있어야 했고, 연금 수급자들은 연금을 지급하라는 늘어진 현수막을 들고 있었고, 대학 교수들은 파업 재개를 알리기 위해 모여들었다.  82-83쪽



그녀는 이미 신붓감 심사를 위한 의례를 따르고 있었다. 세상이 아니라 그에게 순종을 약속하는 미소를 머금고, 그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졌을 때 몸을 던져 받아 냈으며, 그에게 맥주를 더 따라 주었다. 197쪽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 고국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흐릿한 추상적 공간이 되었고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자신이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쪽



그들은 서로에게‘곧’이란 말을 자주 했는데‘곧’은 그들의 계획에 뭔가 현실적인 무게를 실어 주었다. 201쪽



세상은 거즈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사물의 형태를 볼 수 있었지만 또렷이는, 절대 또렷이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오빈제에게 자신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것들,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세세한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222쪽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움에서 비롯된 조롱, 공허한 장소가 다시 충만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비통한 열망에서 비롯된 조롱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이페멜루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236쪽



이페멜루는 훗날 알게 될 것이다. 킴벌리의 눈에 빈민들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가난은 빛나는 것이었다. 가난이 빈민들을 성스럽게 만들어 줬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사악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성인은 외국인 빈민들이었다. 254쪽



이페멜루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의 자선심에는 그녀가 동조할 수도 없고,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치스러움이 있었다.‘자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흥청망청 자선을 베푸는 행동은 아마 자신에게 어제가 있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듯 했다. 286쪽



그녀는 고마운 가운데서도 약간 분했다. 커트가 전화 몇 통으로 세상을 재배치하고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뭔가를 쓱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341쪽



<2>



고된 외국 생활로 인해 신뢰할 수 없고 심지어는 험악한 사람으로 변한 친구나 친척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질기디질긴 희망과 자신만은 예외라고 믿고 싶은 절박함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만, 자신처럼 의리 있는 친구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만 일어났다고 믿게 만든 것일까? 43쪽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에 사로잡히는지, 무엇에 수치심을 느끼는지 무엇에 끌리는지를 알고 싶었지만 소설 몇 편을 읽고 나서 실망했다. 중요한 것, 심각한 것, 급박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이 아이러니한 무의미함으로 용해되어 사라졌다. 57쪽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무서운 깨달음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견고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지만 손대는 것마다 전부 무(無)로 변한다는 깨달음이었다. 105쪽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단단한 돌에서 잘 익은 토마토가 튀어나올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그녀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어지러운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자신 속으로, 낯설면서도 낯익은 존재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257쪽






(이 리뷰는 출판사 민음사의 '아디치에 소설읽기'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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