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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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







‘시요일’ 30만 독자가 사랑한 박소란의 신작시집 

닫힌 문을 두드리며 건네는 다정한 인사


 2009년 등단 이후 자기만의 시세계를 지키며 사회의 보편적인 아픔을 서정적 어조로 그려온 박소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사회적 약자와 시대의 아픔을 개성적인 어법으로 끌어안았다”는 호평을 받은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고,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 ‘시요일’ 이용자들로부터도 특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


 

**

 


■ 물기 어린 나날들


삶의 기본 구성요소인 것 같은 ‘슬픔’은 여러 얼굴을 하고서 존재하는 것 같다. ‘울음’이란 것만 해도 힘찬 생의 기운이 실려 있거나, 비통의 무게가 담겨 있듯이, 각기 상황과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문득 서글퍼지는 순간들은 무수히도 많다. 울컥하고 터지는 슬픔을 애써 억눌러보기도 하고, 또 부러 외면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를 버텨내고 이겨내고자 하는 건 곧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의 처음 문을 여는 시 <벽제화원>만 해도 읽자마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된 순간부터 이 세상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문득 되살아난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함께 했던 순간의 행복함이 떠오르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에 어느 때부터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삶의 시간은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11쪽, <벽제화원> 중에서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직접적인 단어나 표현이 등장한다 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차분하고 덤덤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울컥하는 감정과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메이는 걸 ‘목이 자란다’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 사이 등장한 ‘슬픔’은 흩어져 있는 시어들을 한데 엮어주고 서로 잘 맞물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목>). 


문틈에 새어들어 온 ‘빛’은 곁에 머무르는 듯 싶지만 이내 멀어지고, 어두운 얼굴은 나를 부르고, <검정>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시적 자아는 <검정>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끝끝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검정’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내면이 가지는 근원적 고독 혹은 부정적인 마음, 혹은 구멍처럼 뚫려 있는 공허 등등 모두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역시 생활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사람 사는 모습, 살림살이 대체로 다 비슷하단 생각에 특히 공감이 갔다.


우리의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여러 상황들이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계단 오르는 것에 대한 버거움을 ‘발목을 붙잡는 손’이 있다고 말하며, <상추>를 구입하며 ‘좀 건강해지려고’ 하고,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하는 것. 또, 추운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있다면 ‘어떤 슬픔에도’ 무던히 잘 견뎌낼 수 있고,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에 옆집에서 건네준 설익은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고장난 저녁>)도, <오래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지긋지긋한 먹고 사는 얘기’를 나누는 것 모두 보통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

어온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74-75쪽, <전기장판> 중에서




시적 자아는 서글프고 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한다. 슬픔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말은/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을 잃고 난 후/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잃어버렸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삶이든 어느 한구석에 자리한 틈이란 게 있을 것이고, 허락하지 않아도 비집고 들어선 존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순간 마주하면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닫힌 문’을 두드린다.


 


말해보세요 당신,

우리가 어떤 슬픔을 저지른 것인지

슬픔은 왜


또 끝끝내 아름다워지려 눈물을 감추는 것인지



67쪽, <말해보세요> 중에서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

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64-65쪽, <감상> 중에서

 


■ 사랑, 다정한 인사



닫혀 있는 공간으로의 진입, 그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여는 행위가 이뤄진 데는 ‘그저 누가 있을 것만 같아서’라는 이유를 바탕으로 한다. 


문을 열고,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는 것, 혹은 낯설지만 친숙한 누군가에게 막연한 다정한 마음을 가지며 인사를 건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손잡이가 돌고 도는 사이/손들은 너무 쉽게 뜨거워지고’ 마치 사랑을 하는 사이에 온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은 손으로 치환된 손잡이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 


휘청거리는 공간에서 붙잡고 중심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렇게 ‘손잡이가 돌고 있는 사이’에 화자는 ‘문 저편/그럴듯한 삶을 시작해’(<손잡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며, 감추고 있는 것을 차마 내보이지 못하지만, ‘양말을 벗어본 적 없는 내가/너의 곤한 맨발을 오래 들여다보는’(<양말>) 것처럼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싶고, 너를 향한 고요한 응시를 하고 싶은 것.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삭은 깍두기 접시를 가운데 두고 함께 밥을 먹는 새벽‘(<가발>)의 소박함, 두 개의 뚝배기가 전해주는 온기야말로 진짜라고 말하는 사랑. 서로가 가진 벽을 허무는 일은 ’누가, 그 누가/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벽>) 온 것과 같다.



사랑을 말하는 자아는 골목의 풍경도 모두 살아 있고 빛나는 것들로 보게 되고, <불쑥> 왔다가고 아무런 예고 없이 고백하고 싶기도 한다. 그렇게 갑자기 피어난 마음은 가까이 다가서기를 주저하기 않고, 오히려 더 무방비한 상태 그대로 거리를 좁혀가는 적극적인 태도도 보이고 있다. 그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척박한 삶 속에서도 담아낼 수 있는 고운 마음이 있다는 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려는 의지가 있다는 게. 


혹은 개인이 가지는 고독의 색채가 짙어져서 역으로 그런 빛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양말을 벗을 수 없다

이 속에 죽은 발톱이 있다고


고백할 수 없다

어둡고 습한 것 불길한 것이 있다고

나는 있다고



48쪽, <양말> 중에서

 


 


곁에 없는 당신

지금 당신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고, 빈방에 들어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주저앉은 당신은

구겨진 얼굴을 감싸 쥐고서 아무도 모르게 운다

 

그런 당신 곁에 나는 조금씩 있을 수 있다고


 

53쪽, <마음> 중에서

 


우리는 자주 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무방비의 감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활짝 펴 불을 쬐는 시늉을 할 때가 많았다

(…)

 

불을 끄려면

불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고


 

68-69쪽, <불이 있었다> 중에서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95쪽, <모르는 사이> 중에서 


 

■ 살아있다,는 감각.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새기기도 한다.


공중에서 떨어졌지만 부서지지 않는 ‘나’는 ‘벽돌’을 닮았고(<이 단단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고 멈추지 않으며, 숨 쉬고 있‘고, 괜찮아, 라고 답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기 위해’ 아무도 내 시계를 모르게 한다(<시계>).


흔한 웃음소리와 표정을 하고 있지만 텅 비어 있고, 버리는 일에 골몰해있는(<깡통>) ‘나’는 ‘약을 사 들고 달려가는 밤’(<약>)의 숨소리에서, 때로는 ‘걷는 있는’ 것에서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계속 걸어‘가며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걸어오‘고 무심코 ’우측보행을 하는 것‘(<천변 풍경>)과 같이 습관처럼 행해지는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은 되살아난다.


때문에 '살아 있다는'는 감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다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순간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 있는 척 행세를 했던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웃거나 분노하거나 다시 슬퍼하기도 한다. 어쩌면 생의 감각이 발현될 때는 몸에 밴 습관들처럼 그 찰나에 나타나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무수한 익명의 그리움이 떠올랐다. 상실을 겪게 되었을 때 그가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시간들에 대해, 이를 직면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시적 자아를 보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인사를 건네고, 잊으면 그만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과거의 멈춰진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염려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들에 미련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도 모호한 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두 괜찮다, 라는 자기 최면을 걸어 살아갈 뿐 정말 괜찮은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답답하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채로 이렇게 살아 있으며, 살아갈테니 말이다.



(…)

 

숨이 터져나온다 골목 곳곳 익은 숨이

밥물처럼 흘러 흘러넘쳐

때 낀 밥그릇을 껴안고 잠든 개들을 깨운다

개들을 향해 헐떡이며 짖어대는 나의

그림자 짙붉은

나는 살아 있구나


나는 살아 있구나

이 활활한 것을 어서 가져다주어야지



72쪽, <약> 중에서

 


고작 감기일 뿐인데 죄송해요

울먹이면서

멀쩡히 잘 살아갑니다, 실없는 꿈속에서


어디야? 전화를 받지 않는 엄머

거기 먼 집

닫지 못한 문이 있고 여태

늦된 겨울을 건너다보고 있을 엄마, 감기 조심해

 


125쪽, <독감> 중에서



잊으면 그만인 것

 

잊을 수 없다

상자는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죽은 엄마라면

알 것 같다 상자의 안과 밖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129쪽, <선물> 중에서



 **


 

이렇게 또 다시 비루한 서평을 쓰려는 시도를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듯 싶다.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걸 보니 말이다. 



박소란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어느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시인분들이 직접 나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고, 낭송하고. 이에 디제이 분들이 시 한 편을 골라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는. 그렇게 들었던 시인의 목소리가 일단 너무 좋았고, 낭송하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콕콕 와 박히는 듯이 인상 깊었기에 바로 시집을 구해 읽어보았다. 물론 내멋대로 그냥 읽어보는 것이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시 속 세계 분위기랄까, 부족한 표현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말하지만, 그저 좋다는 느낌 뿐이었다. 실린 시들 하나같이 삶, 그리고 생활과 연관된 것들인데 그 안의 폭은 깊고 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었고, 진솔한 느낌을 주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시어들이 한데 모인 듯 하지만 오히려 현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고, 여운이 남았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되고 슬픈 현실이 서술되는데 공감이 가면서 위로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참 뿌듯하고 행복하겠다, 싶은 동경과 함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진한 파동을 일게 하였고, 하물며 시집 제목 자체가 『심장에 가까운 말』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후로 박소란 시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따끈따끈한 신작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에는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저 명명되었을 뿐이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열고 마는, 삶의 진창에서 마냥 아파하는 게 아니라 낯선 이에게 막연한 다정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온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리운 존재를 그리워하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는. 


물기 어린 슬픔은 여전하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줄 그런 시들로 가득하다. 정말 덤덤하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네준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심신에 시의 온기를 나눠주는 고마운 시집을 더불어 나누듯 누군가에 꼭 선물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역시 참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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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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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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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기억의 작가’ ‘페라라의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숨은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1958년작. 단편집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과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바사니의 경장편 소설이다. 


『금테 안경』을 두고 이탈리아 작가 엘사 모란테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의 하나”라 했고,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아마도 바사니의 최고작일 것”이라 극찬했으며, 안드레아 카밀레리는 2000년 바사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페라라의 위대한 작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았다. 또한 이탈로 칼비노는 이 작품을 읽은 직후 프랑스 세유Seuil 출판사의 프랑수아 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사니를 “요사이 등장한 이탈리아 작가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작가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했다.  (출처: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작품 속 주인공은 페라라의 성공한 의사 아토스 파디가티다. 온화한 성품의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의사이자,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신사이다. 페라라 시민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며 잘 살아가던 이 신사에게 사람들은 문득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이렇게 훌륭한 성품의 인물이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말은 많이 모일수록 점차 사실화가 되는 바 소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예로, 파디가티의 성향이 동성애자라며 수군거리게 되었고, 어느새 납득하게 되었으며, 곧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시대적으로 구속받는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그 어느 하나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 선량한 신사에게 모욕을 주고 농락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매력적이지만 오만한 젊은 청년은 고통과 상처만 주는 존재이다. 자신이 대단한 인물인양 착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에 매혹되는 어리석은 존재가 또 인간이기도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연인이라고 지칭될 수 없는 관계 속에 얽매이고 한줄기 희망도 품었다가 친숙한 사람들 앞에서조차 욕보이게 되고, 종국엔 비참하게 버림받는 인물, 파디가티는 초반에 묘사된 모습과 달리 줄곧 당황하고 상처받고 휩쓸려 끝끝내 비극적인 선택을 남기게 된다.



이런 파디가티에 대해 말하고 있는 화자인 ‘나’는 이 중년 신사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고 곧 친구가 된다. 관찰자이자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던 ‘나’ 역시 페라라에 사는 시민이자, 볼로냐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고, 또 유대인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기에 언제고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나는 반유대주의적 인종법 시행을 앞둔 1930년대 어두운 시대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절망에 잠긴다. 무솔리니 파시즘 체제가 들어선 1920년대 이후, 체제의 위기의식 없이 안일한 동조를 하며 살아가던 유대인 공동체는 갑작스러운 인종법 시행 발표 관련하여 배신과 당혹에 휩싸인다. 반유대주의라는 반복되는 역사의 불안함에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는 나와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쓸쓸한 중년 신사 파디가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떠돌이 개 한 마리.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 공간은  페라라와 볼로냐, 리초네, 다시 페라라로 이동하는데 서사를 전개하는데 각각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특히 해변 휴양지 리초네에서는 쌓여있던 갈등과 긴장감이 표출되어진다.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 느끼는 고독감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갈수록 더 짙어지는데, 과연 그들이 그 안에 속해 있었을 때에도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이 두 인물은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 속에서 위선과 경멸에 휩싸인 시선과 시대상에 맞물려 폭발하는 시점을 마주하고, 이내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모든 서사는 직접적인 사건들로 존재하지만 표현방식은 직유든 비유든, 에둘러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더 유려하고 비극적인 인상을 남기는 듯 하다. 어두운 밤거리, 고독한 두 인물의 배회랄까, 그리고 그 마지막은 매우 쓰기만 하다. 



머릿수로 결정되는 무리의 가치관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자신들이 믿는 게 옳다는 신념으로 확신하는 태도,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외면하는 태도 말이다. ‘그들’과는 엄연히 다르고, 더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모든 게 평화롭게 수용하는 세계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이렇게 삭막하게 위태로운데 작품 속 시대에는 얼마나 더 숨 막히고 참혹했을지 가히 짐작도 가질 않는다. 


바사니의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데, 그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하나같이 좋은 문체라고 칭송하는 데는 이러한 태도가 뒷받침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모순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요소와 그가 느꼈을 심리적 요소가 부합되어 특유의 문체가 완성되었을 것 같다. 차분하고 담담하면서도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극과 모순된 태도에서 아름다운 문체가 발현되니 역시 문학은 행복한 삶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아픔이 있고, 좌절과 절망이 있기에 이를 위로하고 위안을 주기 위해 글을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



빛을 등진 그의 모자는 날벌레 무리에 둘러싸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드높은 가지 위의 거대한 새처럼 걸터앉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로 한 점 한 점 득점 수를 외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공평한 심판이라는 자신의 임무에 몰두한 채 그 위에 머물렀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하루하루 밀려오는 지독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91쪽 

 


자신을 멸시하는 연인으로 인한 그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백하자만 그의 마음을 가늠하는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연민보다 혐오감이었다.   97쪽


 

매우 가까운 장래에 그들, 이교도**들은 칠팔십 년 전에야 마침내 우리가 벗어났던 참담한 중세 구역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다 또다시 우리를 떼거리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겁먹은 많은 짐승들처럼 철책 뒤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거기서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111-112쪽


**Goi, 유대인 입장에서 비유대인, 이교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 히브리어로 ‘백성’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Goy로 쓴다.


 

(…) “이처럼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도 다분히 동물성이 존재하는데, 과연 인간이 복종할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것을, 단지 한 마리의 동물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123쪽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142쪽




** 덧붙이며

매우 늦은 후기이지만 고마운 이웃 연꽃폴라리스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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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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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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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에는 시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 읽기 어렵다는 편견도 있었고, 세상 살기 팍팍하니 단순하건 복잡하건 이야기 속에 몰두하고 싶었고, 숨어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이름으로 인해 다시금 시를 읽어 보았다. 사실 잘 읽어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시인의 강연을 들었을 때, 곧 시집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시기에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한 편 한 편 읽어갈수록 피 흘리는 시적 자아를 보며 마음 아팠지만, 역시 나희덕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어떤 글을 통해 서정이 사라진 시대라는 평을 본 적 있다. 사회가 변해갈수록 문단 내 분위기도 글 쓰는 작법도, 추구하는 세계도 자연히 변화하기 때문에, 긴 산문시가 유행했던 시기가 지나면 다시 짧은 시가 등장하게 되는 것처럼. 시 속 주체도 점점 해체되고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전복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이입됐고, 때론 알 수 없는 허공에 머무르기도 했다. 


시적 화자라는 표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그 존재가 유령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던 시도 보았던 것 같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시들을 읽는 게 어렵게만 느껴졌고, 다가서기 어려워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시인의 말했던 것처럼 이는 어쩔 수 없는 발화였고, 생존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혼란했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믿기지 않은 사건 사고가 연일 터지는 현실 속에서 말더음이처럼 더듬거리면서도, 발 딛고 서 있기 위해 조심스레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신직시집 『파일명 서정시』는 그런 측면에서 기존에 표현했던 방식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섬세하지만, 좀더 거칠고 뿔뿔이 흩어져 파편화됐으며, 날 것의 그대로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시인의 내공과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자연히 표현되었기에, 막연한 거부감이 들지 않게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이다. 



비극의 상처, 인간다운 것이란


표제작인 <파일명 서정시>는 냉전기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째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을 소재로 차용한 것이다. 시대를 퇴보했던 지난 정부의 만행으로 인해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는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시인 역시 그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다. 이에 질문을 던져본다. 서정을 노래하는 게 어떻게 불온한 게 될 수 있나, 그것도 지금 이 발전하는 시대 속에서 말이다. 라이너 쿤째가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시인 역시 시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맞물리듯 구성된 이 시는 다른 시대 속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라이너 쿤째와 시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료집에 기록되어 있을 법한 라이너 쿤째에 관한 것들과 시인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나열된 요소들이 그러하다.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18쪽, <파일명 서정시> 중에서


이와 더불어 역사 속 비극과 현실 속 재난과도 같은 비극,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았지만, 결국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고, 어디에서든 유령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위안부 소녀들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재(人災) 세월호로 인해 어이없이 갇혀버린 아이들까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비극의 상처로 인해 다친 영혼들에 그저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현실이 더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인간다운 게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사실 지구상 가장 잔혹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츠가 72개의 사물을 두고 스스로 대상화 하여 관객에게 정해진 안에 사물들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한 퍼포먼스 <Rhythm 0>. 그리고 그 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상이 된 예술가는 온전히 그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퍼포먼스가 끝나자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습성, 폭력성을 비롯한 비참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역사 속에서도 있었고, 현실에서도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을 보면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잔혹 행위에 대해 할말을 잃게 된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인간다운 게 무엇인가. 


색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검은색 위에 더 짙은 검은색이 내려앉을 때/검은색이 비로소 한줄기 빛이'(69쪽) 되는 것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은 어떤 것인지, 착취하고 때때로 절망하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모순적인 존재인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부표 하나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라 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사이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 사이에서 

41-42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들린 발꿈치로

한번도 온전히 제 땅을 밟고 서보지 못한 발꿈치로

44쪽, <들린 발꿈치로> 중에서


그래도 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입은 열어두어야 한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돌아올 수 있도록


바다 저 깊은 곳의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50-51쪽, <문턱 저편의 말> 중에서


마음을 소등한 자에게만 보이는 

희미한 빛은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68쪽, <마크 로스코> 중에서



가려진 이름들, 여성


얼마 전 기사에서 노벨물리학상 역사상 여성연구자 수상이 55년만이자, 세 번째라는 소식을 보았다. 시대가 변화하고 여성의 언어에 대한 목소리가 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분법으로 성별에 따른 경계로 나누는 게 아니라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존재들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성으로 대체됐던 여성의 언어는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고, 그러한 변화가 반갑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요원하다. 상대적으로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잘 알지 못하기에 잘 말할 수는 없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측면에서 뜨악했던 부분들에 대해 알게 되고, 인지하게 되는 순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여성의 언어를 이야기할 때, 시인의 소재로 차용한 <슬픈 모유>라는 영화는 시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충격적이면서도 슬픔과 분노가 함께 일었다. 영화는 페루의 수도 리마 근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파우스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전의 참혹한 시기에 테러범들에게 강간을 당한 임신부들이 아이를 낳으면 모유를 통해 어머니의 공포가 아이에게 전염되어 영혼없이 태어나게 된다는 게 바로 '슬픈 모유'병인데, 파우스타는 자신이 이 병을 앓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이다. 혼자서는 길을 잘 걷지도 못하고, 벽에 바짝 걸어야 하며,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자신의 질 속에 감자를 넣고 다닌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묻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파우스타의 모습 또한 그리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과 행위들이 도사리고 있다. 때론 이용당하여 오염된 여론으로 또다시 상처받게 되기도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듯 하다 두 세 걸음 다시 밀려나기도 한다. 역지사지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포가 무수히 많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한 번쯤은 헤아려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결국은 모두가 잘 살아가기 위한 길을 찾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마담 뀌리가 처음으로 추출해낸

0.1그램의 라듐처럼


희고 빛나는 것들

그러나 검게 산회되기 쉬운 것들

25쪽, <라듐처럼>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 기울어지는 난파선이니

깜박이는 불빛으로 다른 난파선을 비추는 눈동자이니

가라앉은 손을 잡는 또 하나의 손이니


어서 들어오세요

우리의 피로 빚어진 붉은 텐트 속으로

33쪽, <붉은 텐트> 중에서


엄마라는 타인의 고통 속에서 

나는 태어났어요

감자 덩굴에 매달린 작은 감자알처럼


노래로 치욕을 견뎌낸 여인

그녀가 낳은 핏덩이는

세상에 던져진 채 간산히 살아남았지요

81쪽, <슬픈 모유> 중에서


이제 누구의 아내도 아닌

늙은 소녀


그녀의 주름 속에서 튀어오른 물고기들은 이내

익숙한 고통의 서식지로 돌아갔다


주름은 골짜기처럼 깊어

펼쳐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84쪽, <주름들> 중에서



죽음, 그리고 노래하는 것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생처럼 죽음도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개의 씨앗에서/삶과 죽음은 두개의 떡잎처럼 돋아'(80쪽)났기에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과 같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히 찾아오는 죽음, 갑작스러운 죽음 모두 살아있었기에 이뤄진 것들이다. 하지만 난 늘 남겨진 자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고하고 어이없는 희생부터 스스로 선택한 죽음마저 그 후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이기적이게도 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삶의 의미도 알 수 없고, 무기력한 마음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그렇게 멀리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내일 당장 뭐 먹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욕망과 욕구는 생존 여부를 앞서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반면 죽음을 떠올림으로써 살아갈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확실한 한 가지는 삶과 죽음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과도 같다는 것이다.


시인은 죽음을 다양한 모습으로 소환했다. 죽음은 쓸쓸하고 무력한 것이지만 그 끝엔 언제나 노래가 남아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시인만의 새로운 서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노래가 가지는 힘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하거나, 한 줄기 희망을 염원하기도 한다. 또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도 한다. 시인이 호명한 탄센은 고대 인도 가수이자, 설화 속 인물인데 목소리의 힘만으로 자연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는 간신들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불의 노래를 부르게 되고, 뜨거워진 강물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지만, 그의 딸이 부른 비의 노래를 통해 점차 불길이 잦아들어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잿더미 속 남겨진 노랫소리에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살아있기에 부질없을지라도 희망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53쪽, <이 도시의 트럭들> 중에서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숨은 것이다

잦아들던 숨소리와 함께


숨은 숨이다

74쪽, <숨은 숨> 중에서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94쪽, <마지막 산책> 중에서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12쪽, <심장을 켜는 사람> 중에서


나이-톰보-톰보, 그곳은 사막에 있지

알타이족은 영혼이 사막을 건너간다고 믿었지

사막에 옛 노래가 울려퍼지면

그제야 죽음이 임한 걸 알게 된다지

112쪽, <나이-톰보-톰보>중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노래의 힘으로 죽음의 사막을 거넜던

알타이 샤먼들처럼

114-115쪽,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중에서



**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얼음조각 상처는 서른세개 동사들 사이에서 부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흘리게 하면서도 다시 태어나기를 종용한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이걸 '변화'로 읽어보았다. '서정'의 다른 얼굴로 표현되고 있는 이번 시집은 때론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한 면을 가둑 채운 ‘둠’이라는 글자는 마치 하나의 감정처럼, 어둠 속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이건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내면에 쌓인 상처들에 고통스러웠지만, 곧 딱지가 입고 새 살이 돋아나며 익힌 변화들. 

스스로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러일으킨 발화이다. 세상 곳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삶과 죽음은 한 개의 씨앗에서 돋아’나기에, ‘한 열매가 대지로 돌아간 그날에’언젠가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된다. 더 이상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반복된 실수는 점차 사라져야 할 것이다. 결국 부딪히게 되면서도 포용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익숙하지 않다하여 배척되어선 안 될 일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다. 그렇게 된다면 이내 삭막해보이는 세계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감돌 게 될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처럼.








(이 리뷰는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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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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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령』






**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작품은 그 본질과 더불어 존재론적인 질문도 함께 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건 혈연 즉, 가족이라는 관계성에 자리하고 있다. 악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인물이 영원성의 종결을 결심했을 때, 재회한 '가족'으로 인해 다시금 생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을 살해한 범인, 고요한 자세로 현장에서 체포되어 곧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고 1심에서 형을 받아 살고 있는 남자. 수감번호 474번으로 불리는 남자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어느 하나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남자이다. 행위의 목적을 묻는 여론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행한 범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목적이나 원한도 없다며 무심한 태도를 보이지만, 몸에 생기는 작은 상처에는 민감하게 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곧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성 질환의 일종인 선청성 무통각증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의문이 해소된다.


수감자 474번 말고도 담당 교도관인 윤을 비롯된 다른 주변 인물들 역시 각자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특히 윤이라는 인물은 474번 남자와는 다른 결의 ‘악’의 성질을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관망하는 것을 즐기는데, 그 상황인즉 타인의 고통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윤을 비롯된 다른 인물들 역시 각각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있어서 겉보기에만 좋은 모습으로 포장하려는 위선적인 태도가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한 일면으로 다른 교도관들과는 달리 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여 놓고도 용서를 구하거나 변명을 하지 않는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듯 호기심이 가진다. 남자가 가진 배경이나 본질,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그러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다른 그 누구보다 더. 

  

누가 더 악한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악은 어떻게 탄생되고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게 주력한 목적 의식이라면 곁가지로 등장하는 문제는 바로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아 인지 못하고 있었지만, 알아보니 우리나라는 사형 제도가 폐지된 것이 아니었고, 다만 수년간 집행되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하는 게 바로 이 작품의 뛰어난 특징이 아닐까 싶다.

  

남자는 그렇게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신해경이라는 인물과의 만남 후에 자신의 사형 집행을 촉구하기 이른다. 여기서 윤의 역할이 크게 작용되는데, 두 사람 사이의 엉킨 오해와 상처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도 순수한 호기심에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남자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보지만, 이미 세상의 관심과 여론은 죄질에 따른 법집행에 대해 뜨겁게 불붙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폭주하듯이 또 다른 사건이 발생되고, 결국 뒷맛 씁쓸한 결말 만을 남기게 된다.

  

신해경과 남자와의 관계성, 신해경을 자신의 누나이자 친구이자 엄마라고 불렀던,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누나에 대해 원망과 좌절을 품고 있었던 남자의 근원에 대해. 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한 사정을 이야기할 때, 신해경의 목소리로 발화하는데 너무 빈번하게 발생된 현실의 사건들로 인해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게 참으로 씁쓸했다. 아프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남자, 신해준의 삶보다도 더 비참했던 신해경의 삶이 모성으로만 직결되기엔 그 주체성 상실이 마음 아프게, 너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단단한 느낌의 어조가 잔잔한 호흡으로 이어졌고, 버석거리는 느낌의 문장들의 끝엔 물기가 어린 듯 했다. 생각보다 술술 읽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담긴 이야기에 비해 읽는 속도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의미로)걸리는 부분들이 많아서, 읽다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이 작품이 더 큰 여운을 남기는 듯 하다. 

  


그리하여 악은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



누군가 몰락하는 풍경을, 누군가의 비밀이 어떤 이유로 인해 탄로 나는 모습을, 후회와 절망으로 무너져 침 흘리며 우는 모습도 지켜봤다.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고, 인과에 참여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윤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고 선 앞에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윤을 사악하다 했고 어떤 이는 윤을 무섭다고 했지만 대부분 윤을 깔끔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좋아했다. 39쪽

  

  

엄지발가락 옆에 네 개의 까만 발가락이 흐물흐물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만질 수는 없는 모종의 형상. 그것들은 가벼운 연기 같고, 투명한 그림자 같고, 끔직한 악령 같았다.     46쪽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면 나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59쪽

  


시간은 하루 이틀 지나지 않고 기다림과 외로움으로 흘렀다. 어느 날 회색으로 변한 게딱지 위로 눈처럼 하얀 서리가 덮여 있었다. 마침내 받아들였다, 버려졌다는 것을.    81-82쪽

  

  

겁쟁이들은 저로 인해 강해졌고 원한이 많았던 자들은 저로 인해 원한을 풀었습니다. 그는 그 대가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사관들이 저를 유령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존재를 숨겨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나였습니다. '쁘리즈락', 그곳에서 저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여기 말로 '유령'이죠.     127쪽

  


러시아 사람들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겨울의 세계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몸도 마음도 말투와 음성까지 조금씩 얼음이 섞여 있습니다. 얼음 바다를 보신 적 없으시겠죠. 겨울이 오면 그들은 바다 위에 서 있습니다. 걷고 뛰고 뒹굴기도 하죠.   129쪽

  


그는 계속 미움과 그리움이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중얼거렸다. 나중엔 너무도 작은 소리로 들리지 않게 소곤거려 방 안엔 움, 이라는 희미한 울림과 떨림만 가득했다. 움. 움. 움. 132쪽

  


부서졌던 시간이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일그러진 그림. 기괴하고 조립된 얼굴. 한쪽은 웃고 있고 한쪽은 울고 있습니다. 떠나가고 버려지고.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고 싶고 죽이고 싶고. 두 가지 생각도 동시에 할 수 있어요.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 가지 감정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133쪽



투명한 물약 한 방울에도 피와 근육이 망가지고 녹아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가.   153쪽


  

실수였지만 대부분의 실수가 그렇듯 돌이킬 수 없었다. 사수는 죽지 않는 몸을 갖고 있었기에 고통 또한 사라지지 않고 몸에 남게 된다. 생명을 앗아가는 고통을 품은 불사의 몸. 그는 영원한 고통을 참다못해 자신의 죽지 않은 본성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175-176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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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선녀전 1~5 세트 - 전5권 (완결/박스세트)
돌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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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계룡선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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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무꾼의 재해석, 새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성된 『계룡선녀전』은 인기리에 연재된 웹툰으로 드라마 제작이 결정되었고, 바로 내일 11월 5일 tvN 월화드라마 9시30분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기 전부터 좋아했던 작품이라 그런지 막상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보통 이런 원작이 훌륭한 작품들이 영상으로 구현될 때의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첫 번째가 원작과의 싱크로율이기 때문이었다. 캐스팅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쩜 이리도 찰떡같은지, 문채원 배우로 결정되었을 때 이제 기대할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단아하면서도 현대적인 이미지 고루 갖춘 배우이기도 하고, 평상시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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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선녀전』의 예고편 보기

https://tv.naver.com/v/4220745




이에 앞서 『계룡선녀전』 이 완결이 되고 단행본으로 완간되어 이제는 종이책 읽기 즐거움을 더할 수가 있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고운 그림과 이야기를 소장하여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699년 전 날개옷을 잃어버리고 인간 세상에 묶여버린 선녀 탐랑성 선옥남은 나무꾼을 만나 혼인을 하게 되어 슬하여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점순이와 점돌이.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계룡산에서 선녀다방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다. 손으로는 초목을 춤추게 하고, 목소리로는 꽃을 흐느끼게 하며, 북두를 비추는 첫 별이자,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수목을 어루만지는 존재인 탐랑성. 탐랑성은 본디 물과 초목을 다스리는 선녀기에 그 커피 맛 또한  일품이었기에 가히 최고의 맛이라 묘사되고 있다. 직설적이면서도 독특한 이름의 커피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읽으면서도 그 커피 맛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하나씩 다 시음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추석 명절을 맞아 김금의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가는 길에 그의 권유로 동행하게 되는 정이현은 계룡산에 있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선녀다방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들의 인연은 다시금 시작된다. 

북두성님께 간절히 나무꾼과의 재회를 비는 선녀 옥남의 앞에 나타난 두 남자 중 과연 서방님이자 나무꾼은 누구인가. 
이원대학교 생물학과 연구원 김금과 같은 과 부교수인 정이현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다. 알려주지도 않은 점순의 이름과 선계의 꽃인 모래작약을 기억하는 까칠한 남자 정이현, 고운 심성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으로 선녀의 본래 모습을 보는 순박한 청년 김금. 과연 누가 선녀 옥남이 간절히 재회를 바라는 서방님의 환생일까, 분명한 것은 두 인물 모두 그녀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앞으로 『계룡선녀전』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나의 추리는 멋드러지게 빗나갔지만, 그 또한 너무 멋진 결말이었다.

『계룡선녀전』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행태에 보이는 것만이 다 진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순히 고전 설화의 재구성뿐 아니라 담긴 메시지 또한 매력적인 게 이 작품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야기의 구성이 훌륭하고, 전생과 환생, 그리고 현재의 삶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현재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상처 받은 마음들에 대한 치유를 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치유 웹툰이라 추천받기도 했던 작품이다. 








(↑↑↑ 사슴과 나무꾼, 본래 설화와는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었는지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 
이렇게 스포일러 하나 남겨본다.)





이야기가 진행되가는데 또다른 흥미로운 인물로 등장하는 게 바로 선녀의 자식은 점순과 점돌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늘나라와 인간계의 피를 반반 물려받게 된 점순에겐 신비한 힘이 있다. 여러 모습으로 환생하여 현재는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점순은 굉장한 창의성을 가진 아이로, 색다른 코드의 창작물을 쓰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호랑이의 손으로 타자치는 모습이 정말 재미있다. 일찍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던지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 500년이 지나서야 홀연히 알의 모습으로 나타난 점돌이. 알을 깨고 어떤 모습으로 환생할지 궁금증을 일게 한다.







정이현과 김김이의 만남으로 인해, 서방님을 찾았다는 기쁨으로 얼떨결에 서울로 상경한 선옥남은 김금과 정이현의 학교인 이원대학교 내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터주신 조봉대 부인을 만나게 된다. 탐랑성 선녀의 커피 맛에 반한 터주신은 그녀에게 자신의 카페에서 일하며 머물기를 권하게 된다. 그 덕에 묵을 숙소까지 얻게 된 선녀의 서방님 찾기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가 보았던 대로 그 인물이 간절히 찾던 서방님이 맞는 것일까. 흥미진진한 전개에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당장 내일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이 작품 덕에 당분간 월요병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참 눈과 귀가 다양하게 즐겁다. 좋은 읽을 거리, 볼 거리들이 넘쳐 나서 현생의 치열함과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원작과 드라마를 동시에 볼 수 있으니 같이 읽고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당장 내일부터 본방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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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선녀전』 하이라이트 보기

https://tv.naver.com/v/4400420



『계룡선녀전』 돌배 작가님과 특별 인터뷰 보기

https://blog.naver.com/wisdomhouse7/221387981765






(이 리뷰는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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