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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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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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작가가 정리한 고전문학 읽기에 대하여-



이 책은 각각의 작품속 특화된 주제나 성격에 따라 총 7개의 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근대, 야망을 다루거나 문학 이상의 역할을 한다거나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거나, 일상을 속속들이 보여준다거나 성장과 청춘을 말한다거나, 실존과 부조리를 다룬다거나, 문학과 정치,메타픽션을 분석한다거나 해서 말이다.


여러 시대를 걸쳐 고전문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데는 일단 가장 먼저 작품성을 들 수 있겠다. 몇 세기가 지나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읽는 이로 하여금 매혹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게 분명하며, 마음을 잡아 끌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신뢰가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시대에 쓰인게 신통방통할 정도로 지금 현실에서의 고민을 담고 있을 때도 있으니 결국은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여러 특장점에도 불구하고, 고전문학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유 또한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번역의 문제가 들 수 있다. 작품이 써진 언어의 뉘앙스나 행간을 번역을 통해 전부 전달받기에 한계가 있으며, 특유의 번역체 문장이 가독성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지만 현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작품이 써진 배경이 되는 나라나 문화 등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특히 길게 나열된 이름이나 복잡한 명칭, 사회적 분위기 등이 걸린다면 소화시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전문학에 대한 입문서, 안내서 같은 설명이나 감상이 담긴 에세이나 산문집이 참 다양한 것 같다. 고전문학을 읽고 싶지만 이에 어려움을 겪는 나와 같은 일반독자라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해설보다는 부드럽고 친절한 안내서들을 통해 도움을 얻기 좋을 것이다. 그것도 직접 번역하고 공부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가 쓴 글이라면 더더욱이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 김연경은 소설가이자 문학과 창작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했고, 관련 러시아 문학 작품 여럿을 번역한 경력이 있다. 앞선 서문에서 느낀 인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쉽게 전달해주는 발화 방식에서 일단 신뢰가 간다. 단정하고 성실한 느낌을 준다. 더 넓은 문학을 읽기 위한 노력을 했고, 이 책은 이러한 자신만의 독법과 생각을 정리한 독서에세이로 보면 될 것 같다. 책이 써진 배경, 주전부리같은 지식과 어떻게, 어떤 지점을 중점적으로 짚어 가며 읽어냈는지에 대한 포인트를 삼아 공략하듯 읽어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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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독법을 서술한 이 독서에세이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겪고 느꼈던 것들에 큰 도움을 준다. 작가의 성장배경이나 그가 삶속에서 추구하려 했던 가치나 열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요소들은 물론, 작품을 읽으면서도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이나 물음에 대해 나 혼자만 갖던 호기심은 아니었구나, 이런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더 알기 위해 읽었던 것이구나, 이런 갈증은 당연한 것이었구나, 하는 공감도 얻게 된다.


이를테면 괴테의 대표적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파우스트』 를 보며 가졌던 의문이 다소 해결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인간의 끊임없는 방황과 갈구, 욕망 등이 그의 인생 자체에서 드러났다는 걸 새삼 그의 삶의 배경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대 문학가들이 문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에 대해 갖는 견해가 각기 다른게 매우 흥미로웠다. 꼭 자신의 작품세계와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해석하였다는 걸 보는 게 또 다른 재미였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을 두고 논하는 부분이 그러했다. 이전까지 햄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진 어렴풋한 인상도 다소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을 읽는 묘미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사에서도 워낙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고, 지금까지도 당연스럽게 회자되는 작품을 쓴 주역인데 글을 잘 쓴 것도 모자라,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대중적 인지도와 풍요로운 삶으로 백년해로까지 했다니 너무 부러운 삶이라 배가 다 아플 정도였다.


반복되는 표현이지만, 어쩜 그렇게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의 성향이랄까, 특성이 맞닿아 있는지 새삼 글은 곧 창작을 하는 작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신으로 평생 살았지만 여성의 삶은 곧 결혼이라는 명제하에서만 존중받을 수 있었던 시절 속에서 구혼에 관한 소설을 써왔던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창작된 작품들 속 인물의 성격과 특징, 동화의 위치를 굳건히 했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열과 성을 다해 아부하는 삶을 살았던 안데르센, 빅토리아 시대 하층 계급에서 시작해 전형적인 신사의 삶을 이어갔던 동화같은 디킨스의 삶, 어설프고 촌스러운 매력의 체호프처럼 말이다.


일개 독자에겐 작품의 성격에 맞닿아 있는 작가의 삶의 형태가 재밌는 배경지식처럼 느껴져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곁들여진 저자의 생각이 구절구절 공감가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부분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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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 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조롱하는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52-53쪽



과연,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74쪽



“꺼져라, 짧은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84쪽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표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94쪽



우리는 모두 마지못해, 적어도 엉겹결에 태어난다. 이것도 억울한데, 태어나는 순가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죽는 순간도 알지 못한다. ( …) 고전들이 경고하듯 문제는 단순히 창조가 아니라 창조 이후, 즉 조물주(신/아비)와 피조물(인간/아들)의 관계이다. 자연-신의 입이 적어질수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도 커질 것임을 명심해야겠다.  101쪽



이 소설의 사상을 대변하는 이반은‘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입장에서 출발, 만약 신이 인간을 자신의 닮은꼴로 창조했다면 왜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3차원(유클리드)’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모순 앞에서 그는‘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아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근거로‘반역’을 선언한다.“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23쪽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암컷의 삶을 통해서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단, 그녀에게는 그럴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148쪽



작가는 작기이기에 앞서 현실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둔 생활인이라는 것,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전제이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는 물질적 토대, 즉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166쪽



마땅히 우화도, 그림 동화도, 그렇다고 소설도 아닌 이 매력적인 책의 장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하다.『어린왕자』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장르다. 247쪽



이렇듯『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를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266쪽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즉‘체포’와‘처형’, 그사이에 위치한‘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271쪽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글쓰기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무력한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인간의 산물’이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까. 

306-307쪽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 내랴. 311쪽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학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불한당들의 세계사』) 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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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생뚱맞지만, 지금 이토록 어지럽지만 혼란한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게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부와 계급 차이는 존재하지만, 과거 모든 유구한 역사를 지나 빛났던 작품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빛을 내며 생명력을 가지며, 많은 이들이 찾아 읽고 또 사유思하게 한다. 문학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당장 밥 벌어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데 갖는 물음과 생각에 아주 작은 실마리만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중에 내 삶은 여전히 퍽퍽하고 나아지는게 하나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이와중에 문학마저 몰랐다면 더 회의적인 태도와 허무함에 몸서리 쳤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흥미로운 것들이 참으로 많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쓰는 것도 참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버는 주체인 나는 과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과연 무의미하고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것일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하기도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의문을 갖고 방황하며 욕망도 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바로 그런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다른 작품보다 우선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읽고 싶은 작품이 더 많아졌다. 막연히 가졌던 어려움도 다소 해소되었다.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닌거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이전에 했던 숱한 다짐들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다. 실행력은 매우 더디겠지만. 일단 실천에 옮기는 걸로, 가지고 있는 텍스트 먼저 일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이 리뷰는 출판사 민음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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