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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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은 보르헤스와 추리소설을 교묘히 섞어 만든 깔끔한 오마주이다. 다시 말한다면 이 둘에 대한 일정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보르헤스에 대해서는 이름 석자와 읽어본 몇 편의 단편들에 대한 모호한 기억 밖에 없는지라 추리소설이라는 측면에서만 염두에 두고 읽었다. 그렇지만 재미는 오히려 보르헤스라는 인물에게서 느꼈다. 개인적으로 안락의자 탐정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은데다가, 이 작품이 가지는 필연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더 언급하기에도 모한 부분이라 생략..) 그래서 추리소설을 읽었을 때의 재미로만 따진다면 그렇게 재미있‰B던 것은 아니다.

반면에, 보르헤스라는 인물에 대한 오마주로써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보르헤스와 얼마나 비슷한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보르헤스라는 인물은 참 매력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회색 뇌세포를 이용하여 추리를 해나가는 안락의자 탐정의 모습과, 너그럽고 인상좋은 할아버지같은 넉넉함까지, 머릿속에 그려질법한 노대문호의 모습이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보르헤스의 단편들처럼,  길이가 짧고, 대화는 유쾌하면서도 문장 곳곳이 숨어있는 많은 상상력과 모호한 문장들은 보르헤스가 마치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나는 보르헤스에 거의 문외한 수준이지만, 보르헤스를 좋아하시거나 잘 아시는 분들에게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즐거움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한 가지 장점과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장점은 정말 공들여 책을 만든 티가 난다는 것이고-교열, 삽화, 주석까지 모두 만족스럽다.-단점이라면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비평이 실렸으면 한다는 점-나같이 보르헤스 혹은 추리소설을 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그리고 초기 미스터리의 걸작 리스트에 있는 특정 작품의 결말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를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추리소설 독자라면, 이 작품과 더불어 보르헤스가 직접 창조한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을 읽는 것도 기쁨일 것이다. 같은 방식의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점도 그렇고, 보르헤스가 창조한 탐정이라는 점에서 후대 작가에 의해 창조된 보르헤스와 비교해가며 읽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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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3-0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보르헤스에 혹해서 사려다가 내용보고 관뒀던 책인데, 랑데부님이 이렇게 얘기하시니 또 혹하네요. ( 팔랑귀) 전 보르헤스도 좀 알고, 추리 소설도 좀 아니, 읽어도 될까봐요. ^^

상복의랑데뷰 2007-03-0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잘 아시니 재미있으시겠네요. 전 보르헤스는 몇 편 읽어본게 다인지라...길이도 적당히 짧고 책 만듬새도 양호하고 재미도 있습니다. 워낙 많이 읽으셔서 걱정도 됩니다만, 하이드님의 구미에 일정 부분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7-03-07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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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여러 이슈 중에 가장 크게 오르내리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한미 FTA이다. 한국경제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장밋빛 전망부터, 영속적인 IMF체제라는 우울한 전망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지만....문제는 진행사항이 언론을 통해 서사적으로 공개되는 것 이외에는 FTA가 무엇인지, 한미 FTA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준비되었고 진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4대 선결 조건, PD수첩 등의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일정 수준의 정보가 공개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지만,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불황의 그림자와 기존 언론과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정치권의 찬성일색의 민관합동 구조에 의해 지금은 한풀 꺾였고, 그 가운데에도 한미 FTA는 진행되고 있다.

FTA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논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가치판단을 위한 정보수집일텐데, 일반인이 보기 어려운 학술논문이건 혹은 일반인에게 쉽게 풀어쓴 교양서건 간에 절대적인 양이 부족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FTA를 반대한다. 어떤형태의 FTA건 간에 준비부족만으로도 이 협상은 낙제감이다. 시험공부 한 흔적이 없는 애가 시험 100점 맞겠다고 떠드는 격이기 때문이다.

정부차원의 홍보글-노무현 정부의 장기인 콘텐츠는 없고 이미지만 풍성한 팜플렛, CF-로는 정보수집이 불가능하고, 신문의 일회성 기사, 컬럼이나 에세이 류를 제외하면 관련 자료는 거의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서 좀 찾아봤는데 예전 PD수첩의 보도에 따르면 FTA관련 연구가 일본은 1000여건, 우리나라는 단 3건이라고 했다. 나는 그 태만함과 뻔뻔함에 혀를 차긴 했지만 논문을 읽을 재주가 없어서 흘려들었고, 교양서 수준에서 검색해 보았다. FTA반대 쪽의 서적이 몇 권 있을 뿐이며, 찬성하는 쪽으로는 <한미 FTA 역전 시나리오>라는 책만이 검색될 뿐이다. 국민이 어찌나 우매한지 모르겠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FTA를 하자고 하는 것을 보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우석훈이 쓴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는 현재 볼 수 있는  한미FTA관련 교양서 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한다. <한미 FTA국민 보고서>가 더 충실하고 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교양서와 학술논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다 보니 일반인이 보기에는 버겁고, '미제' 등의 일부 표현은 솔직히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현 정부의 FTA협상 방식의 무능함에 반대하기 때문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비교적 오른쪽에 있는 일반인'을 설득하는데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차분한 가운데에서도 한미FTA의 문제점들을 묘사하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던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한 영화의 광고카피가 떠오를 정도였다. 추천사에도 있듯이 실무경험에서 오는 '현실'과 경제학자로서의 학문적 '이상'의 적절한 균형감각 역시 균형감각을 중시하는 나에게는 좋은 시도로 보였다. 그리고 특히, 한미 FTA에서 '87년 체제의 문제점과' 철학의 빈곤을 집어낸 통찰력 역시 높이 사고 싶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리뷰에서도 언급되어 있고, 이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피하고 싶지만, 책의 내용에 98% 이상 지지를 보낸다. 

다만, 아쉬운 2%에 대해서만 덧붙이고자 한다. 내 주위에서 들리는 6천만원 이하의 소득자는 이민을 생각하라는 말은 이 책에서 나온 경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경구를 본다면 왜 이런 결론이 나왔을까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데, 아쉽게도 이 책에는 그런 설명이 없다. 이는 한미 FTA 찬성론자들에게 포퓰리즘적인 선동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설사 저 계산이 사실이더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반대해야 하느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4인 가족 6천만이면 맞벌이 부부라면 각각 3천만이나, 보통 4천만-2천만으로 6천만에 근접하는 수입을 올리기 때문에, 오히려 찬성해야 하는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다. 약간 혼란스러웠다. 그 디스토피아가 설명되지않는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다른 장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통찰로 미루어볼 때 신뢰를 가지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를 기대한다. 또한 뒷부분으로 갈수록 약간 중구난방식으로 산만한 느낌을 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녹색평론에 실린 글을 묶으면서 생긴 필연적인 문제점이겠지만, 그래도 단행본으로 나올 때 일련의 수정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같이 정보가 부족한 가운데에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지지를 보낸다. 지금의 협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에는 백만%공감하고, 한미FTA를 해야하느냐는 긍정도 부정도 ™D불리 못하는 내 입장에서 최고의 해설서였다. 심정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더 많은 논문과 교양서가 나와서-찬성하는 입장도 간절히 바란다. FTA괴담 운운하는 기사는 이제는 보고 싶지 않다.-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능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야 말로 '참여'정부가 해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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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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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돈 카밀로와 뻬뽀네, 일명 신부님 신부님 우리신부님 시리즈가 추천도서나 혹은 권장도서 목록에 올라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 때는 일종의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시리즈였다. 덕분에 나도 별 생각 없이 읽었다. 나는 ㄷ사의 ACE를 통해 읽었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참 재미있게 읽었다. 예수님도 멀게 느껴지지 않고, 공산당=(잔인한) 빨갱이었던 네게 삐뽀네의 모습은 사람냄새가 나는 코메디언같은 느낌이었고, 그리고 신부님=김수환이던 내게 돈 카밀로는 신부복을 입은 효도르 같은 충격적인 느낌이었다. 그 밖의 마을 사람들이 등장해서 벌이는 촌극에서는 우습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사랑의 학교(쿠오레), <추억의 학교(나의 학교 나의 선생)>과 더불어 어린 시절에 읽은 최고의 이탈리아 소설이라고 하면 과찬이려나...

<까칠한 가족>은 이 돈 카밀로와 뻬뽀네 시리즈를 쓴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가족의 삶을 다룬 연작 에세이-소설집이다. 굳이 따지자면 사소설 정도 되려나? 소설로 보기에는 가족의 냄새가 진하고, 에세이라고 보기에는 저널리스트였던 죠반니노의 각색의 냄새가 진하다. 모 어느쪽이던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연작이지만, 내용의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부담없이 재미있는 가족의 이야기이다. 아마 우리의 일상적인 가족과는 다른 느낌이기에, 그 엉뚱함 때문에 입가에 미소를 지을 것이다. 화도 잘 내지만, 가족들의 말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아버지, 현실 감각이 부족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어머니, 조숙하지만 사려깊은 아들과, 영리하면서도 약간은 이기적인 딸의 4중주가 계속해서 펼쳐진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가치관과 생활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A가 당연한 대답일 듯한 상황도 B,C,D가 나올 때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신문이나 잡기에 기고된 글 위주다 보니 가볍게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그 가족 내에 흐르는 따뜻함과 상호 존중과 관용의 넉넉한 마음씨에 감동하게 된다. 엄격한 부모를 당연하게 여기셨던 나의 부모님들, 그리고 중동에 오래 계셔서 아버지의 부재를 아쉬움으로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는 참 부러운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완성된 인격체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부럽기까지 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답을 강요하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그 이전에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부모와 물어볼 생각을 하지않는 자식들을 보면서 커온-나도 이 범주에 어느정도 포함될 것이다.-나로써는 부럽기만 했다.

내가 언제 어떤 이와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기게 된다면, 최대한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보리라 싶은 모습들이 군데군데 묻어나온다. 이 책은 지금 읽어도 좋겠지만, 보관해 두었다가 내 가족이 생겼을 때 두고두고 꺼내두면서 읽고 싶다. 이렇게 재미있는 지침서를 놔두고 어려운 책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볍게 쓴 척 하지만, 배어나오는 깊이는 오래오래 갈 듯한 괜찮은 책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 다시 펼쳤을 때는 여기 묘사된 죠반니노 가족의 모습을 보며, 내가 지금보다는 인격적으로 성숙했음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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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철리 여자 동서 미스터리 북스 46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수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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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마이 네임 이스 아처>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배경은 언제나 끈끈하고 화려함이 없으며, 대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로, 류 아처 탐정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영감스러워지고 화려한 액션도 없고, 유머의 질도 챈들러 같은 사람에 비해서 빈약한 느낌이 든다."

내가 하루키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이 문장을 보고 <움직이는 표적>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또렷하게 떠올라서 쿡쿡 웃었다. 아마도 이 책까지 읽은 추리소설독자들의 모든 고백은 대부분 한결같다. <움직이는 표적>(과 <마의 풀>)은 별로였는데, <위철리 여자>, <소름>, <지하인간>으로 이어지는 3부작에서 아처, 혹은 로스 맥도날드의 가치를 발견하고 놀랐다라는 식의...100만 21번째 고백같지만 나도 그렇다. <움직이는 표적>의 아처는 해밋과 챈들러의 큰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오지 못한 데다가, 맨날 얻어터지고 납치나 실신 따위를 당하는 멋대가리 없는 지친 탐정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위철리 여자>에서도 이 경향은 그리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위철리 여자>를 읽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위철리 가를 둘러싼 비극적인 가족사가 충격적이서가 아니다. 루 아처의 진심이 사골국물처럼 절절하게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루 아처는 샘 스페이드처럼 위악적이지도 않고, 필립 말로처럼 고독한 영웅도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서 보기 힘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밝혀지는 등장인물들의 비루한 삶과 욕망들. 그것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낼수록 아처는 현실에 지치고 절망해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처는 분노나 실망감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결말부분에서의 대화는 압권이다.) 

 "거짓말도 자꾸 되풀이하다 보면 정신에 기묘한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이와 같이 몇 번씩 되풀이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진실이 된다, 나는 휘비가 내 딸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만일 휘비가 죽었다면 위철리가 슬퍼하는 만큼 나도 슬퍼하게 될 것 같다. 아내에 대한 위철리의 감정을 나는 이미 얼마쯤 나누어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런 따스함이 좋다.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현실에 지치고 버거워하면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맨날 얻어터지고 납치나 당하는' 것도 사실은 가급적 완력으로 해결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샘 스페이드나 마이크 해머였으면 완력으로 해결할 법한 상황도 그는 묻고, 설득하면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인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 이해간 것일 수도 있지만, 필립 말로라면 독설을 퍼부으면서 인정할 수 없었을 법한 상황도 그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는 희망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사건 해결에 대한 희망이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희망이건 간에. 다만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만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을 탐문수사를 통해 조금씩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느 한 중년 남자의 자기성찰이 보인다. 비록 위대한 영웅이나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을 통해 세상을 볼 줄 아는 통찰력과 이를 통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게 된 남자의 담담하지만 깊은 매력이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최대의 미덕이다. 로스 맥도널드가 별로라던가, 하드 보일드의 지나친 남성성에 질린 독자들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추신) 내가 이 책, 그리고 로스 맥도날드의 국내 출간작을 순서대로 읽기로 한 계기 역시 같은 에세이에 있는 구절 때문이었다. 평론가들에 따르면 가장 과대평가된 소설가 1위라지만, 오히려 나는 하루끼가 너무 많이 소개되어 오히려 과소평과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처 보아도, 인간이 살아 나가는 데서 빚어지는 안쓰러움을 억제된 필치로 잘 그려 낸 걸 엿볼 수 있다. 등장 인물은 모두 검은 모자를 쓴 느낌이고, 각자가 불행으로서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아무도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걸어가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로스 맥도널드는 계속 외쳐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남자의 묵묵한, 그렇치만 따뜻한 외침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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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천재들
김병기.신정일.이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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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이후 대중적 글쓰기, 혹은 특정한 교양서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커졌고, 그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의 필진들이 등장했다.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역사 부분에서 대표적인 저자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덕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2>,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평전> 등은 상당히 뛰어난 교양서였다. 이미 사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잘 정리한 수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워낙에 굴곡진 현대사와 역사인식에서의 보수성 때문에 그의 도전적인 자세, 그리고 깔끔한 필치 등으로 인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주욱 이어질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덕일 선생에 대한 기대치는 높은 편이다. 

그러나 <한국사의 천재들>은 실망스러웠다. 내가 알던 그 이덕일 선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구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나귀님도 지적하셨지만, 이 세 분의 공동저자가 가지고 있는 '천재'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일단 유보하자. 부족하지만,  서문의 제목대로 '진정한 천재란 시대의 상식에 맞서 싸웠던 이들이다.'라는 표현이 이들이 정의한 천재라는 가정 하에 검토해 보자. 상당수의 위인이 탈락감이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려고 해도 서희, 이규보, 정철, 황현 등은 결코 포함될 수가 없다. 명문세가인데 외교에 특출났던 서희가? 시대의 상식은 강호은거였는데, 권력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사화를 일으키거나(정철) 무신정권에 곡학아세를 했음(이규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시가를 남기면 천재인가?(훗날 서정주의 예를 보면 씁쓸하기 까지 하다.) 워낙 친일파가 넘쳐서 시대의 상식이었던 친일에 자살로 저항한 황현이 천재인가? 저자들이 정의한 '천재'라는 개념에 동의하느냐의 여부 이전에 이들이 선정한 위인들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인물선정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다 보니 구성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의 목차를 보자. 

1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 2부 하늘이 내려준 천재, 3부 시대와의 불화, 4부 신기의 문장, 글로써 세상을 아우르다.

순서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 제목만 그럴 듯하지 전형적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나열이다.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는 하늘이 내려준 천재가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대와의 불화를 겪은 천재는 시대를 뛰어넘었거나 하늘이 내려준 천재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엉뚱하게 4부에는 필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앞에 등장한 이이나 김시습 등은 문장력이 없었을까?

너무 멋을 부렸다. '한국사의 숨겨진 13명의 위인' 식의 가나다나 시대 순으로 나열했다면 이렇게까지 실망스럽지 않았을텐데, 보기 좋게 하려고 억지로 분류하고 억지로 꿰어맞추다 보니, 오히려 난잡해졌다.

더욱 실망스러웠던 것은 이 책의 서술이 보여주는 '지나친 묽음'이었다. 학술논문이 아닌 이상, 어렵고 딱딱한 글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서술 수준은 딱 국사 교과서 수준이다. 더도말고 덜도 말고 알려진 만큼만 보여주는. 그러면서 교양서를 자칭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실례다. (묽음을 자랑하듯이 참고문헌조차 없는 얄팍함-출판사의 얄팍함이겠지만-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왜 천재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이들의 삶을 연대기적 구성을 통해 약술할 뿐이다.

물론, 유득공, 이가환, 이상설, 이벽 등과 같은 인물들은 비교적 홀대받았던 인물들이니 연대기를 서술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치원, 김시습, 서희, 장영실, 이이 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유명한 위인일수록 위인전 요약의 수준을 보인다. 장영실을 다룬 글에서 가계에 대한 연구를 덧붙였던 것처럼 일반인의 상식 밖의 내용을 추가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굳이 여기서 그들의 요약된 삶을 읽을 필요가 없다. 너무 큰 기대인지도 모른다. 해당 위인이 왜  저자들이 정의에 걸맞는 천재인지조차도 설명되지 않은 글에 그 이상의 재미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처럼, 한국사에서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의 열전이었다면 이렇게 실망하지 않았으지도 모르겠다만, 이래저래 영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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