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철리 여자 동서 미스터리 북스 46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수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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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마이 네임 이스 아처>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배경은 언제나 끈끈하고 화려함이 없으며, 대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로, 류 아처 탐정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영감스러워지고 화려한 액션도 없고, 유머의 질도 챈들러 같은 사람에 비해서 빈약한 느낌이 든다."

내가 하루키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이 문장을 보고 <움직이는 표적>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또렷하게 떠올라서 쿡쿡 웃었다. 아마도 이 책까지 읽은 추리소설독자들의 모든 고백은 대부분 한결같다. <움직이는 표적>(과 <마의 풀>)은 별로였는데, <위철리 여자>, <소름>, <지하인간>으로 이어지는 3부작에서 아처, 혹은 로스 맥도날드의 가치를 발견하고 놀랐다라는 식의...100만 21번째 고백같지만 나도 그렇다. <움직이는 표적>의 아처는 해밋과 챈들러의 큰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오지 못한 데다가, 맨날 얻어터지고 납치나 실신 따위를 당하는 멋대가리 없는 지친 탐정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위철리 여자>에서도 이 경향은 그리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위철리 여자>를 읽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위철리 가를 둘러싼 비극적인 가족사가 충격적이서가 아니다. 루 아처의 진심이 사골국물처럼 절절하게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루 아처는 샘 스페이드처럼 위악적이지도 않고, 필립 말로처럼 고독한 영웅도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서 보기 힘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밝혀지는 등장인물들의 비루한 삶과 욕망들. 그것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낼수록 아처는 현실에 지치고 절망해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처는 분노나 실망감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결말부분에서의 대화는 압권이다.) 

 "거짓말도 자꾸 되풀이하다 보면 정신에 기묘한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이와 같이 몇 번씩 되풀이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진실이 된다, 나는 휘비가 내 딸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만일 휘비가 죽었다면 위철리가 슬퍼하는 만큼 나도 슬퍼하게 될 것 같다. 아내에 대한 위철리의 감정을 나는 이미 얼마쯤 나누어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런 따스함이 좋다.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현실에 지치고 버거워하면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맨날 얻어터지고 납치나 당하는' 것도 사실은 가급적 완력으로 해결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샘 스페이드나 마이크 해머였으면 완력으로 해결할 법한 상황도 그는 묻고, 설득하면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인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 이해간 것일 수도 있지만, 필립 말로라면 독설을 퍼부으면서 인정할 수 없었을 법한 상황도 그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는 희망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사건 해결에 대한 희망이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희망이건 간에. 다만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만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을 탐문수사를 통해 조금씩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느 한 중년 남자의 자기성찰이 보인다. 비록 위대한 영웅이나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을 통해 세상을 볼 줄 아는 통찰력과 이를 통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게 된 남자의 담담하지만 깊은 매력이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최대의 미덕이다. 로스 맥도널드가 별로라던가, 하드 보일드의 지나친 남성성에 질린 독자들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추신) 내가 이 책, 그리고 로스 맥도날드의 국내 출간작을 순서대로 읽기로 한 계기 역시 같은 에세이에 있는 구절 때문이었다. 평론가들에 따르면 가장 과대평가된 소설가 1위라지만, 오히려 나는 하루끼가 너무 많이 소개되어 오히려 과소평과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처 보아도, 인간이 살아 나가는 데서 빚어지는 안쓰러움을 억제된 필치로 잘 그려 낸 걸 엿볼 수 있다. 등장 인물은 모두 검은 모자를 쓴 느낌이고, 각자가 불행으로서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아무도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걸어가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로스 맥도널드는 계속 외쳐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남자의 묵묵한, 그렇치만 따뜻한 외침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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