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의 손바닥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윤덕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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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격 1세대. <살육에 이르는 병>으로 충격을 주었다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최근작. 일본의 신본격 작가군은 정상에서 미끄러진 작가들이라는 편견이 강하다. 내가 일본어 원서를 다 찾아 읽은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실 최근에야 소개된 몇 작품을 읽은 게 전부지만,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간접적으로 최근작이 나쁘다는 이야기만 줄창 들었기 때문이다.

편견을 머리에 얹고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이 작품의 트릭은 워낙 전설적인 작품의 트릭과 비슷한 구조라서 얼추 눈치를 챘다. 그리고 글솜씨도 무난무난했기 때문에 별 아쉬움 없이 읽었다. 수준작이라고 까지 말하긴 그래도 범작은 된다. 정확한 것은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어야야겠지만, 관 시리즈나 <점성술 살인사건>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멀어보인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 작품에서 보이는 작가의 태도였다. <살육에 이르는 병> 관련 리뷰를 보면, 작가의 도전적인 자세를 칭찬하는 분들이 많다. 엘러리 퀸의 '독자와의 도전'과 같은 자신만만한 태도 말이다. 물론 근 10년이 지난 세월이 지나서 처음처럼 열혈청년도 아니겠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작가가 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비슷한 부류라 할 수 있는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는 양이나 작가의 서술, 구조 등등에서 아직까지 '자신만만함'이 엿보이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맞짱을 뜬다기 보다는, 숨어다니면서 속이려는 태도로 일관한다는 느낌이다. 반드시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길이가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앙상하게 보인다.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단편으로 쓰는 것이 좋았다고 본다.

읽으면서 흥미진진했던 부분은 결말이 풀리는 부분이 아니라, 그 앞에서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처럼 현대기술을 이용해서 업그레이드한 트릭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는데, <유리 망치> 를 읽고 느꼈던 짜릿함을 느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사람이 활용하면, 충분히 멋진 트릭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부분. 그러나 아쉽게도 그 부분은 메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짧았다.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기 애매한 지대에 위치한 작품인 것 같다.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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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러브 레터 - 제인 오스틴 미스터리 1
로라 레빈 지음, 박영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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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지 않은 리뷰라고 생각되네요. 혹시 편견없이 이 책을 읽으실 분은 안 읽으시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문출판사는 여성독자를 타겟으로 한 추리소설을 내기로 방향을 굳힌 것 같다. 모스 시리즈의 출간이 계속 늦어지고, 대신 한나 시리즈, 그리고 새로 출간된 제인 오스틴 미스터리까지...모스 시리즈의 출간이 늦어지고 나름 엉뚱했던 한나 시리즈가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나 시리즈의 작품성은 일정 수준이었기 때문에 별 불만없이 읽었다. 여성주인공이 등장하는 코지 미스테리에 대한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름의 재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새로나온 <죽음의 러브레터>는 어떨까. 음..그렇게 나쁜 평은 듣지 않은 작품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제인 오스틴, 36세의 이혼경력이 있는 대필작가. 헐리우드로 간 삼순이라고 해야할까. 설정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줄만 했는데, 내용이 재미가 없었다. 주인공과 나 사이의 정서적인 벽이 워낙 커서 몰입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마초 캐릭터를 혐오하는 여자가 하드보일드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건가 싶기도 했다.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니 고마운 책일지도.)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한나의 순진한 호들갑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유머라고 보기에는 버겁고, 냉소라고 보기에는 호들갑이 지나치다고 해야할까? 작가가 의도한 어조에 일관성이 있지만, 그 어조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미스테리가 가지는 여러가지 요소들은 고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임펙트가 부족하다. 예를 들어, 대필작가라는 컨셉을 잡은 것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긴 하지만, 왜 사건에 관여하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스기무라 사부로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적어도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세밀한 심리묘사와 영리한 설정 덕분에 '누군가'가 봐도 자연스럽게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또, 여성이 주인공이다 보니 로맨스도 등장하는데, 그것도 역시 심심한 축에 속한다. 갖출 건 다 갖추었는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첫 작품만으로 쉽게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균이상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 같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해문도 찔끔 내고 마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번역자가 같다는 것이 심증을 더해준다.) 출간작인 모스나 한나 시리즈가 더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비공식적으로 모스는 출간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고, 뒤로 갈수록 괜찮아지는 한나 시리즈도 이번 작품이 마지막 출간작으로 보인다. 내가 코지를 좋아하지 않아도 이 작품만은 자석에 이끌리듯 읽게 되는데, 못내 아쉽다. 모스야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이 시리즈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나만큼의 재미나  실용성은 없어보인다. 추리독자층이 협소하고, 특히 그 중에서도 판매량이 적었음에 분명한 책들을 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만, '해문'이라는 이름 두 자 때문에 기대치가 높은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의 <사라진 시간>도 9월에 출간될 예정이라는 말을 들은게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니콜라스 퀸의 침묵의 세계>를 보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한나의 차기작이라도... 

추신) 사실 별 두 개를 주고 싶었지만, 내 편견도 한 몫 했으리라 생각해서 세 개로 마무리. 리뷰도 하나도 없고, 첫작품에 너무 박하게 군게 아닌가 싶은 '눈치보기'도 있었다. 호평은 좋게 읽은 다른 분들이 써주실 테니까라고 생각해서인지 나쁜 말만 남겨버렸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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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0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 시리즈를 더 밀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복의랑데뷰 2007-03-0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 시리즈는 첫 작품만 봐서는 기대하기 쉽지 않겠는데요.

상복의랑데뷰 2007-03-0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Kel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oldhand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그닥 권하고 싶은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7-06-0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물만두님이 Kel님이세요???

2007-06-02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7-06-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초롬 너구리 / 아뇨. Kel님은 다른 분이십니다.
비공개 / 알겠습니다.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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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보르헤스와 추리소설을 교묘히 섞어 만든 깔끔한 오마주이다. 다시 말한다면 이 둘에 대한 일정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보르헤스에 대해서는 이름 석자와 읽어본 몇 편의 단편들에 대한 모호한 기억 밖에 없는지라 추리소설이라는 측면에서만 염두에 두고 읽었다. 그렇지만 재미는 오히려 보르헤스라는 인물에게서 느꼈다. 개인적으로 안락의자 탐정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은데다가, 이 작품이 가지는 필연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더 언급하기에도 모한 부분이라 생략..) 그래서 추리소설을 읽었을 때의 재미로만 따진다면 그렇게 재미있‰B던 것은 아니다.

반면에, 보르헤스라는 인물에 대한 오마주로써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보르헤스와 얼마나 비슷한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보르헤스라는 인물은 참 매력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회색 뇌세포를 이용하여 추리를 해나가는 안락의자 탐정의 모습과, 너그럽고 인상좋은 할아버지같은 넉넉함까지, 머릿속에 그려질법한 노대문호의 모습이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보르헤스의 단편들처럼,  길이가 짧고, 대화는 유쾌하면서도 문장 곳곳이 숨어있는 많은 상상력과 모호한 문장들은 보르헤스가 마치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나는 보르헤스에 거의 문외한 수준이지만, 보르헤스를 좋아하시거나 잘 아시는 분들에게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즐거움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한 가지 장점과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장점은 정말 공들여 책을 만든 티가 난다는 것이고-교열, 삽화, 주석까지 모두 만족스럽다.-단점이라면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비평이 실렸으면 한다는 점-나같이 보르헤스 혹은 추리소설을 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그리고 초기 미스터리의 걸작 리스트에 있는 특정 작품의 결말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를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추리소설 독자라면, 이 작품과 더불어 보르헤스가 직접 창조한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을 읽는 것도 기쁨일 것이다. 같은 방식의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점도 그렇고, 보르헤스가 창조한 탐정이라는 점에서 후대 작가에 의해 창조된 보르헤스와 비교해가며 읽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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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3-0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보르헤스에 혹해서 사려다가 내용보고 관뒀던 책인데, 랑데부님이 이렇게 얘기하시니 또 혹하네요. ( 팔랑귀) 전 보르헤스도 좀 알고, 추리 소설도 좀 아니, 읽어도 될까봐요. ^^

상복의랑데뷰 2007-03-0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잘 아시니 재미있으시겠네요. 전 보르헤스는 몇 편 읽어본게 다인지라...길이도 적당히 짧고 책 만듬새도 양호하고 재미도 있습니다. 워낙 많이 읽으셔서 걱정도 됩니다만, 하이드님의 구미에 일정 부분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7-03-07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철리 여자 동서 미스터리 북스 46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수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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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마이 네임 이스 아처>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배경은 언제나 끈끈하고 화려함이 없으며, 대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로, 류 아처 탐정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영감스러워지고 화려한 액션도 없고, 유머의 질도 챈들러 같은 사람에 비해서 빈약한 느낌이 든다."

내가 하루키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이 문장을 보고 <움직이는 표적>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또렷하게 떠올라서 쿡쿡 웃었다. 아마도 이 책까지 읽은 추리소설독자들의 모든 고백은 대부분 한결같다. <움직이는 표적>(과 <마의 풀>)은 별로였는데, <위철리 여자>, <소름>, <지하인간>으로 이어지는 3부작에서 아처, 혹은 로스 맥도날드의 가치를 발견하고 놀랐다라는 식의...100만 21번째 고백같지만 나도 그렇다. <움직이는 표적>의 아처는 해밋과 챈들러의 큰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오지 못한 데다가, 맨날 얻어터지고 납치나 실신 따위를 당하는 멋대가리 없는 지친 탐정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위철리 여자>에서도 이 경향은 그리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위철리 여자>를 읽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위철리 가를 둘러싼 비극적인 가족사가 충격적이서가 아니다. 루 아처의 진심이 사골국물처럼 절절하게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루 아처는 샘 스페이드처럼 위악적이지도 않고, 필립 말로처럼 고독한 영웅도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서 보기 힘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밝혀지는 등장인물들의 비루한 삶과 욕망들. 그것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낼수록 아처는 현실에 지치고 절망해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처는 분노나 실망감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결말부분에서의 대화는 압권이다.) 

 "거짓말도 자꾸 되풀이하다 보면 정신에 기묘한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이와 같이 몇 번씩 되풀이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진실이 된다, 나는 휘비가 내 딸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만일 휘비가 죽었다면 위철리가 슬퍼하는 만큼 나도 슬퍼하게 될 것 같다. 아내에 대한 위철리의 감정을 나는 이미 얼마쯤 나누어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런 따스함이 좋다.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현실에 지치고 버거워하면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맨날 얻어터지고 납치나 당하는' 것도 사실은 가급적 완력으로 해결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샘 스페이드나 마이크 해머였으면 완력으로 해결할 법한 상황도 그는 묻고, 설득하면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인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 이해간 것일 수도 있지만, 필립 말로라면 독설을 퍼부으면서 인정할 수 없었을 법한 상황도 그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는 희망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사건 해결에 대한 희망이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희망이건 간에. 다만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만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을 탐문수사를 통해 조금씩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느 한 중년 남자의 자기성찰이 보인다. 비록 위대한 영웅이나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을 통해 세상을 볼 줄 아는 통찰력과 이를 통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게 된 남자의 담담하지만 깊은 매력이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최대의 미덕이다. 로스 맥도널드가 별로라던가, 하드 보일드의 지나친 남성성에 질린 독자들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추신) 내가 이 책, 그리고 로스 맥도날드의 국내 출간작을 순서대로 읽기로 한 계기 역시 같은 에세이에 있는 구절 때문이었다. 평론가들에 따르면 가장 과대평가된 소설가 1위라지만, 오히려 나는 하루끼가 너무 많이 소개되어 오히려 과소평과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처 보아도, 인간이 살아 나가는 데서 빚어지는 안쓰러움을 억제된 필치로 잘 그려 낸 걸 엿볼 수 있다. 등장 인물은 모두 검은 모자를 쓴 느낌이고, 각자가 불행으로서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아무도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걸어가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로스 맥도널드는 계속 외쳐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남자의 묵묵한, 그렇치만 따뜻한 외침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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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조국
로버트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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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고려원에서 나왔던, fatherland가 <당신들의 조국>이란 이름을 달고 랜덤하우스에서 다시 나왔다. 일단, 번역제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올해 최고의 제목이 아닌가 싶다. '당신들의' 이란 말투가 주는 묘한 비감이 있다. 바로 국가가 구성원들을 타자화시키는 서글픈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책에 묘사된 엄청난 크기의 회랑이 암시하고 있는 국가의 외형적 성장에 비해,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 하에서 두려움에 가득찬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셈이다. 그리고 당신이 될 수 없는 마르코의 슬픈 운명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비슷한 제목으로 떠올릴 수 있는  박노자 선생의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유사한 어감이다, 차이가 있다면 박노자 선생은 그래도 조국을 사랑하지만, 마르코는 그럴 수조차 없었다는 점이겠지만.) 그래서 '당신들'이라는 표현을 곱씹으면서 이 책을 읽었고 더욱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9개의 진실 속에서 1개의 거짓을 섞어넣는 정교함은 경이로울 정도이다. 후기를 읽으면서 전부다 창작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의 대부분이 역사적인 진실임을 알고 놀랐다. '딱 하나만 거짓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의 차원을 넘어서 거의 일어날 뻔한 일이었던 셈이다. (어떤 측면에선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긴 하다.)  

솔직히 이 작품이 소재로 삼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막연할 뿐이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동일한 맥락의 사건들을 겪은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떠올라 관련 서적을 더 읽어보게 했으니, 복거일 선생의 추천사는 그런 면에서 사실인 셈이다. 우리가 잊고 있는 진실은 언젠다는 더 큰 댓가를 치루게 하는 법이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이,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비교할만한 구석이 많다. 그러나, 난 마틴 크루즈 스미스의 <고리키 공원(Gorky Park)>과 비교할만한 소설이라고 보여진다. 냉전의 반대편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주인공의 상황-중년의 이혼남, 붕괴된 가족과 인간관계, 그리고 체제에 대한 마음 한 구석의 의문-그리고 품고 있는 진실과 결말까지 이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더 높게 보고 싶은데, <고리키 공원(Gorky Park)>는 실재하는 적대국을 묘사하다 보니 소설 중간중간에 필요 이상으로 소비에트 권력층의 부패를 과장해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딱 잘라서 구분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미국 사람이 쓴 소련 이야기의 함정'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속된 말로 '센세이셔널리즘'이 구석구석 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유혹에서 상당부분 벗어나고 있다. 가상역사소설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열위를 과장해서 우리의 우위를 강조할 필요가 없던 것도 있겠지만,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꼼꼼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인물 구성이나 대화 그리고 특유의 드라이한 문체가 주는 차분함이 좋았다. 특히 비분강개하거나 과도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차분한 묘사는 역설적으로 마르코 개인의 비극을 가깝게 한다. 또한 전자는 시리즈로 이어가기 위한 술수(?)가 보이는 반면에, 이 작품은 자기완성성을 띄고 있다는 점도 말해두고 싶다.   

냉정하게 말해서 추리소설로만 놓고 본다면 잘 쓰여졌다 이상의 평을 주기는 어려운 느낌도 든다. 교활한 추리소설독자라면 '아웃사이더 중년남의 사건해결분투기'는 필립 말로 등장 이후로 골백번도 더 써먹은 소재 아닌가? 중간에 벌어지는 로맨스나 결말 부의 비틀어짐, 그리고 이 소설이 파헤치려는 주제는 조금만 생각한다면 쉽게 알만한 내용이긴 하다. 하지만 '무엇' 못지 않게 '어떻게'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게 구현해냈다는 점과, 195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사가 걸어간 비슷한 병영국가의 길을 떠올린다면, 이 소설이 주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리고 그 와중에 소설 본연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꺼이 추천할만 하다. 에듀테인먼트라고 하면 경박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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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2-0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조지 오엘과의 비교는 좀 아니라고 봤습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12-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의 1984랑은 좀 다른 느낌이었죠. ^^; 간만에 읽은 묵직한 책이었습니다.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