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을 읽고 난 후, 무재 씨, 라는 글자가 누군가의 음성으로 내 머리 속에 박혔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황정은에 대해 말할 때, <백의 그림자>에 대해 말할 때, 혹은 어떤 기사에서 이 작가의 이름을 접할 때면,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늘 함께 들려왔다. 무재 씨, 무재 씨, 무재 씨... 설명하긴 어렵지만 무재 씨를 호명하는 그 목소리는 보통의 연인을 부르는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아주 귀하다는 듯, 최대한의 선의와 최대한의 배려를 담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그래서 부르는 사람도, 부름을 받는 사람도, 그 부름을 듣고 있는 사람도 귀해지는 그 소리.  

 

 

황정은의 두 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읽고 나서 확인한다. 그토록 마음에 남는 목소리로 무재 씨,를 부른 건 바로 작가 황정은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파씨의 입문>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이 쓸쓸했다. 그리고 나의 쓸쓸함은 <파씨의 입문>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따뜻하게 위로 받았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이 작은 존재들로 인해 쓸쓸했고, 최대한의 선의를 담아 그 존재들을 호명하는 작가 황정은의 목소리로 인해 위로 받았다.  

 

 

완고한 얼굴로 떨어진다. 

아마도 이런 얼굴일 것이다. 입을 꼭 다문 얼굴, 말이 졸아붙은 듯한 얼굴, 더는 꿈꾸지 않는 듯하고 실제로 꿈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얼굴, 더는 꿈꾸지 않아 나도 보지 않고, 남도 보지 않는 얼굴. 

- 황정은, 낙하하다 

 

이런 구절을 읽게 되면, 건조해진 얼굴을 한참이나 문지른다.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손바닥으로 눈을 누르면, 감긴 눈 속으로 여러 색깔의 네모, 세모, 동그라미 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아무리 집중해서 보아도 금세 모양이 달라지고 색깔이 변한다. 이런 시시한 놀이 따위에 집중해 있다가도 나도 보지 않고, 남도 보지 않는 내 얼굴이 생각나 문득 쓸쓸해졌다. 

 

 

어쨌든 죽으면, 나는 틀림없이 유도 씨한테 붙을 거다. 난 죽어서도 쓸쓸한 테니까, 유도 씨가 반드시 붙여줘야 돼.

응. 

일부는 진심이었지만, 총체적으론 농담이었고, 농담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붙어,하고 유도 씨가 말했다. 

얼마든지 붙어. 

- 황정은, 대니 드비토 

 

죽어서도 쓸쓸할 것 같았는데, 몇 장은 넘기다 얼마든지 붙어, 라는 유도 씨의 한 마디에 내내 차가웠던 발에 온기가 도는 듯 했다. 발가락 하나하나가 따뜻해졌다. 얼마든지 붙어, 얼마든지 붙어, 얼마든지 붙어. 누군가에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누군가에게 꼭 들었으면 하는 말이다.  

 

오래 전 한 소설집의 후기에서 이승우는 의식하는 자만이 아프고, 그 아픔이 소설을 존재하게 한다고 했다. 황정은은 모두가 망각하고 묻어버리는 어떤 존재들을 인식하고, 아파하고, 그 아픔으로 소설을 쓴다. 그 어떤 존재들로 인해 황정은의 소설은 미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의미를 갖는다. 예술가에게는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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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대니 드비토의 저 부분, '얼마든지 붙어' 하는 저 부분이요, 저도 저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놨어요.

선인장 2012-02-07 09:25   좋아요 0 | URL
입춘도 지났는데, 북쪽에서는 연일 찬 공기가 밀려오고, 아마도 늦게까지 겨울을 앓겠지만, 저런 말을 듣는다면 겨울에도 사랑에 빠지고 말겠지요.^^

비로그인 2012-02-0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 곁에 황정은의 글이 있는데... 읽기도 전에 온기가 후루룩 치미네요.
잠들기 전에 이불맡에서 읽으면 더 없이 좋겠어요 :)

선인장 2012-02-07 09:27   좋아요 0 | URL
예전 누군가의 말처럼, 아직 황정은을 읽지 않은 사람이 부러워요, 전요...

책읽는나무 2012-02-0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이미지속에 남아있는 님의 모습에 황정은이라는 작가가 제법 잘 어울리네요.
그리고 다락방님과 선인장님도 잘 어울리는 쌍둥이자매같다라는 느낌을 줄곧 받아왔었는데
아직도 건재하시네요.
반가워요.
잘 계시죠?^^

저 아직 황정은 안 읽었는데 부러워해주세요.흠흠~

선인장 2012-02-07 13:44   좋아요 0 | URL
부러워요.. 흠, 많이 부러워요.

건재,한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어요. 이월에 왠 추위람, 투덜거리면서, 봄이 오기나 할까, 염려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2012-02-07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7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12-02-17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이라..기억하겠습니다.
오늘 또 추워졌지만 한겨울만큼은 아니네요.
봄은 늘 기다리고 기다리게 되는 계절이에요.
알라딘 서재도 8년이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분들 있는데
다시 뵈니 반갑고 ...그동안 그리웠다고.


선인장 2012-02-17 20:31   좋아요 0 | URL
한겨울의 추위는 그래도 버틸만해요. 아마도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덕분에 단단히 여밀 수도 있구요. 저는 이상하게도 2월, 3월의 추위가 더 견디기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왜 이리 춥나, 소리를 입에 달고 보냈어요.
8년이라, 정말 긴 시간이군요. 여전히 이 곳에 있는 분들도, 이제는 볼 수 없는 분들도, 모두들 다른 삶을 살기에 충분할 만큼의 긴 시간... 저도 반갑습니다. 그리고 그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