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 2009년 8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당시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잠시 인용했던ㅡ그러나 또한 이 글의 중심적 선율 중 하나가 되고 있는ㅡ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연극에 관한 테제들(Thèses sur le théâtre)」은 그의 책 Petit manuel d'inesthétique에 수록되어 있는 글인데, 이 책의 국역본이 바로 얼마 전인 2010년 1월에 바디우 전공자인 장태순 선생의 번역을 통해 간단히 『비미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그러니까 이 국역본은 원서가 나온 지 10년이 조금 넘어 번역된 것인데, 내가 "연극-관념"이라고 옮겼던 "idée-théâtre"를 장태순 선생은 플라톤적 의미에 따라 "연극-이념"으로 옮기고 있다). 일독을 요하는 책이다. 특히나 바디우의 '비미학'을 랑시에르의 '미학/감성학'과 접속시켜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대체적으로 철학자들은 춤의 문제에 대해ㅡ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ㅡ철학적 담론을 제기하기를 꺼려하거나 그러한 담론을 산출하는 데에 무능한 경향이 있는데(아마도 이에 관해서는, 춤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강림'하게 했던ㅡ혹은 철학의 문제를 춤의 문제로 '승화'시켰던ㅡ니체(Nietzsche)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유의 은유로서의 춤(Le danse comme métaphore de la pensée)」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소중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독을 권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하의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시나 연극과 그 음악, 음악과 그 연극에 관해서이다, 모두 알다시피 말이다. 어쨌든 이 글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공연ㅡ그 공연은 사실 내가 쓰고 내가 연출하고 내가 작곡하며 내가 연주하고 연기하는 공연이 될 텐데ㅡ에 관한 '상상'의 일단과 일말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글이다. 그 공연을 언젠가는 꼭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미한 희망을 동력 삼아, 오늘도 펜을 든다.
(201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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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는 배우, 연기하는 악사
— '사건'과 '관념'으로서의 연극, '잔향'과 '이명'으로서의 음악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연극에 관한 테제들」에서 사건(événement)과 관념(idée)의 관점에서 연극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첫째, 연극은 반복되는 상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 하나의 단독적인(singulier) 사건이 됩니다. 바디우는 이러한 연극적 혹은 무대적 사건을 "사유의 사건(événement de pensée)"이라는 말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극이라는 가장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장르 안에서 일견 가장 낯설게 보이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유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그 자체로 배열과 조합의 행위에 기초한 하나의 복합적 작업을 뜻하는 것, 곧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특정한 '배치(agencement)'를 뜻하는 것입니다. 연출이라는 작업이 뜻하는 첫 번째 의미는 아마도 이러한 '배치'의 행위가 될 겁니다. 또한 이러한 배치의 작업이 산출하는 것을 바디우는 "연극-관념(idée-théâtre)"이라는 독립적인 조어(造語)로 부르고 있습니다. 연극은 여러 구성요소들의 배치를 통해서 연극에 고유한 특정한 관념을 산출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둘째,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관념이지만, 그러한 관념이란 오직 상연이라는 형식 안에서만 출현하는 어떤 것, 무대화라는 과정 없이는 미리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연극만이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하고도 단독적인 의미에서의 '연극-관념'이란, 오로지 연극적 배치라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능한 사유의 형식들 중에서도 연극이 유독 특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유가 배우의 몸, 무대, 빛과 소리 등 물질성의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일 겁니다. 

 

 

▷ 강연 중인 알랭 바디우: 연극은 '배치'이며 또한 '사유의 사건'이다.

 
이러한 물질적 요소들의 배치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건축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연극의 건축술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거의 언제나 그러한 건축의 '해체'라는 사실입니다. 연극이 하나의 구조물을 건축함과 동시에 해체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이 연극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이자 마력일 겁니다. 연극은 고착이 아니라 유동이며, 또한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연극은 어쩌면 이러한 시간성, 이러한 덧없음, 이러한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유한성 그 자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껴안고 보듬으며 나가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음악의 시간성이 연극과 만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음악의 시간은 연극의 시간과 때로는 포개지고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며, 또한 연극과 음악은 서로를 통해 자신이 그 스스로는 갖고 있지 못했던 특정한 '공간'을 얻기도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은 구축됨과 동시에 해체되는 어떤 것, 쌓임과 동시에 닳아 없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해체의 이미지는 연극이 끝나면 철거되고 사라지는 무대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와 배우와 조명과 음악 등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혹은 여러 개의) 관념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관념'이란, 저 '물질'의 존재가 없었다면 결코 남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관념, 물질성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산출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사유입니다. 연극이 우리에게 선사하고 우리 곁에 잔존케 하여 그 영향을 지속시키게 하는 관념이란, 이렇듯 연극의 '물질성' 혹은 '유물론적' 연극성에 기반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Alain Badiou, Petit manuel d'inesthétique, Paris: Seuil, 1998.
▷ 알랭 바디우, 『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음악 또한 이러한 '물질성'을 통해 '관념성'을, 유한한 '시간성'을 통해 무한한 '영원성'을 얻고자 합니다. 무대 곳곳과 그곳을 스쳐간 배우들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소리의 흔적들은 어느 순간, 음악이 하나의 '유령'으로서 '본래적'이고 '근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확정적 무형성(無形性)으로부터 잡힐 듯 말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정적인 유형성(有形性)으로, 그리고 시간 속의 존재로부터 다시 시간 밖의 비존재로, 그렇게 이행하고 이탈합니다. 이 과정의 끝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잔향'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또한—전혀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닌—일종의 '이명(耳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잔향'과 '이명'은 또한 무엇보다 하나의 '울림'이며, 이 울림은 또한 '들리지 않는 소리', 이미 지나간 소리들이 남겨놓은 '관념의 음(音)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잔향'은, 이 '울림'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이 됩니다. 곧 음악은 하나의 사유와 관념이 마치 '잔향'처럼 퍼지고 '울림'처럼 남겨지기를 기대하고 또한 의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이 자신의 '무형성'으로부터 '유형성'을 긷고 일구는 방식, 자신의 유한적 '시간성'을 통해 오히려 무한적 '영원성'을 약속할 수 있는 방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성은, 이러한 영원성은, 어떤 실체를 지닌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연극은, 가정을 통해 사실을, 허구를 통해 진실을, 무형을 통해 유형을, 순간을 통해 영원을, 그리고 특수를 통해 보편을 약속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그 자신의 약속을 배반함으로써만 오히려 그 약속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역설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연극음악이 하나의 독립적인 음악이 아니라 연극적 배치의 한 구성요소로서 드러나고 경험될 때에만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총체성'을 띤다는 또 다른 역설로, 다시금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습니다. 

 

         

▷ 파트리스 파비스: 텍스트성은 무엇보다 하나의 '물질성'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온다.
    Patrice Pavis, Le théâtre contemporain, Paris: Nathan, 2002.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현대 연극』의 논의를 통해서 드라마 텍스트의 분석을 텍스트성(textualité)에 대한 천착으로, 곧 텍스트의 '물질성'과 '음악성'으로의 침잠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연극 텍스트에 대한 이해란 곧 그 텍스트의 물질성을 이해하는 일, 다시 말해 그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기표들의 '소리'와 '리듬'과 '유희'를 이해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죠. 텍스트를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음악의 '선율'과 '템포' 안으로 침잠하는 일, 반복하자면 이것은 곧 연극적 '배치'의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고 있습니다. 연극적 텍스트를, 그리고 그 텍스트가 지닌 물질성을, 무엇보다도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연극적' 배치란 또한 일종의 '음악적' 배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 연기자는 또한 어떻게 한 명의 연주자가 되는가: 2008년 대관령 국제음악제 중 얼 킴(Earl Kim) 작곡의 <린다에게(Dear Linda)>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의 모습.

 
제가 언젠가 꼭 한 번 무대에 올려보기를 꿈꾸는 하나의 '연극'이 있습니다. 배우가 무대에 오릅니다. 단, 그는 '연기'를 하는 연기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하는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같이 무대에 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극이 뮤지컬이거나 음악극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악기를 든 연주자들은 '연기'하는 배우를 위한 반주자들이 아닌 것이죠. 여기서 배우는, 오히려 그 자신이 하나의 '악기'가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율'과 '음색'을 이루고, 또한 그의 몸짓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에 불이 꺼지면, 그때 비로소 남겨질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을 상상해봅니다. 그 사유와 관념은, 딱딱하게만 들리는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시간이 떠난 후에 남겨진 어떤 비물질성과 비시간성, 그것은 오직 그러한 물질과 시간이라는 유한한 조건들을 거쳤기에 가능해진 하나의 무한입니다. 음악은 하나의 관념이겠지만, 그것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한에서의 '관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물질과 관념의 교차와 공존 속에서, 배우는 한 명의 악사가 되고, 연기는 또 다른 연주가 되며, 연출은 일종의 작곡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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