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세계문학의 숲 40
카슨 매컬러스 지음, 서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어는 서술어가 마지막에 위치하는 언어여서 각운에 대하여 민감하기 힘든데,

중국어나 영어처럼 주어 동사 뒤에 명사(구)나 형용사, 부사(구) 등이 놓이는 언어에서는

초성만 다르고 나머지 '라임'이 비슷한 각운을 즐겨 한다.

한국에서라면 아재 개그나 부장 개그라 놀릴 법한 것들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도 굳이 '하트'와 '헌터'를 들이댄 것도 -트 발음의 유사성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고독한 사냥꾼이 고독을 느끼는 부분은 '마음'보다는 '심장'이 직접적이지 않을까?

마음이든, 심장이든, 우리말로 헌터와 각운을 맞추기엔 애당초 틀려먹은 일인지 모르겠다.

 

카슨 매컬러스는 고독에 대하여 깊은 조예를 가진 인물이다.

요즘에야 고혈압과 뇌졸중을 극복하는 일도 흔하지만,

20대에 수차례 뇌졸중으로 죽음을 앞둔 아가씨가 23세에 발표한 책이라고 믿을 수 없는 책이다.

그 두 배가 넘는 삶을 산 나도,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저변에 깔린 모습을 이렇게 형상화하는 것에는 아득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읽을 수 없어 문학성을 논하기는 힘들지만,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의 사회상 - 흑백 문제에 대하여, 노동자 인권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들과,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는 고독에 대하여, 특히 장애를 가진 이들의 소외감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주인공들이 지닌 독특한 특성은 시대의 전형을 보여줄 법 한 모습들이다.

 

그는 절대로 밤에 카페를 닫지 않을 것이었다.

장사를 계속하는 한, 밤이야말로 그런 시간이었다.

다른 시간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이때 왔다.

두어 명은 일주일에 몇 번 정기적으로 왔다.

어떤 이들은 한 번 와서 코카콜라를 마신 뒤 다시는 오지 않았다.(436)

 

그는 비프다.

유목민, 농경민 사회에서는 밤이라는 시간은 자는 시간이다.

20세기들어 도시의 세계는 밤에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쉴 곳이 필요하다.

시골이지만 이름은 <뉴욕 카페>인 공간은,

마치 백석에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은 사고를 펼치게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Room by the sea>라고나 할까.

 

호퍼의 그림이 단절된 사각형안에 고립된 인간상을 그리고,

집보다는 <방>의 불통을 고독하게 그리던 그런 시대와 통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그 방에서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한장 쯤 가지고 있던 시대였던...

그 고독한 영혼들이 쉬어갈 곳이 필요해진 시간...

일본 만화 <심야식당>처럼...

 

큰 소리로 스피노자를 읽자

단어들이 풍요하고 어두운 소리를 냈다.

그 비오는 밤 노란 성냥불 뒤에서  미소 짓던

백인의 얼굴을 기억하자 그에게 평화가 왔다.(115)

 

흑인 의사 코플랜드 박사의 세계를 '풍요하고 어두운 소리'로 표현하는 것도 멋지다.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벙어리들'로 시작한 소설은

다양한 '소리들'을 마구 열어준다.

 

그들은 부드러운 바닥에 누워 하늘을 향해 서있는 초록 소나무숲을 올려다보았다.

새 한 마리가 처음 들어보는 슬프고 맑은 노래를 했다.

오보에처럼 높은 음,

그런 뒤 다섯 음 낮게 다시 불렀다.

그 노래는 대답없는 질문처럼 슬펐다.(336)

 

믹이 해리와 들은 소리다.

믹에게 음악은 신세계였다.

음악은 가난한 믹에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해준다.

현실 가능성은 비록 아주 적지만...

 

나는 눈이 보고 싶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차고 하얗게 날리는 눈. 눈보라.

차갑고 하얀 눈이 한겨울 내내 부드럽게 내리고 또 내리는 거야.

알래스카의 눈처럼.(337)

 

꿈꾸는 소녀 믹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포셔의 아버지, 코플랜드 박사는 의지한다.

 

네 영혼의 모습과 색깔에 대해 말하는 거야.(66)

 

코플랜드 박사는 '꿈을 가진' 흑인이다.

흑인들에게 변화를 주려 하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선각자이다.

영혼의 색깔에 대하여... 이 책은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개혁을 바라는 제이크조차도 현실에는 비관적이다.

 

당신이 나무때문에 숲을 못 본다고 말하는 거요.

일을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오.

낡은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전통을 창조해야 하오.

당신과 수천 명의 흑인들이 워싱턴이라는 시궁창으로 몰려간들 누가 상관하겠소.

무슨 차이를 만들겠소?

우리 사회 전체가 시커먼 거짓 위에 세워졌는데.

뭐든지 할 수 있소. 모든 것을! 뭐든지!

아무 것도 못해요.(375)

 

공황으로 다들 어렵던 시절.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을 뚫고,

겨우 내 촛불을 든 사람들이 여왕질 하던 사람을 끌어 내렸다.

이제 다시 감옥에 처넣기 위해 촛불을 든다.

비관과 부정에는 가능성이 없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공산주의자가

평생 병든 몸으로 고통받았지만,

<이성적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을 했다.

우리 사는 세상도 비관적이다.

홍준표 같은 사람이 세월호를 정치적 수사로 낙인찍으려 한다.

일베에서는 다시 오뎅 사진을 올린다. 참 추악스럽다.

그렇다고 문재인이나 안희정이 희망차지도 않다.

민주당은 늘 이승만의 자유당 옆에서 얼찐거리던 세력 아닌가.

그렇지만, 민주공화국을 위하여 의지를 가져야 할 모양이다.

 

의지가 없다면, 세상은 비관적이다.

의지를 가져야, 세상은 겨우 낙관적인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살기 힘들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작가는 읽은 것 같다.

 

그런 비관적인 것들은 소설 내에서

벙어리라는 장애, 흑인이라는 차별, 하층민들의 가난,

그리고 군중 속의 살인, 폭동, 총상,

결국 안토나풀로스를 잃은 싱어의 자살로 이어진다.

 

현실에 좌절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묘사할 수밖에 없지만,

사는 사람들을 또 하루를 살아야 할 몫의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으로 장편을 맺는다.

 

비프는 생각에 빠져 꼼짝않고 서 있었다.

땀이 관자놀이에서 반짝였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 눈을 다른 눈보다 크게 뜨고 있었다.

오른쪽 눈을 크게 뜨고 암흑과 오류와 멸망의 미래를 응시하고,

가늘게 뜬 왼쪽 눈으로 과거를 보았다.

그는 암흑과 광명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비통한 냉소와 신념 사이에 걸려 있었다.(439)

 

문학을 읽는 일을

비관적 사회 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받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책은 고전으로 꼽히게 되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