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표지가 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상징하고 있다.

일단, 액자.

액자에 들었으므로, 이것은 현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나의 매트릭스다.

그런데, ㅋㅋ 가장 전경화되어있는 여성의 꼰 다리...

어휴~ 저 꼰 다리를 풀고 가랑이를 벌려보고 싶은 욕망이 든다.

밤과 낮이 구별없는 불야성의 마천루들과 무지개,

그리고 달러들은 바비 인형의 '어서오십시오'와 함께

속된 우리들을 주사위의 6을 기대하는 속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현실은, 액자 밖의 현실은... 튿어진 베개 하나 주워서 잠시 몸을 눕힌 노숙자.

 

인간으로 살면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상처받지 않을 본연의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건만, 그걸 천부인권이라 하거늘,

자본주의 시대 이후,

우리는 자본의 매트릭스에 사로잡힌다.

 

5만원권에 불을 붙이면... 아마 미칠 것이다.

5만원권 몇 장이면, 못 사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여자도 사고, 집도 사고, 행복도 살 것 같이 보이니 말이다.

 

왜 이렇게 '욕망'에 사로잡혀,

미래를 담보로 맡긴 채, 상처받으며 불행하게 살고 있는가...

가면 갈수록 그 자본의 덫은 인간 생활의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지구촌의 오지까지, 어린 아이의 삶까지 지배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이상, 보들레르, 투르니에 등의 작가와 짐멜, 벤야민, 부르디외 등의 철학가를 엮어 이야기한다.

그런데, 한 마디로, 재미없다. 지나치게 전문적이다.

이 부분을 우리가 알아먹기 쉬운 말로 대중적 강연으로 풀어낸 것이

'다상담'의 '소비'편이나 그 외의 부분에서 녹아 있다.

몇 년 사이에 강신주의 관점이 많이 대중 곁으로 내려왔다 싶다.

 

짐멜은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인간의 감정이

자본주의에서 돈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51)

 

며칠 전 본 영화의 한 장면,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주인공이 '끝까지 간다'에서

차지한 것은 바로 금고 속에 가득한 현찰이었던 것.

 

부동산은 어디서 났는지, 그 소유를 이전하기가 쉽지 않다.

허나, 현금은(요즘 5만원권의 3/4이 지하로 숨었다고 한다.) 증여해도 전혀 세금이 없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감사해도 자본주의의 돈처럼 황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욕망은 돈을 버는 데 자신의 시간과 육신을 소모하게 하고,

그 돈을 쓰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한다.

 

인간은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99)

 

당신이 어디 사는가가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준다던 재벌 아파트의 광고처럼,

참으로 천박한 저 상징체계 속으로 침잠해도 깊이 침잠해 버린 것이다.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154)

 

바타유의 이 생각은

인간의 에로티시즘, 사랑에 편승하여 온갖 패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무엇을 입느냐의 문제는 '금지'와 결합되어,

얼마나 보여주느냐의 문제로 변하는 것이다.

몸매를 잘 드러내 보여주게 만들고,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런 욕망의 현신이 패션이다.

 

1960년대 알제리의 사회구조와 아비투스를 탐구한 뒤,

부르디외는 자신의 연구 시선을

알제리 입장에서 보면 식민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로 돌립니다.

교육, 예술, 경제 등 모든 측면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저에 있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전략들을 폭로.(238)

 

아비투스란 문화적으로 물려받게 되는 유산같은 것이다.

귀족 부모에게서 우아한 문화 유산을 이어받고, 가난한 부모에게서 욕을 들으며 크는 그런 것.

식민지와 식민 본국의 아비투스는 자본의 전략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평천하'를 외쳤던 사람들이 나라를 세운 것이 대한민국이다.

그 국부가 이승만이고, 그들은 일제 강점기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아비투스는 민주공화국보다는 귀족의, 가진자들의 권력을 당연시하는 듯 싶다.

그 아비투스의 현현이 문창극 사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254)

 

'방드르디'를 통하여 로빈슨이 무인도의 '아무 것도 없음'의 아비투스를 견디지 못하고

온갖 격식을 만들려 함을 들어 설명한다.

반면, 프라이디(방드르디)는 자신의 아비투스에서 로빈슨을 비웃는다.

 

방드르디는 마치 현재라는 순간에 갇힌 인간처럼 보였다.

그가 자본주의와 기독교 원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미래에 이룰 노동의 대가나

기독교가 경고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301)

 

아무리 '카르페 디엠'을 외쳐도, 인간은 이미 미래에 옭죈 죄수와 같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유하, 오징어)

 

오징어가 집어등을 의심하지 못하고,

그 빛의 세계로 뛰어들었다가 처참하게 살육당하듯,

우리도 모오든 광명을 의심하라는 시.

 

다음 시는 더 처절하지 않은가.

제목까지, '체제에 관하여'다.

이 시집 제목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다.

 

횟집 수족관 속 우글거리는 산낙지

푸른 바다 누비던 완강한 접착력의 빨판도

유리벽의 두루뭉술함에 부딪혀

전투력을 잊은 채 퍼질러앉은 지 오래

가쁜 호흡의 나날을 흐물흐물 살아가는 산낙지

주인은 부지런히 고무 호스로 뽀글뽀글

하루분의 산소를 불어넣어 준다

산낙지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

여기 쌩쌩한 놈들이 있는뎁쇼

히히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 달라고

살아 있어 달라고

그러나, 헉헉대는 그대들의 숨통 속으로

단비처럼 달콤히 스며드는 저 산소 방울들은

진정 생명을 구원하는 손길인가

투명한 수족관을 바라보며 나는

투명하게 깨닫는다

산소라고 다 산소는 아니구나

저 수족관이라는 틀의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산소도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한 의미로

뽀글거리고 있는 것 아니냐(유하, 체제에 관하여)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강신주처럼 똑똑한 사람이 있어, 참 다행이다 싶다.

 

멍청한 사람들은,

독자들이 알아먹지도 못할 책을 내는 일을 자랑스레 여긴다.

그래놓고 독자를 욕하고, 인문학적 토양을 욕한다.

 

다행이다.

욕들어도 쌀 독자들을 위하여,

알아먹는 말로 쓰는 강신주가 있어서...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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