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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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을 찾아읽다보니 학교 도서관에 그의 책이 거의 다 있었다. 내가 신청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선생님이 한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의 미술관, 박물관 순례는 총 8회에 이른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보는 눈은 미술사학자의 그것은 아니다.
그의 눈은 늘상 '디아스포라'의 그것이며, 두 형을 감옥에 두고 강가에서 울고 섰는 소년의 눈물을 떠올리게 하는 눈이었다. 그의 눈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을 찾지 않고, 왠지 조금 우울하고 그렇지만 비겁하지 않은 그림들을 찾게 된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속수무책의 불행이 닥친다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하는 여인'(124)은 그의 절망적인 마음을 담아낸 것일까? 그 그림을 보면서 그의 뇌리엔 두 형들이 생각났던 것일까?

부르델의 자화상(147)은 그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아마도 그 눈빛에서 감옥에서 수십일을 단식으로 독재정권에 맞서는 형들의 이상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 매일 쳐다볼 양으로 확대복사를 했더니 흐려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틈날 때마다 바라볼 수 있으니 좋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환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아! 왜 이런 역사관을 피력한 글과 고야의 '모래에 묻히는 개'를 어울리게 한 것인지...(109)
화면 가득 노랗게 뒤덮인 모래의 폭풍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한 마리 개의 눈 앞에서 펼쳐진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인지...

이름을 얻은 화가 레오 보나를 읽으면서, 얻은 생각이 읽을 만했다.

보나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보나는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미술사상의 패자 무리 속에 처박혀버렸다. 비정하다고 할 만큼의 콘트라스트.
... 바로 거기에서 나는, 평가나 명성이 정해진 것만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며 만족해하는, 뒤집어놓은 공식주의 냄새를 맡는다...

이름을 얻는 다는 것은 그렇게 허황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서경식과 그 형들의 현대사가 너무도 힘들었음을... 그러나 역사는 그런 힘겨운 폭풍 속의 한 과정임을 읽어내는 시선이 힘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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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4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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