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무의식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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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 메모:


  • 평화사상으로서의 유교. 유교는 제자백가시대에 나타난 평화사상의 일종: 서문에서 언급된 이 아이디어가 좋았음. 유교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씩 극복하고 있는 중. 전에 조선에 관한 책, 그리고 송에 관한 책에서 유교로 인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높이 샀던 기억. 당시에는 딱히 공감하지 못했는데, 그 유교를 조선 통해 받아들인 일본이 당시 유교로써 전쟁 금지로 돌아섰다고 하니 신선하고 다시 유교를 생각하게 됨. 유교의 다면성은 매력 있음. <침묵의 종교> 생각도 나고. 그런데 정작 이 책에서는 더이상 유교에 대한 별 다른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음. 아마도 2015년에 가라타니 강연과 한 자리에서 있었다는 김우창의 발표문에 나오겠지.
  • 텍스트성에 대한 고찰: 1) 하나의 텍스트가 어떤 시절 맥락 속에서 쓰여지고, 그 시절이 지나 읽히지 않다가 새로운 시대가 왔을 때 그 시대의 아젠다에 맞추어 본래의 맥락은 잊혀진 채(무지로) 새로이 해석되는 기제. 2) 한편이 글이 그런 모습으로 성형되는 과정에서 작용한 저자의 본의와 이 본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저자를 구속했던 구체적 시절 맥락 간의 길항 작용에 대한 추적. 3) 한 텍스트가 집단 창작의 소산일 때, 집단 내부 갈등의 반영(드러남/은폐/왜곡/모순)으로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시절 맥락이 잊혀짐에 따라 텍스트만 남아 '원전화'되면서 다양한 해석을 낳는 기제. 이 세 가지 기제를 아주 유연하고 현란하게 자신의 헌법9조 독해에 활용하는 가라타니.
  • '영원평화'는 선한 의지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슬픈 역설 일단 접수, 이성의 간지와 자연의 간지 개념도 일단 접수: 이성의 간지(헤겔)는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개인적 야심의 추구가 사회적 반작용을 광범위하게 일으켜 결과적으로는 보펀 이성/이념의 실현을 앞당기게 만든 것. 자연의 간지(칸트, 이 때 자연은 인류를 완전한 시민적 연합으로 발전하게 하려는 자연의 계획을 의미)는 인간의 본성(공격성)이라는 자연의 발현--즉 전쟁--에 의해 평화로 가는 길이 한 걸음씩 닦여 나가는 것을 의미.   
  • 여하튼 수많은 논증(때로는 일방적 주장)을 거쳐 드디어 얻는 결론은 아주~ 긍정적임: 정신분석 논증은 아주 스마트하지만 뭐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함. 이런 책에서는 그게 사실이냐가 아니라 그렇게 볼 수도 있느냐가 문제인 거니까. 가라타니의 책은 늘 뇌운동에 좋음. 어쨌든 돌아돌아 와닿은 결론이 헌법9조가 임의해석에 의해 형해화되도록 놓아두지 말고 그것을 실질화(실제로 현실화)하여 일본도 제대로 사람 노릇하고 사람 대접 받자,는 아주 흐뭇한 결론.
  • 역사 공부 즐겁게 그리고 폭넓게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 이 책은 가라타니가 전에 쓴 글들과,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연장선상에 있음. 막스, 칸트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어쏘시에이션 선호도 그렇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사회의 변화과정을 처음부터 오늘 그리고 미래까지 구조적으로 성형화해보려는 빅히스토리적 성향 계속 나옴. 이 책을 읽으며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느꼈음. 지금이 세계사에서 대체 어느 지점인가, 어떤 터널을 지나고 있고 이 터널을 어디로 지나면 어떤 풍경이 나올까에 대한 사고 아니 상상을 역사를 우회하여 미래로 펼치고 있음. 역사는 반복이 아니라 리듬, 운율. 똑같은 반복은 아니지만 변주하면서 리듬을 타, 부동산 경기처럼. 지혜는 역사로부터 카피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주-창조됨. 테드에 자주 나오는 말: History doesn't repeal itself, but it rhymes. 지금 이 시대, 이 신자유주의적 단계는 미국 지고 새로운 패권국들이 등장할 듯 싶지만 쉽게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상황(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이란 말은 그 나름의 의미로 쓰임--4장 참고)이며 지난 제국주의적 단계가 그러했듯이 세계 전쟁을 통해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이야말로 이 책에서 둘째로 빛나는 부분.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일본이 할 수 있는 일, 아니 일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관한 사고가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 그가 늘 말하는 비평/크리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어. 이 때 비평은 문학비평, 정치비평 등 현대사회의 임의로 분절된 영역마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횡으로 종으로도 다 이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역사에서 무엇을 기억(또는 망각 또는 새로운 이해)할 것인가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미래로 이동하는 것이야!  

      다음은 의문 또는 생각할 부분들

 

  • 결론은 좋지만 나는 헌법9조가 무의식이고 초자아이므로 의식적으로 부인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공식 절차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는 주장은 다시 봐도 잘 모르겠음. 가라타니 자신이 인정하듯이 이미 헌법9조는 많은 면에서 속빈강정, 또는 알리바이가 되어 가고 있는데도, 그것은 무의식이고 초자아이므로 폐기될 리는 없다, 설사 잠시 폐기되더라도 피눈물 흘리는 대가 치른 뒤에 다시 9조로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이해 안 됨. 무의식/초자아라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려져 폐기될 리는 없지만 교묘하게 이용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 교묘하게 이용된다는 것은 의식적 적어도 半의식적인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아무리 의식적으로 조작되더라도 무의식은 절대 영향 받지 않고 한번 형성되면 변화하거나 해소되는 일도 없다는 말씀? 호헌파 개헌파 모두 쓸데 없는 짓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러번 말하는데, 집단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교육과 선전은 그럼 무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재의식에는 작용하지 않나? 이 과정에서 '역사의 간지'는 일어나지 않나? ... 더 이해가 안 되고 나의 지성과 감정이 혼합된 직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어쨌든 일본은 9조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 확신에 찬 태도. 듣는 일본인들이 놀라지 않을까?
  • 그리고 비교적 사소한 의문을 추가하자면, 가라타니 고진 자신은 사회의 무의식인 문화/초자아에 어찌 그리 쉽게 접근하는지? 여론조사를 보고 문화/초자아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어쩐지 너무 간단해 보임.
  • 1장에서 에토준이 9조와 무의식의 관계를 알아차렸다고 했는데, 그 부분 전혀 이해가 안 됨. 에토준의 말은 검열이 이중거울 노릇을 한다는 것 뿐인데, 9조와는 무슨 관계?
  • 천황의 인간선언은 전연 가치가 없는 것인지? 물론 이것은 미군정의 오해에서 비롯된 강제된 행위였고(그런데 자발과 강제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 틀의 하나이므로 이것 또한 순수한 강제인지는 알 수 없고, 강제라면 또 죄의식/초자아 안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일본 내에서는 별 반응 없었다고 알려져는 있지만, 이 책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을만큼이나 가치가 없었던 것인가? 1조와 인간선언간의 관계는? 
  • 도쿠가와 시대의 평화철학이 바로 유교였음. 그 도쿠가와의 전후체계에서 팍스--상징천황+전쟁방기--가 실현된 것은 이 철학이 작동을 했기 때문. 이 철학의 도입은 상당히 자발적(그러나 패전 이후의 선택이니 또 이 책의 논리로 본다면 자발적인 것도 아니지. 자발의 가면을 쓴 강요지). 그렇다면 그 때는 죄의식 없었나? 아니면 죄의식과 이 유교의 결합이었나? 더 중요한 문제는 45년 이후의 전후체계--상징천황+전쟁방기--를 뒷받침 했던 철학은 무엇? 그낭 도쿠가와 팍스를 져버린 것에 대한 죄의식 뿐?



여기서 프로이트는 초자아는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에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초자아란 집단(공동체)에서 보다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화란 집단의 초자아라고 생각했습니다. (27)

실제 요시다 수상은 맥아더의 요구에 따라서 경찰예비대를 만들었습니다. 미군이 한반도로 건너간 후 안전보장을 위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다는 끝가지 헌법 개정을 거부했습니다. 경찰예비대가 안보대, 자위대로 발전한 시점에서도 그것들은 "전력...이 아니다"라고 계속 이야기하며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9조에 대한 ‘해석 개헌‘의 시작입니다. 이후 9조의 문면...은 바꾸지 않은 채로 그것과 상반되는 군비확대가 계속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38)

헌법 1조와 9조는 왜 이처럼 결부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을 점령통치하기 위해 먼저 천황제 유지를 시도하고 그것과 관련하여 연합군에 속한 여러 나라의 반대를 설득하기 위해 9조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맥아더가 독자적으로 생각해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조언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52)

덧붙이자면 메이지헌법을 만든 것은 헌법에 씌어져 있지 않은 존재, 즉 원로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통반석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대립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조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문의 모순이나 애매함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황에 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법에 대한 ‘해석‘으로서 천황주권설도 천황기관설도 성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6)

따라서 전후헌법의 ‘선행형태‘를 생각할 때, 메이지헌법만을 보면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메이지헌법의 ‘선행형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있었던 constitution입니다. 물론 그것은 성문법이 아니라 국가의 체제 기구, 즉 도쿠가와의 체제입니다. (60)

이윽고 일어난 프랑스혁명에서 실제 주변 나라들의 간섭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791년 8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로이센국왕은 공동성명...으로 무력간섭도 불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것은 위협에 불과했지만, 그것에 대항하여 프랑스 혁명세력의 일파인 지롱드파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긱외 세계와 연결된 귀족들의 반혁명운동을 일거에 봉쇄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한 것입니다. ... 같은 해 6월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후 ‘공포정치‘를 강행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외부로부터의 ‘공포‘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111)

하지만 <영원평화>를 썼을 당시의 칸트는 세계전쟁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영원평화를 위한 국가간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전쟁이 일어나 <영원평화>는 의미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말 제국주의시대에 다시 읽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원평화>가 시민혁명과 분리된 평화론으로만 읽히게 되었습니다. (111)

지성이 충동생활에 비해 무력하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하고, 또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지성의 연약함이란 일종의 독특함이다. 지성의 목소리는 연약하다. 그렇지만 이 지성의 목소리는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게다가 여러번 묵살당한 후 결국은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류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일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인데, 이것 자체도 적잖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실마리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대문이다. 지성의 우위는 멀고먼 미래에 실현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한히 미래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121)

이런 의미에서 일보의 헌법 9조를 문자 그대로 실행헤 옮기는 것은 자위권의 단순한 방기가 아니라 ‘증여‘가 됩니다. 순수증여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군사력이나 금력보다도 강한 힘입니다. 칸트가 인류사의 목표로 삼은 ‘세계공화국‘은 A나 B나 C에서 유래하는 힘이 아니라 D, 즉 순수증여의 힘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136)

물론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에 대한 독일이나 일본의 저항이 있었고 그것이 제2차 대전이 되었습니다. 또 그 후에는 소련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아메리카의 헤게모니를 위협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를 헤게모니국가로 하는 세계시스템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2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아메리카의 협조를 받거나 아메리카의 개방된 시장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소련권을 공통의 적으로 삼음으로써 서로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소련권의 존재는 자본주의국가에서 노동자보호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소련권의 존재는 그때까지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에 있었던 저개발국가들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소련권이라는 ‘제2세계‘의 존재 덕분에 ‘제3세계‘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162)

이스라엘 건국이 강행된 것은 중동에 거점을 만들려는 미국의 전략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 고유의 ‘유대인문제‘를 중동에 전가하고 주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나 기독교도가 장관을 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중동의 종교적 원리주의는 ‘제3세계‘의 이념이 소멸한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이술람권(IS)의 건설이 이슬람권의 전통을 답습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이스라엘 건국의 모방이라고말할 수 있습니다. (174)

그러므로 마지막 문제는 몰락하고 있는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어느 나라가 새로운 헤게모니국가가 되는지에 있습니다. ... 인구만 봐도 중국이나 인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중국이나 인도의 경제발전이 세계자본주의의 종언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176)

자본은 자기증식을 할 수 없게 되면 죽습니다. 즉 산업자본은 성장하지 않으면 끝납니다. 나는 자본축적의 세 가지 형태를 지적했습니다만 그 가운데서도 역시 산업자본적인 축적이 중요합니다. 금용이나 상업은 그것에 근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업자본적인 축적(성장)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끝납니다. (176)

하지만 이상 두 종류의 투쟁은 깊이 얽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개발국가로부터의 반격에 대해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적 국가는 연대를 하면서도 서로 싸웁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개발국가는 신자유주의국가의 헤게모니 투쟁에 말려들어 서로 단절됩니다. 그러므로 연대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 싸웁니다. 이와 같은 혼돈스러운 싸움이 생각지 못한 세계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ㅅ흡니다. (178)

하지만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세계전쟁을 통하지 않으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해결은 오히려 세계전쟁을 저지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일본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헌법 9조를 문자 그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제1장에서 호헌세력이 헌법 9조를 보호해온 것이 아니다, 역으로 헌법 9조에 의해 보호되어 왔다고 서술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비꼬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본인은 헌법 9조에 의해 보호되어 왔습니다. 공상적 리얼리스트는 헌법 9조 때문에 자국을 보호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헌법 9조에 의해서만 전쟁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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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새물결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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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자기대화 또는 자신과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화는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타자 역시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한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가르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바꿔 말해 타자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하는 일이다. (14)

여기에서 공동체와 사회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이란 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교환(커뮤니케이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원천적으로 공통의 규칙을 전제할 수 없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관계에 대해서만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내가 말하는 공동체의 의미도 분명해졌을 것이다. 공동체는 마을, 지역 공동체, 조직,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컨대 공동체란 공동성이며 바로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닫혀 있는 ‘영역‘인 것이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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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서남동양학술총서 20
정문길.최원식.백영서.전형준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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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의 근대를 대응-충격론으로 설명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이다. 곧 서구의 침략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이 지나칠 정도로 부각되면서, 그 과정에서 중국 주위의 여러 민족이 어떻게 식민지로 전락해갔는지, 그런 과정에서 중국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하는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나 류큐, 타이완, 월남이 식민화되는 데 중국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또 중국의 서북에 있는 위구르족이나 몽골족, 티베트족 들은 어떻게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어갔는가? 민족국가의 성립이 최대의 과제였던 근대기에 그러한 희망을 갖고 있던 주변 민족에게 청 정부는 어떤 정책을 취했는가ㅑ? 다시 말해 19세기와 그 전후 시기에 중국이 동아시아라는 지역 속에서 어떤 성격을 지닌 국가였느낙? 또 오늘날의 중국은 과거와 어느 면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 따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42)

청국의 동부로부터 남부에 걸쳐 있던 조선, 로큐, 월남이라는 조공국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씩 지상의 독립국 명단에서 사라져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란 메이지 유신과 같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내부 개혁을 단행하고, 대외적으로 팽창주의 방식으로 진전된 경우도 있을 터이나, 청조의 조공국들에게는 기나긴 식민화의 길을 의미하였따. 그런 와중에서 청조는 보호국인 조공국의 안위보다, 어떻게 하면 조공국을 이용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하는 데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결국 조공 국가로 이뤄져왔던 동남 연안의 방파제들이 무너지면서, 청조는 이제 본격적으로 강대국과 전면적으로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말의 개혁은 이러한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 나온 이른바 과분의 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개혁가들의 주변 국가관도 중화 질서의 유지라는 구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50)

이보다 좀더 나가면, 티베트의 독립에 귀를 기울이지만, 신장에 대해서는 그런 고나심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티베트 독립은 미국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다 달라이 라마라는 티베트의 지도자가 전세계에 ‘티베트적 영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미국이 티베트 독립에 관심을 가지는 진짜 이유는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티베트의 독립 운동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을 견제하려는 외교 전략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웨이징성...와 같은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의 주장과 유사하다. 이들은 중국 정부나 중국인의 일반적 인식과 달리 티베트 인민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중국의 티베트 문제는 중국 내 반체제 운동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60)

이와는 달리 신장은 기독교인들이 거부해 마지않는 이슬람의 땅이다. 게다가 그 서쪽에 있는 서투르키스탄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러시아에 정복된 뒤, 소련 붕괴 전까지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고, 동투르키스탄도 단기간이나마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생각해서 무관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 전통이 영국의 그것을 계승한 탓일 수도 있고, 또 동투르키스탄의 독립 운동이 카자흐나 터키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된 탓일 수도 있다. (61)

다시 말해 동아시아적 근대는 아편전쟁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청 제국의 팽창이 극도에 달했던 18세기 중기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또 근대기의 민족주의 역시 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응한 중국적 형태 이전에 중국의 팽창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바로 이 점에서 근대 중국은 조공국과 소수민족의 희생 위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국가와 민족 중,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류큐는 일본의 일부이고, 월남은 격심한 전화 속에서 벗어나 이제야 새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 티베트 민족과 동투르키스탄인들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고투를 벌이고 있으며, 몽골족 역시 내외 몽골로 분단되어 있다. 현재의 동아시아 지역이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이미 두 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63)

당시 문단을 살펴보면, 장타이옌이 <문학총략>에서 말했듯이, 구문학 쪽에서는 완원 등의 변문파처럼 개인의 수사적 능력을 중시하는 풍조가 휩쓸고 있었다. 이를테면 시문이 공동체의 노래이던 시기는 일찌감치 사라졌다는 말이다. 20세기 초 지식인들이 시문이 아니라 소설을 보다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에는 분명 변문파 등의 시문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었을 법하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장르가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보다 더 밀접한 장르에 대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소설 장르의 대중성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설 장르 본래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이들에 의해 읽혀졌을 법하다는 말이다. (291)

왕꾸어웨이가 중국인의 현세적이고 낙관적인 사유에 대해 그토록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관주의에 보다 철저하게 몰입할 수 없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리쩌허우가 중국인의 이성의 특징이라고 한 ‘실용 이성‘의 작동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인들은 고대 그리스처럼 추상적 사변의 길로 나아간 것도 아니고, 인도처럼 해탈의 길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 세도의 실용 탐구에 집착한다. 따라서 실용 이성이 강조하는 것은 주로 윤리적 책임의 자각이다. 왕꾸어웨이의 사유에 관한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실용 이성의 작동으로 말미암아, 인식론과 미학이 언제나 윤리학으로 복속되고 만다는 점이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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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文과 노벨novel의 결혼: 근대 중국의 소설 이론 재편 서남동양학술총서 16
이보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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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른바 반영론에서 요구하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전통적 사유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낯선 것이었을 성싶다. 전통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대단원주의,’ 전통 시론의 핵심인 ‘온유돈후…’의 시교… 등은 우주적 ‘화해…’라는 상상을 환기시킴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게끔 했다. 20세기 1920년대 중반 이후 반제국주의의 과제가 아무리 절실했다고 하더라도 구호성의 ‘혁명 문학’에 그렇게 쉽게 넘어갔던 것과, 사회주의 체제 시설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같은 체제의 구소련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정 또한 이와 무관할 수 없다고 하겠다. (22)

중국 내부로, 주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론이 서구적 근대화가 세계사적 근대화의 유일한 도정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됐다는 점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폴 코헨도 스스로 인정했듯이 중국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은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한 분석을 약화시킬 뿐더러 그것을 도리어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중국에서 유형처럼 출판되고 있는 ‘지방 문학사’가 근대화 과정에서의 특정 지방의 특권이나 역할을 과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등, ‘중심-주변’의 논리를 오히려 강화하는 데로 빠지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또한 ‘억압된 현대성’에 대한 복원은 중국근현대 문학사의 ‘실상’을 가림으로써 또 다른 ‘억압’을 낳고 있다. 누가 뭐라고 사더라도 중국 근현대 문학사는 좌익 문학의 주류성에 의해 지배되어온 것이 엄연하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만청 시기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실제 역사를 은폐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것을 왜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말이다. 국내의 연구자들이 ‘다양성’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가상되는 개념으로 결론짓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 속에 있다 하겠다. (35)

그런데 소설 ‘이론’에 대한 연구라고 했지만 왕꾸어웨이의 <홍루몽 평론…>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서…, 발문…이거나 신문 광고 형식을 띠고 있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론’의 구성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글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테면 ‘근대’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비평’이나 ‘이론’에 미치지 못하는 직관에 의지한 ‘감상’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인 글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단순함’ 속에서 역사적 의미에서의 ‘동력학’을 읽어내야 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만청은 말할 것도 없고 5.4, 그리고 신시기에 씌어진 글들이 지니고 있는 외면적인 ‘졸렬함’은 외국인 독자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이 당혹감은 그와 같은 ‘졸렬한 글’들이 중국 문화의 ‘생명’을 이어주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과 동시에 맛보게 되는 감정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어쩌면 직관적 감상적 비평의 함의를 제대로 읽어내는 길이 중국적 ‘문학’의 진정한 함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이며, 동시에 ‘제도’로서 지나치게 자율화되어버린, 그리하여 인문학의 사명을 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서구적 근대 문학 개념을 반성적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적 진단을 가져보기도 한다. (44)

청이 세워질 당시만 해도 신사의 계층적 성격은 대다수가 지주였으나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행정 전문가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신사의 자치권이 차츰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달리 말하면 다음 세기의 정치 세력이 될 자격을 하나하나 갖추어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만청 개혁의 주창자들 중에 지방의 신사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명 청 이래의 권력 분점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하겠다. 이들은 기군, 구호 사업, 지방 관개 공사, 공공 질서의 보존 등의 역할을 맡으면서 정치 수업을 착실히 쌓아나갔던 것이다. 청말 백련교도의 난은 물론이고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왕권이 이들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에서 신사들이 독립적인 군사 기구까지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7)

꺼자오꾸앙…이 평가한대로, 불교의 ‘개공…’ ‘유식…’은 주체의 ‘자기 동일성에 대한 집착…’을 와해시켜 고유 관념을 해소하고 지식인들의 사유의 개방을 촉진시켜주었다. 다시 말하면 지고지상의 지배담론을 부정하고 새로운 틀을 중건할 기점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 문화의 최대 이점은,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중국 정통 학문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구 문화를 흔쾌히 받아들이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었다는 데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불교 문화권은 유가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 사이에 있었으므로 불가 사상은 서…도 아니고 중…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중국의 대승 불교는 당대 이래 이미 중국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70)

20세기 초의 중국인들은 반봉건과 반제국주의라는 양자 사이에서 반봉건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새로운 것’으로서의 ‘서’에 대한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 사유의 독특한 점은 전통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하여 새로운 세기를 열겠다는 열망이 대단히 강렬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20세기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을 조절하는 기제는 ‘동’에 있었다는 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것’이 ‘동’을 조절하는 일방적인 주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88)

언어와 문자가 합일된 상태는 한갓 몽상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와 문자 사이에 놓인 만리장성을 제거하려는 시도 자체를 헛된 것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고 한다면, 20세기 초 지식인들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양자의 분리를 당연시했던 고전 시대의 상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언어와 문자의 분리가 인간의 감수성을 어떻게 제한하고, 또 그것을 표현해내는 데 얼마나 장애가 되는가 하는 점은 전혀 안중에 없다. 실제로 고문으로 이러한 것들—인간의 감수성, 실제적으로 지식인의 감수성—은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백화는 다만 ‘대중성’이라는 목표 속에서만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40)

그런데 루쉰의 "이용하지 않는 것의 쓰임(不用之用)"과 왕꾸어웨이의 "무용의 쓰임(無用之用)" 사이의 갖고 다름을 잘 새겨 따져볼 만하다. 축자적으로 살펴보면 후자는 무용 그 자체가 바로 유용이라는 말이며, 전자는 문학이 본래적으로 무용한가의 여부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측면이 있으며 그 유용함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통해서 유용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즉 문학의 도구적 사용에 대한 의식적인 부정을 통하여 참다운 ‘소용’에 도달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하겠다. 문학의 무용함을 전제했을 때 빠지기 십상인 ‘유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근간이 바로 이 ‘불용’이라는 사고 속에 담겨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161)

따라서 서구 근대적 인간형이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하여 자신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이른바 시민의 ‘공공 영역’을 형성해나간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근대’적 인간형은 보다 자각적으로 전체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선택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오히려 필연적으로—시민의 ‘공공 영역’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근대’적 영웅은 전자의 부정적 측면인 ‘단자…’화된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게 가지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으나, 민족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에 대한 보다 철저한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아Q’의 열근성을 극복한 인물이 아니라 집단에 쉽게 굴복하는 <아Q정전>이 예기한 대로, ‘아Q’ 그 자체로 되돌아가기 십상이었음을 그들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252)

소설 이론가들은 "내면의 발견," 혹은 주관성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가 있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의식적인‘ 거부라고 하는 것은 만명 이래 주관성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고 있었고 <홍루몽>이 작품으로써 그것을 반영하고 있었음에도 외려 외면하려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소설 이론가들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배제 전략은 적어도 ‘중국 현대(문학)사‘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하겠다. 1920년대 낭만주의 경향이 한때 중국을 휩쓸어갈 때 잠시 잠깐 그것에 탐닉하려는 시도들이 있긴 했지만 이내 ‘혁명의 물결‘ 속에서 여성 스스로마저도 그것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국 여성 해방론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정치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억압된 ‘여성적인 것‘을 복원하는 데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중국의 ‘근대‘ 소설은 근대 서구 사회에서 소설을 ‘가정‘ 혹은 ‘개인‘의 독서로 묶어두기 위해서 서정성 내면성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흘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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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기원 너머의 역사담론 3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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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광종과 성종의 개혁 이후 한 세기가 조금 넘게 고려의 국왕들은 조정과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을 갖게 되었지만, 왕조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중앙의 세습적 가문에 다시 한 번 직면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므로 고려 전기의 국왕들은 관료 제도를 시행해 왕권을 강화했지만, 낮은 수준의 사회적 분화에서 초래된 한계를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정치적 역할은 귀속적 집단에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국왕들은 강력하고 포괄적인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50)

귀족적 문반 가문의 주도로 정치권력의 집중이 점진적으로 진행된 과정은 1170년...의 무신란으로 차질을 빚었는데, 그 사건은 부분적으로는 더욱 무례하고 횡보해진 문신들의 행동에 무신들이 분개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무신이 지배한 시대는 문신의 조정 장악은 끝냈지만, 왕권의 부흥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50)

고려 중기의 무신들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국왕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국왕을 폐위시켜... 자신들이 선호하는 왕실의 다른 인물로 교체함으로써 효과적으로 국왕을 꼭두각시로 전락시켰다. 대체로 고려 중기 무신의 흥기는 고려 정치사의 커다란 단절로 보이지만, 최씨와 그의 지지자들이 왕조의 관원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독재체제는 1170년의 무신란 이전 신하가 국왕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경향의 정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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