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봄
이시다 미키노스케 지음, 이동철 외 옮김 / 이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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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함: 1. 춤 노래 피크닉 명절 종교 같은 (귀족) 생활-미시사에 올인, 2. 문헌에 기반하되 상상력 발휘한 훌륭한 내재적 접근. 일반 역사서처럼 조감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시선, 안에서의 느낌을 만들어 냄. 그 시절에 취하다, 곧 시들 것 알면서도 만개한 장미 향에 취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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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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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원칙의 시대‘라는 부제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은 정작 책을 읽으면 느낄 수 없음. 오히려 송대&그 신유학은 그 이전 세대와는 단연코 대비되는 합리성 보편성 실용성 풍요와 활기로 두드러짐. 요 금 서하 먹여살린 기술&교통&경제 발달이 인상적. 그 기반에서 나온 ‘신취향‘도 매력적(전족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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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오오키 야스시 지음, 노경희 옮김 / 소명출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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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또렷하고 시야 넓은 입문서. 과거 급제 못/안한 명말 지식인들이 사는 법은 오늘의 잡리스 학위소지자들과 유사. 송과 청 사이에서 과소평가되던 명말 강남 출판미디어붐의 역동성 재평가하고, 이것이 청 인정 않고 명만 받든 조선과 에도에는 어떤 영향 미쳤는가,하는 흥미로운 주제로 나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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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오오키 야스시 지음, 노경희 옮김 / 소명출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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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자료를 통해, 자손이나 문인, 친구 등이 활발하게 선인...의 문집을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집...>, 즉 가정 만력 이후 천계 승정 연간에 이르는 사람들에게서 문집을 판각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섭옹...이나 송렴... 등과 같이 원말 또는 명초에 저자 생전의 시문집이 간행된 경우도 있지만, 가정 만력 연간에 이르러서는 자손이 진사에 급제한 일 등을 계기로 하여 조상의 문집을 판각했던 예도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윤집...>을 보면, 별집...의 간행이 승려나 부녀자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원이야말로 경전 인쇄의 가장 큰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승려의 문집이 간행된 것은 한편으로 매우 당연한 일이다). (42)

인쇄출판의 초창기, 당... 오대...부터 북송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촉...이 출판의 중심지였다. 이는 우선 이 지방이 종이 및 목재의 산출지라는 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남송...시대가 되면, 섭몽득...이 <석림연어...> 권8에서 ......라고 한 것처럼, 항주 사천 복건 그리고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출판이 성행하게 되었다. 항주는 섭몽득 당시 남송의 수도...였다. 이곳은 대운하의 남쪽 종점이자 강남 지역의 경제 중심지 중 하나였으니, 여기서 출판업이 꽃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종이 산지로 유명한 소흥...이 바로 옆이라는 이유도 있다. 복건의 건양은 송대 이래 전국적인 출판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49)

족보 또한 가각본의 한 종류였다. 족보를 인쇄할 때는 목활자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사람 이름으로 같은 글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또 조판이 완성된 뒤에 이를 임의로 고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족보가 거의 정덕 가정 연간 이후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면, 족보의 보급 또한 인쇄술의 보급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63)

이제까지 살펴 본 것처럼, 방각본이라 하면 곧 복건의 방각본을 떠올릴 만큼 조악한 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명의 가정 만력 연간에 이르러 방각본의 성격에도 한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앞서 육심...의 <금대기문...>이나 호응린...의 <경적회통...>에서 소주의 책을 정교한 판본이라 칭찬하였는데 이 지역의 방각본 중에 정교하게 제작된 책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68)

각공의 이름을 표시하는 방식의 변화와 함께, 이러한 분업체제의 또 다른 결과로 ‘명조체...‘라는 글자체가 완성된 일을 들 수 있다.... 타케무라 신이치...의 <명조체의 역사...>에 따르면, 명조체가 탄생한 것은 정덕...에서 가정... 연간에 걸친 시기의 일이었다고 한다. 기하학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몰개성적인 명조체가 등장한 것은, 조판의 신속화, 좀 더 구체적으로 분업화의 필요를 배경으로 하였다고 한다. (80)

이상의 기록을 통해, 규촌의 각공들이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북경 협서... 강서... 등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로 이주하고 있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한 마을 출신의 동족이 하나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 규촌 황씨 등은 이른바 동족... 길드의 좋은 예가 된다. 그중에서도 25대부터 37대에 이르기까지, 즉 명말 청초에 해당하는 시기에 떼를 지어 남경 소주 항주로 이주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 도시가 신안상인들의 중요한 상업거점에 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공들의 이동과 신안상인의 활동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명말의 출판은 실질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이끌어 온 것이다. (101)

후에 동기창 스스로도 집이 불타버린 사건을 ‘민초...‘라 불리는 것을 꺼리며, ‘사초...‘라고 하였다. 이러한 동기창의 발언은 실제로 일을 저지른 것이 누구건 간에 결국 이 사건의 배경에는 사인들의 선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동기창의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의 진원지는 앞 장에서 서술했던 신중간계층으로, 여기서 그들이 ‘인쇄물의 배포‘라고 하는 새로운 전달 수단을 통해 여론조작을 일으킨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159)

당사의 활동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건국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이미 쇠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청대의 학술에 끼친 명말 당사운동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명이대방록>을 지은 황종희...는 동림파의 영수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부친은 위충현에게 참살당한 황존소...였다. ... 일반적으로 청대의 학자들은 명대의 학문을 공소한 의론이라 하며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자료를 근거로 두면서 자신의 독서 성과를 보이는 청조 고증학의 방법론 그 자체는 한 사람의 학자가 경사자집...에 걸쳐 많은 책을 볼 수 있는 객관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청조 고증학이 태어날 수 있던 물리적 기반은, 인쇄의 보급을 통해 총서를 필두고 수많은 책이 간행되면서 종전에는 입수하기 어려웠던 책을 개인이 쉽게 볼 수 있게 된 명말에 이르러서 준비된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기반으로 보다 정밀한 학문을 이룬 결과, 전대 학문의 결점을 발견할 수 있던 것이 곧 청대 학자들에 의한 명학...의 비판인 것이다. (171)

그렇게 본다면, 명말에 다수 등장했던 산인 자체가, 그야말로 출판문화의 부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출판업이 성행했던 강남 지방 이외에서는, 산인의 존재를 들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진계유의 후배였던 산인 이어...가, 청초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방대한 분량인 자기 저작의 판목을 들고 항주에서 남경으로 옮겨와 출판 활동을 하면서, 자기 책을 무단으로 출판하는 일에 엄격하게 항의했다는 일화에서는 ‘산인...의 면모‘가 생생히 나타나고 있다. 즉 이어에게 있어서 판목(판권)은 매우 중요한 생활양식이었던 것이다. (192)

보다 넓은 시야에서 지식인과 출판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예전의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하는 것 이외로는 명리...를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출판‘이라는 새로운 활동의 장이 출현하게 되면서,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명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신분적으로는 일개 생원에 불과했던 진계유가 유명인이 될 수 있던 것도, 명말이 일어난 출판업의 융성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3)

에도시대 초기에는 명말의 중국과 이렇게 문자 그대로 ‘동시대‘ 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일본의 ‘쇄국...‘과 중국에서의 ‘명청교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 겹치게 된다.
......
명왕조의 멸망 이후,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혹은 청조 토벌을 위해 지원군을 요청하러 온 정성공...과 같은 이들, 혹은 청의 세계에 사는 것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망명해 온 주순수... 등과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명왕조에 절의를 바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당시의 일본인은 ‘명말의 문화‘를 배웠다. ‘이적‘인 청의 문화는 적극적으로 수입되지 않았으며, 설사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이 한참 흘러 에도 후기에 이르러서야 일어날 수있던 일이었다.
‘쇄국‘과 ‘명청교체‘를 통해, 에도시대 사람들에게 중국의 시계는 ‘명말...‘을 가리킨 채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27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금지되었음에 틀림없을 책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 중국의 출판통제는 이미 출판되어 나온 책을 대상으로 하여 이 책은 적절하지 않으니 책과 판목을 불태워 버려라, 혹은 불온한 부분을 삭제해라, 등과 같은 명령의 형태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일본 등과 같이 출판 이전에 사전심사를 실시했던 것이 아니었다. (279)

중국에서는 인쇄술이 보급된 시기에 서점뿐만이 아닌 개인이 출판한 책들도 증대하고 있던 것이, 출판 수량의 증가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중국의 출판은 본질적으로 ‘가각...‘의 형태라 할 것으로, 결국 ‘방각...‘이라고 하는 것도 가각의 특히 전문화된 형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사회의 근저에서 가장 힘을 갖고 있던 것은, 종족의 조직이다. 그 종족이 출판의 주체가 된 경우는 국가도 건드릴 수 없었기에, 아예 사전에 통제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282)

공간에 높은 지점과 낮은 지점이 있는 것처럼, 시간에도 높은 지점과 낮은 지점이 있다면, 그 최고 지점은 1640년부터 1660년의 기간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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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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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질문:

  • "그는 주국 서북부를 다시 정복한다는 희망을 버렸으며 다만 난주... 한 곳만이 송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지도4)." p. 121 > 그런데 지도4에 난주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 와이? 
  • 송대에는 (정신적 명상의 반대로서) 문학적인[문학적?? 어떤 의미로 쓰인 것?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 명상이 자연스러움을 얻고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기술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정토종 추종자들은 아미타바 부타(아미타불)’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염불 행위가 개인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믿었다. 송대에는 정토 사회가 도처에 생겼고, 특정한 행사 때면 수천 명의 신자가 모여 1000번씩 부처의 이름을 불렀다. 당시 인기를 얻었던 두 종파의 승려들이 서로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가운데, 연수는 처음으로 선과 정토 불교를 모두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212)
  • 송대 불교의 교리는 현상적인 세계는 실제가 아니고 다만 환상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유학자들은 모든 현상이 환상임을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고, 세계의 공허함이라는 불교의 교리를 원리()와 물질적 힘()의 개념으로 대체했다. 11세기에 장재는 기가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고 스스로 물질로 굳어졌으며, 모든 물질은 기로부터 일어나서 또 기로 흩어지며, 그리고 또다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세계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로 끝나지 않는다. 장재는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 관계에도 생명력이 되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의 이론을 아주 요령 있게 설명하였으며, 지치거나 병든 자, 장애인과 불구자, 과부와 고아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간이 형제라고 결론 내렸다. 유교의 인개념을 지각을 가진 존재 모두를 포함하는 범위까지 확대함으로써, 유학자 각자에게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는 가족을 떠남으로써 일상의 임무에서 도피할 것을 옹호하는 불교와는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 거이었다. 장재는 한편으로 불교를 공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박애주의적 공익 개념뿐 아니라 그 학식[학식?? 장재의 학식? 아니면 불교의 학식? 당시, 불교에 대한 유교의 포지셔닝을 아주 요령 있기 설명한 단락인데 요 단어만 뜻이 불분명하네.]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216)
  • 해시와 진사과 시험 외에 각종 과거 시험인 제과…’는 행정직에 나가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길이었다. 왕안석은 1072년에 제과를 폐지했는데, 아마도 오직 하나의 문학 부문[제과는 우리 식으로 하면 잡과일 터인데 하나의 문학 부문이란 전혀 안 맞는 번역. Literature라는 단어가 쓰였다면 문헌이라는 의미이겠지, 왠 문학??]을 외는 공부만 가지고서 관리가 되는 사람들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50)

군대의 역량, 전략적 혁신, 국가의 패권으로 평가한다면 송은 허약한 왕조였고 마침내 짓밟히고 말았다. 천천히 진행된 송 왕조 멸망의 이유를 한 가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나, 군사적 효율성보다 문치를 강조한 것이 국가의 약화와 정부의 사기 저하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송의 필사적인 노력은 끝내 실패했다. 그러나 전성기의 송은 중국 역사,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세련되며 지성적인 사회로 꼽을 수 있다. 송이 통치한 3세기 동안 유교 이념이 공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 고대 사상의 도덕관과 교육관이 정부 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송 제국의 창의적인 통치자, 학자인 관리들, 예술가들이 회복시키고 재가동한 유교 가치와 사고방식이 뒤이어 건립된 모든 왕조들의 교육 제도, 정부 체계, 민간 사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한족의 후예들 사이에 수백 년간 지속될 중국인 특유의 의식을 강화하였다. (28)

북부 구역은 거란 고유의 제도인 ‘국제…’로 다스렸는데, 이 구역에 상경과 중경이 있었으며 거란족의 고향이기도 했다. 남부 구역은 ‘한제…’로 다스렸다. 남경, 동경, 서경이 있고 한족과 발해 및 다른 정주 민족의 본거지였던 이 지역은 계획적으로 당…의 조정을 모방한 체제로 운영되었다. 북부 행정부는 거란족만 관리로 채용하고 남부에 비해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남부 지역은 황족인 야율 씨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야율 씨족 남자들은 모두 소…씨 종족으로부터 아내를 들였으므로 소씨 씨족은 이 점에서 정치적 발언권을 가졌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이러한 지배 체제는 다민족 사회의 독특한 특성과 요구에 잘 들어맞았다. (57)

요 황제들은 금고에 넉넉히 보유한 은괴를 이용해 신하들의 충성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있었다. 그들이 중국에서 세폐라는 명목으로, 그러나 사실상 조공으로 받은 비단 제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물건이었으므로, 요는 충분한 이익을 남겨가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성종은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 988년에는 한족 신민들만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진사 시험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요의 영토 내에 있는 한족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였다. 얼마 안 되여 해마다 20~40명의 진사들이 배출되었다. … 994년에는 중국 방식을 본뜬 요의 역법…이 소개[‘창안’이나 ‘도입’이겠지]되었다. (59)

10세기 서하와 요의 관계는 송과 북방 국가들과의 관계만큼 갈등이 컸다. 송 진종의 조정은 군사력으로 요와 서하를 무찔러서 당 제국에 속했던 북쪽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송은 호전적인 북쪽 국가들과 감당할 만한 평화 조건을 협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005년 요와의 쌍무적인 평화협정과 1042년의 재협상, 그리고 1044년 서하와의 협정 등을 이루었다. 1980년대 초 서하 전쟁을 제외하면, 성의 북방 정원들에 대한 외교 정책을 특징 짓는 현대의 단어는 "공존"이었다. 송은 비단과 은으로 해마다 교부금(세폐)를 지불함으로써, 무익한 전쟁 출동에 낭비될 거액의 돈을 절약하였다. 요와 서하는 그 수입을 가지고 자기 종족들과 동맹자들을 부양하여 충성을 확보하며 정치적 권력을 유지했다. 세폐를 통해 확보된 공존은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 송이 북방 변경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이었다. (63)

서적 편찬 작업이 황제와 학자 관리들 사이의 업무상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고 중국의 문화와 지성의 역사에 대한 상호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종의 서적 편찬 사업에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는 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심쩍은 상황에서 형을 이어 즉위한 태종은 태조 밑에서 복무했던 학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자기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잠재울 수 있었다. 더욱이 태종이 다시 송이 정복하거나 평정한 나라의 학자들을 편찬 사업에 채용한 사실도 분명, 자국 왕들의 죽음으로 인한 하자들의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800년 뒤에 건륭제는, 송 태종의 편찬 활동이 가진 주요 목적은 태종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제위를 "찬탈"한 황제로서 덕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고 논평했다. (86)

불교의 대중적인 출판에 비교하면 200년 이상 뒤떨어지긴 했지만, 이 책들의 출판을 시작으로 10세기 중기가 되면 유학자 사회에서 인쇄물이 소통의 매체로 인식되었다. (87) ……
송 사회의 경제적 풍요와 일상적인 인쇄본의 통용이 없었다면, 특히 문관으로 출세하고자 열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절한 가격으로 인쇄본 책을 이용할 수 있는 변화가 없었다면, 중국 전역에서 유학이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부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90) ……
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20~30년 전 개인용 컴퓨터가 타자기를 대신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났던 문서 쓰기와 작문 분야의 혁명에 비교할 만하다. (91)

중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화 조약은 송 황제가 요의 황제를, 또 요 황제는 송 황제에 대해서 자신의 상대로 인정함으로써 거의 대등한 관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 중국은 자신의 우위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형제애’라는 허구에 합의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오래된 중국의 가족관계를 모방하여, 요 지배자가 ‘동생’이 되어 송 지배자를 ‘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같은 조약이 가져올 형제 국가의 실제 결과에 대해 송 시대의 사람들은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송 왕조는 한 번도 ‘당 왕조의 충만한 영광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사실은 1042년에 이른바 외교적 대등 관계와 형제 관계를 강화한다면서 1005년 조약의 내용을 재협상하게 되었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송의 세폐 의무가 비단 30만 필과 은 20만 냥으로 증가했다. (96)

진종의 몰락은 1006년 구준의 유배에서 시작되었다. 구준이 고하는 성인의 충고가 없어지자, 진종은 자신의 정치적 허약함에 굴복하여 점차 소인배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들은 1022년 3월 23일 진종이 사망할 때까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다. (98)

범중엄을 최고 지위에 임명했다는 것은, 공익을 위해서 모든 정치력을 단합시키고자 했던 인종의 기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보다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여이간은 범중엄의 임명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인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범중엄의 개인적 결점이 워낙 잘 알려져 있었고 반대파에게 쉽게 이용될 수 있었다. 그는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동료에게 모욕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대상이 황제일지라도 그의 비판을 피해 가지 못했다. (108)
……
이 원대한 개혁을 실행하는 데만 열중했던 범중엄과 개혁파 동료들은 그들의 정적들이 벌이는 술책을 간파하는 수완이나 외교적 경험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애초에 그들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연호를 딴 이른바 ‘경력신정…’이 실패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종이 우유부단하여 범중엄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고 마지못한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조정의 논쟁이 개인적인 정치 공격의 수위까지 가게 되자, 개혁을 옹호하는 주장은 사라졌다. 적어도 인종의 재위 기간에는 그랬다. (109)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그에 따른 과중한 조세 부담만 가지고는 이주 현상에 대해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화북 지역의 평원과 하천 유역을 따라 형성된 중국의 가장 비옥한 땅은 수백 년 동안 거기에 자리 잡고 있던 대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강수량이 곡물생산에 안정적이며 또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미경지…를 찾아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10세기 말부터 12세기 말까지 지속된 이른바 제3소빙하기의 기후 변화기 동안 평균 온도가 섭씨 1.5도나 떨어졌다…. 그 정도면 약간의 하강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작황의 상황에 생계 문제가 달려 있는 농민들은 그 변화를 알아챘다. 강설, 결빙, 강수와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점점 더 심해지고 불규칙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44)

화북 지역은 토지 소유권이 고착되어 있고 북쪽 이민족 정권의 군사적 침략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져갔다. 게다가 이제 제멋대로인 자연의 위력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11세기 송의 농민들은 조상들이 수백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환경이 전혀 다른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위험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것에서 정착하면 새롭고 더 큰 경작지를 개척하여 1년에 몇 차례 작물을 거둘 수도 있고, 또 농민과 농토에 대한 정부와 지주들의 통제가 북쪽보다 덜할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이러한 인구 이동의 결과로, 개봉이 함락되기 25년 전인 1102년에 이미 중국의 1억 100만 명의 인구 중 75퍼센트가 회수와 한수 이남에 살고 있었다. 회수 대신 양자강을 경계선으로 보면 전체 중국인의 70퍼센트가 당시 남부에 살았던 셈이다. (148)

몽골족은 오늘날 몽골의 동북부 바이칼 호에서 남동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케룰렌 강과 오논 강 부근의 초원에 살던 부족민이다. 그들은 양, 소, 말 등의 목축 생활로 몇 백 년 동안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12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제3소빙하기로 인해 연평균 기온이 떨어지고 기후 조건이 악화되어 몽골 부족은 그들 자신들의 영역 밖에 있는 더 좋은 초지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이웃 부족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몽골족이 처음으로 중국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139년에 금을 물리쳤을 때였다. 1147년 화의에서 금은 몽골에게 매년 소와 양, 쌀과 콩 그리고 풀솜…과 비단을 진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는 금이 세폐를 주는 입장이라는 것만 빼면, 그보다 5년 먼저 금이 송과 맺은 합의와 거의 같은 방식이었다. (171)

몽골이 금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킨 1234년에는 동전 대비 지폐의 가치가 급락하여 지폐로 급료를 받는 주민과 병사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 정청지의 제안은 대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관리들은 그 대신 상인들에 대한 조세를 추천했다. 지폐 가치를 보전하기 위한 제안들이 결국 모두 실패하자 1246년까지 천문학적인 수치로 통화 팽창이 가속화되는 사태를 막지 못했다. 농사의 풍작 덕분에 국가의 조세 수입은 계속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송 경제에 끼친 그러한 인플레이션의 악영향은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주 계급의 부를 늘리는 데 유리했던 당시의 화폐제도를 바꾸는 개혁을 어느 누구도 감행하지 못했다. (181)

송이 다시 한 번 오랑캐의 위협에 당면했던 바로 그때에 ‘위학’이 국가의 정통 학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234년에 금을 무너뜨린 몽골 제국이 유교적인 국가임을 과시하는 요소들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자임하기 위해서 송은 강력한 중국적인 이념이 필요했고, 주희가 당시 시대적 변화에 맞게 갱신한 유학은 이러한 요구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206)

요 왕조의 지배자들은 남쪽에 이웃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문화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거란족은 일찍부터 국가 지배를 위한 이념적 기초로서 유교를 받아들였으며, 유교의 번잡한 의식 절차들도 함께 수용했다. 그러나 사적인 삶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거란 부족의 샤머니즘적이 의식은 여전히 번창했다. 거란족은 태양을 숭배하고 부족 조상들의 혼령과 여자 조상들에게도 말, 소, 양, 거위 등의 제물을 풍성하게 바쳐 공경을 나타냈으며, 의례적인 사냥 등 여러 가지 집단 행사들을 가졌다. 황제가 상징적으로 재탄생한다는 때이 치르는 재생의…는 12년마다 황제 자신이 재생실…이라는 곳에서 거행하였다. 그로써 황제의 통치 권한을 확고히 하고 새로운 12년을 위한 거란 귀족들의 자신감을 갱신해주었다. (222)

10세기와 11세기의 정치와 사회 변화는 유교와 불교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조류의 사상가들은 좋은 유학자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우선 고대의 진정한 학문을 전파하는 것이며, 동시에 개인에게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도교와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송 황제들이 호의적이라는 점에서 유교는 분명히 경쟁에서 유리하긴 했지만, 불교든 유교든 시대의 도전에 적합한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그들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227)

송대 중국의 승려들이 불교의 중도파 쪽으로 이동하면서 유교적인 사대부 계층에 대한 불교의 영향력이 커졌다. 불교의 사안들과 맞닥뜨릴 때, 유교 사대부층은 그들과 토론하며 유교의 윤리 체계를 분명하게 규정해서 유교와 불교의 차이를 외부 세계에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지성적 담론은 철학적 설명에서부터 인류애의 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적 분야를 망라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형식들은 불교의 사고와 경험을 조직화하고 또 논변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불교 사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송대에 불교는 신유학에게 성숙한 지성계의 이웃이자 경쟁자가 되었다. (228)

서방 세계에서 이해되는 ‘공무원’이나 ‘행정 사무관’ 같은 단어를 가지고는 송대 사대부들이 누린 지위도, 그들의 지성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 등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송의 군주와 고위 관료들 사이에 얽힌 관계는, 예를 들어 1040년대 장방평…이 인종에게 한 대담한 발언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나라를 폐하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관리들과 협조해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 송을 창건한 황제 면전에서는 내뱉지 못했을 이 발언은 황제 권위에 대한 달라진 해석을 반영한 것이며, 공자와 다르지 않은 놀랄 만한 독립적인 정신과 자부심이 송대 관리들에게 있었음을 보여 준다. (235)

이렇게 둘로 갈린 등급제는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소모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무런 실무를 하지 않는 관직 소지자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낮은 명예를 가진 관리들이 각계각층에서 정부의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 그러나 실제로는 음보제를 통해 관계에 들어간 관리들은, 최하등급에 가까운 차견과 업무가 주어지더라도 그것보다 한두 계급 높은 기록관의 등급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이 신참은 보통 과거 급제자보다 나은 봉록, 혜택, 특권과 더불어 몇 년의 경력이 앞서가는 이득을 얻었다. 남송대에 오래된 권세가들은 이러한 전략을 통해 사회적 명성과 영향력을 회복했다. (258)

부유한 집안의 딸들은 문학적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여성의 올바른 행실에 관한 저술들을 통한 교육이 많았다. ...... 그러나 만약에 딸 가진 부모들이 유교적인 원칙의 엄격한 제약을 절대적으로 따랐다면, 송대의 가장 유명한 여류 시인이자 서적 수집가, 또 골동품 애호가였던 이청조…가 순수하고 고상하며 그렇게 감정적 격정이 가득한 시들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277)

몽골이 침입하여 남송을 멸망시키고 몽골의 혼인법을 중국 여성에게 강요함에 따라 젠더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유목적인 관습을 보전하고자 했던 몽골은 1260년을 시작으로 여성의 법적 재정적 개인적 자율권을 박탈했고 따라서 여성이 가족의 처분 아래 속박되게 만들었다. 몽골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부계 가족의 강화를 주장하는 정통 신유학 이념과 맞아떨어지며 이용될 수 있었다. "모든 권위와 경제권은 가장에게 있다"는 송대 가부장권 주장자들이 바라던 생각은 그들의 왕조가 무너진 후에야 현실이 되었다. 과부에게 수절과 시가에 대한 봉사, 자신의 개인 재산 관리를 포기하라고 했던 고대의 훈계가 몽골 통치 아래에서 처음으로 법으로도 지지를 받았다. 수절 숭배가 번성하기 시작하고 재혼에 대한 비난이 심해졌으며 여성의 재산권과 재정적 독립성이 증발해버렸다. (281)

매요신은 이 넷 중에서 가장 윗세대 인물인데, 그는 죽기 겨우 9년 전에서야 마침내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동시대 시인들과는 달리 그는 단순하고, 하찮고, 평상적이며, 추하기까지 한 일상의 사물과 사건들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다. 그는 진흙 구덩이 안에 우글거리는 지렁이나 구더기, 이 등 운문에는 거의 출연 못하는 매력적이지 않은 미물들에 대해서도 시를 썼다. 심지어 차분하고 단조로운 문체인 그의 초기작은 회화법에서 새롭게 나타난 사실주의와 꼭 맞았다. 나이가 들수록 가의 시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사회나 사회 지배자들을 비판하는 시가 많았다. (311)

당대 이전의 회화에서는 관심의 초점이 인물화에 있었고 자연과 풍경 묘사는 그에 비해 부차적이었다. 당대의 풍경화는 교훈적인 기능을 가졌으며 유식한 관람자라면 그림 안에 있는 풍광과 인물의 묘사를 ‘역사적’ 기록으로 읽을 수 있었다. 산수화가 서사적이어야 한다는 그 일차적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9세기 말과 10세기에 중국의 문화적 중심이 북에서 남부와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불가분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 인간상, 역사적 사건, 종교 의식은 재해석의 대상이 되고 그런 과정에서 회화에서 갖는 중요성이 풍경에 비해 쇠퇴하였다. 산수화는 자연 자체를 모두 아우르는 ‘유기적 통일체’로서 묘사되었다. (324)
……
산과 안개 속의 계곡, 폭포, 하나씩 따로 자리 잡은 나무와 건축물들은 자연에 내재한 정연한 원리에 대한 화가의 신념을 나타내려고 의도된 것인데, 이는 유교적 우주론과 천일합일 이론에 부합되었다. 즉 "사람의 마음을 확장하면 전 세계의 사물을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326)

많은 송대 화가들이 과감하게 축소된 화면에다 산수화의 진수를 표착하고자 노력하던 바로 그때, 실제 생활에 대한 묘사가 회화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감수성의 표현은 회화의 주제와 화법 양면에서 나타났으며, 유교를 일상생활과 관련된 생동력을 가진 것으로 되돌린 주희의 <근사록>과 동시대에 발생했다. 주희의 <근사록>은 상세한 일상 경험의 구조와 분석에서 본질론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음을 예증한 것으로, 회화의 변각구도에 비교될 수 있다. (327)

남당의 궁정화가인 조간…의 것으로 전해지는 황권 그림은 ‘강해초설…’이란 제목이 그림 앞에 있으며, 여기에는 중국 그림 수집가로 유명했던 금 장종의 글씨가 있다…. 주제, 솜씨, 사실적인 세밀함이 뛰어나 송대부터 청대까지의 황궁 수장품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독특한 작품은 물길 여행의 어려움과 특히 열악한 조건에서 삶을 꾸려가는 어부들의 고투를 그려낸다. 여기저기 눈에 덮인 겨울의 강 풍경 안에서 이들은 바람 몰아치는 물살을 가르며 납작한 배를 부리고, 복잡한 기술을 써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열려진 그물 안의 내용물을 살피기도 하며, 또 나무 기둥 위에 골풀로 짜서 만든 원통형 움막 안에서 매서운 바람을 피하고 있다. (332)

개봉은 이전에는 한 번도 수도로 채택된 적 없는 곳에 건립된 새로운 종류의 수도이며 전례 없는 도시 배치와 생활 방식을 보여주었다. 중국 심장부에 육로와 강과 운하가 사통팔달로 연결되는 위치의 개봉은, 비옥한 남부와 동남부 지방에서 나는 모든 종류의 먹거리와 기타 생필품들이 쉽게 도시 주민들에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도로서의 개봉은 송 태조와 그의 관리들이 잘 알고 있던 바와 같이 몇 가지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황하 범람의 위험이 있는 데다가 북방 이적의 군사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어려운, 말 그대로 이전 중국 역사에서 결코 수도로 선정된 적이 없는 개방된 화북 평원이라는 점이었다. (362)

항주에는 상업 조합이 활성화되었다. … 조합의 우두머리는 가격 협상을 통해 집단의 직업적 재정적 이익을 확보하고 국가와 조합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 심지어 점쟁이, 일반 노동자, 넝마주이도 조합에 들어 있었다. 건어물 가게, 선어 가게, 게 장수, 돼지 상인, 닭과 거위 매매인, 채소 소매상, 호두 거래상, 주류 상인들의 조합도 있었다. 빗, 보석, 고급 의류와 모자 등과 같이 유행에 앞서는 사치스러운 물품들을 제작해 파는 상인들을 위한 조합들도 많이 있었다. 칠보, 즉 금, 은, 에메랄드, 수정, 루비, 호박…, 마노의 상인들은 이른바 ‘골동행…’에 함께 가입했다. 진주를 꿰는 보석상은 자신들을 분리기[??] 조합이라는 뜻으로 산아행…이라 불렀고, 제화공들은 스스로 겹줄 조합 즉 쌍선행…이라고 불렀다. (387)

은은 깊은 지하에서 발견되는 은황화물 광석에서 은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내는 기술이 있어야 귀금속이 될 수 있다. 그 생산의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은이 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소 상품이 되었다. 9세기 중반 연간 은 생산이 14톤 정도에 이르면서 중국사상 처음으로 은이 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중요해졌다. 송대 연간 은 생산량은 15~60톤 정도였다. 이 시기에도 은의 일부가 분명히 수입되었을 것이고, 몇 세기 뒤에는 은 수입이 큰 사업이 되었다. (426)

송대에 지폐가 사용된 것은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첫째, 국민경제의 번영으로 인하여 온갖 제품 생산에서 구리나 철의 수요가 높아졌으며, 지폐의 등장은 이러한 금속을 제조업에 사용될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둘째, 지폐를 다량으로 또 … 높은 품질로 인쇄할 수 있을 만큼 인쇄 기술이 발전했다…. 셋째, 송대 학자들은 화폐제도에 주목하며, 화폐가 금이나 은의 가치처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불과 교환의 수단이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434)

금의 조세제도는 송 모델을 따랐고 1180년에 상업세를 추가하였다. 금 왕조의 송 화폐제도 모방은 덜 성공적이었다. 상당한 양의 현금을 생산하기 위한 원료뿐 아니라 기술도 부족하여 금 왕조는 북송 주전을 합법적-불법적으로 수입하는 데 크게 의존하였다. 남쪽으로의 이주 기간에 송의 화폐제도가 거의 완전한 붕괴에 시달렸을 때 금 역시 동전 부족 사태를 겪었다. 그러나 송이 연례 보상을 약속한 1142년 조약 이후로 금의 통화 부족 상황은 감소되었다. 금 정부는 1154년에 자체 교환 증권을 도입하고 1157년에는 동전을 주조하고 지폐 교초…도 발행하기 시작했으나, 결코 환율을 안정화시키지는 못했다. (459)

그러나 전족을 시행하고 대중화시킨 여성들의 선택은 송대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가정 내 첩의 존재와 성장하는 유흥 시장이 소녀와 여인들을 상품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당 시대의 남성들은 보통 아내가 자기 아들을 낳지 못할 때에 첩을 들였고, 그의 가족망의 연줄을 통해 첩을 선택하곤 했다. 화폐경제가 사회 모든 부문으로 스며들게 된 송대에 이르자 부유층 남성들은 첩으로 봉사할 여성을 사서 집에 들였다. 매우 경쟁적인 시장경제 안에서 축첩이 성업하게 되자, 여성의 매력은 아내와 다른 가족원들을 포함하여 모든 송대 사람들의 마음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484)

가볍고 우아한 견직물을 좋아하는 송대 지배층의 기호는, 무거운 금속제 가정용품보다 윤이 나는 도자기를 매우 좋아한 그들의 감각이 직물에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비단보다 얇은 견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는 조세품의 연간 생산 수치인데, 나의 생산이 금 생산보다 13배 많다. 송 원대의 그림 자료에서 비단이 아니라 얇은 비단을 생산하도록 만들어진 직기를 볼 수 있다…. (488)

"나는 옷자락을 끌며 저명한 인사의 저택으로 향했다. …… 우리는 아침이면 노래를 하고 저녁에는 흥겹게 떠들며, 술 마시고 놀면서 세월을 보냈다. 평화로운 시절의 행복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지도 모른 채, 남자의 삶은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493)

근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송대 사람들은 중세의 다른 사회에 비하여 보기 드물 정도로 사적 영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천자에게 순종적인 신민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이론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는 규칙과 제재를 따랐으며 이러한 규율은 유교적인 행동 규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주택 건축과 의상에서의 기호부터 위생, 오락, 자선의 범주까지 사적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방임적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몽골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이 누리던 자기 결정적인 생활 방식의 편안함은 끝나버렸다.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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