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동북아역사재단 기획연구 69
동북아역사재단 한중관계연구소 지음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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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주국 시기 허저족은 총을 가지고 일본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늪지고 강제 이주당하였고,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460명만이 살아남았다. (4)
......
그러나 1958년에서 1976년까지 약 20년간 북대황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로 인하여 산림이 사라지게 되었다. 허저족은 어쩔 수 없이 수렵을 포기하고 어렵 중심의 생활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후 내지로부터 계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되고 헤이룽강, 쑹화강, 우쑤리강에서 물고기를 남획함으로 인하여 물고기는 씨가 마르게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말부터 관광 및 문화산업을 부흥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현재 허저족 마을은 대부분은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5)

일제는 우리가 매우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여 총을 몰수하고 3개의 부락으로 이주시켰다. ... 일본인들은 우리를 부락으로 이주시킨 뒤에도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모든 사람의 피를 채취하였다. 당시에는 이들이 왜 피를 뽑는지 몰랐으나 나중에 독극물 실험을 한 것임을 알았다. 일본인들은 우물에 독을 풀고 우리가 죽어 가는 것을 관찰했다. 굶어 죽는 사람보다 독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이들은 3년 동안 피를 채취하였다. (32)

일본 침략자들은 허저족을 산림대와 부락에 강제로 편입한 것 외에도 흡연증과 아편을 지급하여 이들이 아편을 피도록 권장하였다. 허저인들을 아편에 중독시켜 일제에 의존성을 높이고자 한 것으로 허저인들에 대한 근본적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67)

허저어 품사의 가장 큰 특징은 접속사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고 감탄사가 무척 발달했다는 점이다. 접속사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허저족이 장문...보다는 단문...을, 볼잡한 문장보다는 간단한 문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는 척박한 자연환경속에서 화자의 의도를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간결한 표현을 추구해 온 하저족의 인지체계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감탄사가 발달한 이유는 풍부한 감성과 솔직한 감정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허저족의 세계관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76)

중화민국이 성립되며 팔기제도가 폐기되자 허저족은 각자의 현아문...에 귀속되었고, 각 마을의 관리와 촌장 등 지방정권 지도자는 현아문에서 임명하여 파견된 한족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하라모쿤은 조직과 직능을 완전히 상실하여 소멸하게 되었다. (90)

어피 복식에 사용되는 어류를 크게 분류해 보면 연어류, 대구류, 철갑상어류 등이 있다.... 어피 복식 재료의 선택은 의복의 제작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물고기의 종류보다는 물고기의 양이 많은 것을 선호한다. 또한 어피의 선별 조건은 어피의 문양과 유연성, 두께, 질감은 물론 물고기의 크기, 비늘의 양과 밀도 등이 고려된다. ... 그 중 냉수어...의 어피는 비교적 두껍고 유연성과 내구성이 좋은 편이다. 어피 장호, 어피 단삼을 제작할 때는 황어, 연어, 잉어, 철갑상어, 대구, 붕어 등의 어피를 사용한다. (149)

또한 주변 민족인 어룬춘족 의복에서도 확인되는 점 문양의 의복...은 당시 중국 동북지역과 한국에서 일조의 사슴류 가죽을 활용한 복식을 착용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허저족의 어피 복식문화는 고구려의 복식 구조와 형태를 재현하는 데 있어 기초자료로 확용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즉, 유사한 기후 환경을 바탕으로 한 의복 소재의 공급과 모카신 제작 기법을 활용한 가죽 신발과 착용 방법 등 현재까지 밝혀내지 못한 고구려 복식문화의 의문점들이 허저족의 복식 고찰을 통해 그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 (163)

허저족의 전통 음식은 마시는 것과 먹는 것 두 가지를 모두 포괄한다. 먹는 것은 날 것을 차갑게 먹는 것 위주였으며 익혀서 먹는 것은 보조적이었다. 마시는 것도 차가운 물이 중심이며 술은 보조적이었다. 이러한 식습관은 육지로 올아오는 일이 거의 없이 하루 종일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는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배 위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다. 특히, 이곳은 봄가을에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이 합류하기 때문에 항상 바람이 불어 배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할 수 없으며, 물고기를 생으로 먹을 수밖에 없다. (171)

어렵이나 수렵을 할 때 일반적으로 2~3명이 함께 작업을 하며 단독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광활하고 무성한 숲에서 수렵을 하거나 망망하고 드넓은 강에서 어렵을 할 때 사람들은 신비로운 자연계 앞에서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쉽게 해소되지 않는 고독과 적막감에 빠지기도 한다. 길고도 매섭게 추운 기후는 이러한 정서를 더욱 강화시킨다. 허저족은 술을 마심으로써 무력감과 고독을 해소하고 동시에 다른 이들의 위축된 마음도 위로하였다. (173)

대대로 어렵생활을 해 왔던 허저인들은 자연신만이 아니라 동물신도 숭배하였다. 그들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자연계 전체가 신들로 가득 차 있고 인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인식을 그들의 말로는 ‘허우루빠리지...‘라고 하는데, "만물은 모두 살아 있고, 모두 자기의 신령이 있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사물 하나하나의 배후에는 강대하고 비교할 수 없는 주인, 즉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들 신을 위하여 각종 의례를 거행하였다. (347)

여우위파... 노인은 "허저족 인구가 증가한 것은 혼혈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답하였다. 자신의 외손자들은 혼혈이지만 모두 허저족으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허저족으로 등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수민족 우대정책 때문이다. 우선 대학 입시에서 10점의 가산점을 주고, 집을 짓는 데 보조해 주거나 기타 우대정책이 제공된다. 제진커우 마을의 120호 중에서 순수 혈통의 허저족은 20호 정도이다. ... 실제로 답사 기간에 만난 젊은이들은 혼혈이 많았으며 순수한 허저족은 찾기 힘들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391)

허저족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전승을 보이는 것은 물고기 껍질을 이용한 어피 복식이나 어피화로 어피 제작이 가능한 여성 노인을 전승인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우리는 어피 복식을 전승하고 있는 류성... 할머니의 전습소를 방문하였다. 본인은 한족이며 남편과 사별한 후 물고기 껍질을 이용해 옷과 어피화를 제작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 대형 어피화를 제작하는 중이었다. 또 다른 전승인인 여우원펑 할머니는 허저족으로 국가급 전승인이며, 어렸을 때 어머니께 어피복 제작을 배웠다고 한다.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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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가 없는 나라 - 경계 밖에 선 한반도화교 137년의 기록
이정희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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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교의 역사&문제의 소재를 간명하게 짚는다. 구한말에 들어온 그들은 곧 일제시대(중일전쟁)를 겪으며 근본적으로 취약해졌음(이들이 강했던 분야가 일제의 경제정책으로 절단남). 그 뒤 복잡&가혹한 냉전의 격랑에 죄다 흔들렸고, 남한 내부의 야만성이 이 ‘초극소수자‘를 배려할리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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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가 없는 나라 - 경계 밖에 선 한반도화교 137년의 기록
이정희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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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일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문제를 오랫동안 접해왔다. 일본 정부의 한국인(조선인) 차별 대우 문제에 대해 우리의 분노는 여전하다. 그러자면 우리는 떳떳한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주한 화교에 대한 우리의 오랜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 사과하고, 그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6)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시 조선이 화교의 고향인 산동성...보다 임금 수준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초 조선 농부의 하루 임금은 산동성보다 2.8배나 높았다. 여기에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각종 공사가 실시되었고 광산과 공장에서도 노동자 수요가 많았다. 공사업주나 탄광 및 공장주는 싼 임금하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화교 노동자...를 조선인 노동자보다 더 선호했다.
또한 중국인 농민으로서 조선에 이주하여 채소재배를 하는 농민이 많았다. 근대 조선은 채소를 자급자족하지 못해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했다. (32)

한국정부의 중화요리점에 대한 각종 규제가 1960년대 들어 강화됐다. 1968년 외국인토지법의 개정으로 화교의 영업용 점포의 토지는 50평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함으로써 고급 중화요리점의 개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기에다 중화요리점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세금이 부과되고, 같은 장소에서 장기간 영업할 경우 영업 연한에 비례하여 세금이 가산되었다. 세무 공무원은 화교의 취약한 법적 지위를 악용하여 돈을 요구하는 일까지 빈발했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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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 근대 일본의 첫 대외 전쟁의 실상 질문의 책 20
오타니 다다시 지음, 이재우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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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전쟁 소식이 어떻게 전해지고 소비되면서 일체감과 전쟁의 열기를 고조시켰는진 알겠는데, 맨 첫 단계에서 일정부가 ‘비밀‘로 일을 처리하고 전쟁 info가 유통되지도 않던 시절, 일반인들이 (방어도 아니고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이해도 용납(조선의 입장에서)도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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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네팔 타운의 희노애락 마이너리티 리포트 4
육성철 지음 / 서울연구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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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대로 슬프고 끔찍한 사연들이 가득. 상대방이 자신을 지킬 수단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이면 금새 천하고 냉정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이다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좋은 사회는 자비가 아니라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함. 인간에게 인간 이하의 행동한 사람들에겐 no mercy로 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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