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낯선 나
티모시 윌슨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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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응 무의식이라는 현대적 관점은 인간의 마음이 안고 있는 흥미로운 요소들, 이를테면 판단과 감정과 자극들이 억압 때문이 아니라 효율성을 위하여 자각의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일부 생각들의 경우엔 너무나 위협적인 탓에 사람들이 그런 생각들을 알지 않으려 피할 때가 간혹 있다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생각이나 감정, 동기에 의식적으로 접근을 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억압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암시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의문이 이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이 의문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26)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소크라테스는 부분적으로 틀렸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취하는 자기성찰의 종류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나의 행동을 살피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살피는 것과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력이 어느 정도로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40)

사회심리학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리드부인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감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는 쪽으로 이 세상을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위협적인 정보를 옹호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탁월한 존재들이다. 하버드 대학의 대니얼 길버트... 교수와 나는 이 능력을 `심리적 면역체계`라고 부른다. 육체적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육체적 면역체계가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에겐 심리적 안녕을 위협하는 요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적 면역체계가 있다. 그것이 행복감을 간직하려는 목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 각자는 최종적인 `스핀 닥터`인 것이다. (79)

적응 무의식이 신속히 결론에 이르고 그런 다음에는 그와 정반대의 증거가 나와도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으려 드는 경향에서,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 몇 가지의 원인을 찾아도 무리가 아니다. 제9장에서 논할 인종적 편견도 그런 문제 중 하나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적응 무의식이 그런 잘못된 추론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뭘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신작용들이 생존상의 이점을 제공해왔다는 사실이 곧 그것들이 실수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그런 작용들이 안겨주는 이점(예를 들면 신속한 평가와 분류)이 불행한 부산물을 낳을 때가 종종 있다. (108)

이와 비슷한 여러 연구 결과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이렇다. 시선과 언어로 하는 대답이 각기 다른 속도로 발달하는 다른 종류의 지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면 무난하다. 아이들의 시선을 측정하는 것은 비의식적이고 암묵적인 형태의 지식을, 나의 어법을 빌린다면 적응 무의식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을 관찰하는 것이다. 반면 말로 하는 대답을 분석하는 작업은 발달에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마음의 이론에 대한 의식적인 이해를 파악하는 것이다.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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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 을유문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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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알려주는 동시에 의사로서의 자서전도 겸한 책. 트라우마가 제 이름과 자리를 얻기까지의 투쟁사. 이 경험&기억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만 치료 가능: 내가 나 아닌 상태, 마음이 (그래서 언어도) 접근 못하는 기억, 몸에 새겨진 무시간 경험. 손가락 하나로 효과 보는 EMDR 배워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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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 을유문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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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을 먹으면 악몽이 사라진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내 친구들, 그들의 죽음을 다 헛된 일로 만들어 버리는 거잖아요. 전 베트남에서 죽은 친구들을 위해서 살아 있는 기념비가 되어야 해요."
나는 망연자실했다. 죽은 이들을 향한 충성심은 그가 삶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톰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향한 헌신의 마음으로 삶을 이어갔던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전장에서 겪은 일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인생의 나머지 시간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 끔찍했던 경험은 어떻게 해서 당사자가 아무 희망 없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토록 벗어나기만을 바라던 곳, 그곳에 얼어 버린 듯 꼼짝없이 붙들려 버린 사람들의 마음과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35)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 해군병사들과의 상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일원이 되지 않는 이상 나는 그들에게 의사가 될 수 없었다. (48-9)

우리의 훌륭한 선생님이셨던 엘빈 셈라드 교수는 내가 센터에서 보낸 첫 해 내내 정신의학 교과서를 읽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셨다.... 셈라드 교수는 확실성을 가장한 정신의학 진단 떄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인식한 내용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번은 내가 이런 말을 던졌다. "교수님은 이 환자를 정신분열과 분열정동형 정신병 중 어느 쪽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턱을 어루만지더니 깊이 고민한 듯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면 마이클 멕킨자이어라고 하겠네." (62)

너무나 많은 희망과 함께 시작된 의약 혁명은 결국 장점만큼 수많은 해악을 낳은 것 같다. 정신 질환은 1차적으로 뇌의 화학적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특정한 약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론은 의료계 전문가들은 물론 언론 매체와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수용되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의 약물 치료에 관한 연구를 다수 진행한 뒤, 나는 정신 질환의 약물 치료에는 심각한 단점이 따르며 초점을 흐려 문제의 원인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뇌-질병 모델은 사람들의 운명을 각자의 손에서 넘겨받아 통제하고, 의사들과 보험회사가 환자의 문제를 대신 책임지고 해결하도록 만든다. (77)

약물이 만들어내는 수익이 워낙 크다 보니 의학계 주요 학술지들마다 정신건강 문제를 약 없이 치료한 연구 내용이 게재되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그와 다른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대안`으로 취급받으며 무시당하기 일쑤다. 소위 `매뉴얼이 확립된 치료 계획서`를 마련하지 않고, 환자와 치료 담당자가 유연성이 결여된 처방 일정을 따르고, 환자 개개인의 필요를 세밀하게 반영해 조정하는 절차가 거의 생략된 비약물 치료에 연구비가 지원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류 의학계에서는 화학의 힘으로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을 단호히 행하고, 약 외에 다른 방법으로 개개인의 생리학적 상태와 체내 평형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고려 대상에서 대부분 제외되고 있다. (79)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의 뇌를 보면 이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다. 여과 장치가 없으니 감각 정보가 금세 넘쳐난다. 이 상태를 이겨 내기 위해 이들은 시스템을 아예 정지시키려고 애쓰며, 시야는 좁아지고 한 가지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특성이 발달한다. 알아서 차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바깥세상을 차단할 수 있도록 약물이나 알코올의 힘을 빌리게 된다.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은,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바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원천도 함께 차단된다는 것이다. (125)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 제도나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방법은 이 감정 개입 시스템을 무시하고 대신 마음의 인지적 기능을 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분노, 공포, 불안이 이성적 사고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충분한 증거들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기에 앞서 뇌의 안전 체계부터 재가동시켜야 하는 필요성을 간과하는 프로그램들이 많다. (146)

애착을 향한 욕구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다른 사람과 동떨어진 상태로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직장 생활이나 친구들, 가족들에게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질병, 법적 소송, 가족 간의 불화 등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뭔가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무관함, 소원함이 주는 지독한 우울함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191)

메릴린은 힘없는 아이가 어쩌다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린 메릴린은 자신을 없애는 방법을 택했다. 침실 밖 복도에서 아빠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메릴린은 `머리를 구름 속에 넣어` 버렸다.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환자 한 명이 직접 그림을 그려서 그 방식을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녀 역시 자신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천창을 지나 하늘로 붕 떠올라서 저 위 높은 곳에서 침대에 누운 어린 소녀를 남처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자신이 저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저 소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217)

최근에 특정 유전자를 `보유하면` 정해진 결과가 나온다는 단순한 생각을 일축하는 결과들이 발표됐다. 여러 개의 유전자가 함께 작용해 한 가지 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유전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살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유전자의 외부에 메틸기...를 결합시키고, 이를 통해 몸이 보내는 메시지에 어느 정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함으로써 유전자의 발현을 활성화하거나 활성을 중단시키는 생화학적 메시지가 생성될 수 있다.... 일생의 중대한 사건은 이렇듯 유전자의 동태에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메틸화의 패턴은 자손에게도 전달될 수 있으며 그러한 현상을 후생유전이라고 한다. 유기체의 가장 깊숙한 단계까지 신체에 흔적이 남는 사례를 또 한 가지 확인한 셈이다. (247)

스루프 연구진은 이와 함께 회복력, 즉 역경을 겪은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삶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망스러운 일에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생후 첫 2년 동안 1차 양육자로부터 얻은 안정감 수준이었다. 현재까지 인정되는 사실이다. 스루프가 내게 비공식적으로 전한 바에 따르면, 성인기의 회복력은 두 살 때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스러워했는지를 알면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262)

이어 그는 빈에서 가장 잘 사는 부류에 속한 여러 가정에서 학대가 만연한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게다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도 그 일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한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적인 소망과 환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지만, 가끔씩 성적 학대의 실상을 알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공포가 찾아온 후 프로이트는 전쟁 신경증의 실상과 마주하고 트라우마의 핵심은 서술적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행동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기억하는 대신 행동으로 재연한다. 물론 자신이 그 일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로 반복하고, 결국 우리는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방식임을 알게 된다." (290)

이와 같은 사건을 보면 중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의사, 경찰관, 사회복지사는 상대방이 트라우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언가를 기억하는 대신 그저 재현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환자는 자신의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과거를 통합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대신 그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범죄자로 처벌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292)

트라우마로 인한 결말을 부인하면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 구조에도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를 마주하지 않으려 하고 `나약함`이라는 편협한 판단을 내리려는 태도는, 1930년대 전 세계적인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부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명시된 어마어마한 전쟁 배상금은 이미 망신을 톡톡히 당한 독일에 더 큰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자 독일 사회에서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자국의 참전 군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며 가혹하게 대했다. 힘없는 상대에게 잇따라 굴욕을 안겨 주는 이 같은 조치들은 나치 체제가 인권을 가차 없이 저하시키게 한 발판이 되었다. 즉 강한 자가 열등한 자를 격파하는 건 당연하다는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전쟁을 실행하는 근거가 되고 만 것이다. (299)

`말이 안 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우리의 생각이 쉽게 수정될 수 있다는 착각은 언어로 인해 어떤 함정이 빠질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인지행동 치료에서 `인지` 기능에 중점을 둔 과정에서는 그와 같은 `고장 난 생각`을 바꾸는 데 주력한다. 이는 곧 환자가 부저적으로 인지한 내용에 상담사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구성`하려는 하향식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성폭행에 대한 원망과 실제 사실을 비교해 봅시다"라든가 "운전대만 잡으면 솟구치는 두려움을 도로 안전에 관한 최근 통계 자료와 비교해 봅시다"라고 제안하는 식이다. (387)

인공지능 분야를 개척한 MIT 소속 과학자 마빈 민스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단일한 자기가 존재한다는 전설은 자기에 대한 탐구 목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 뇌의 내부에 서로 다른 마음들이 사회를 이루며 존재한다는 생각이 더 이치에 맞는 이야기딜지 모른다. 이 서로 다른 마음들은 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들처럼 서로 도와 가며 협력할 수 있지만, 각자 다른 마음들이 절대 모르는 고유한 정신적 경험을 한다." (443)

물론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원래의 기억을 진정시키고 그 기억과 맞설 만큼 강렬하고 현실감 있는 정서적 시나리오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구조 형성 과정에서 환자들을 치유하는 장면들은 많은 환자가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일, 즉 세상 속에서 환영받고 함께 즐거워하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488)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현재를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과거로 해석하지 않는다. 세타파의 활성이 지배적인 최면 상태가 되면, 어디선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 총성과 죽음의 징조를 자동으로 떠올리는 것과 같은 특정 자극과 반응의 조건적인 연결이 헐거워진다. 그래서 똑같이 뭔가 부서지는 소리를 듣더라도, 새로운 연상 관계를 확립해 과거 어느 축제날 밤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해변에서 폭죽놀이를 했던 일을 떠올릴 수 있다. (515)

연기란 그 인물을 겉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그 인물을 찾는 것이다. 자신이 그 인물이 되며, 속에서 그 인물을 찾아야 한다. 아주 광범위한 자기 자신 속에서 말이다. (523)

자기 주체의식과 스스로 느끼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은 몸과 몸이 만들어내는 리듬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즉 잠에서 깨어나고, 잠을 자고, 먹고, 자리에 앉고, 걷는 모든 행동이 하루하루의 모습을 만든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면 자신의 `몸속`에 존재해야 한다. 깊이 숨 쉬고 내적 감각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몸과 분리되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게 만드는 헤리와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텔레비전이든 컴퓨터 모니터든 각종 화면 앞에 드러누워 수동적으로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우울한 상태와도 상반되는 개념이다. 연기는 몸이 인생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524)

발트 해 연안의 작은 국가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신경과학자 자크 판크세프는 내게 1987년 6월 에스토니아에서 일어난 `노래하는 혁명`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북극과 가까운 지역답게 밤이 길게 이어지던 그해 여름, `탈린 노래 축제장`에 모딘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소비에트 치하에서 반세기 동안 금지곡으로 지정된, 에스토니아를 향한 애국심이 담긴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 함께 노래하며 저항하는 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988년 9월 11일에는 에스토니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0만 명이 모여 함께 노래 부르면서 독립을 요구했다. 마침내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의회가 국가의 회복을 선언하던 현장에 소비에트 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저지를 시도하자 사람들은 인간 방패를 만들어 탈린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을 보호했다. (529)

트라우마와 트라우마 치료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 정치적인 사항은 제쳐 두고 신경과학적인 내용이나 치료에 관한 정보만 말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도 트라우마를 정치와 분리하고 싶지만 지금처럼 근본 원인은 무시한 채 트라우마를 거부하고 치료하려 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유전 정보보다 생활 여건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소득 수준, 가족 구조, 사는 집, 고용 상태, 교육 기회에 따라 트라우마 스트레스가 발생할 위험성은 물론이고 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551)

트라우마는 자신의 나약함과 끊임없이 대면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처하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월등한 회복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내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가진 즐거움과 창의성, 의미, 유대감 등 인생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요소의 원천을 트라우마를 통해 탐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수많은 환자가 견뎌야 했던 이들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겪었어도 이겨 낼 수 있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나는 이들이 나타내는 증상들이 모두 각자가 가진 힘이며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이 그 고통스러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고 부모가 되며 모범적인 선생님, 간호사, 과학자, 예술가로 살아간다.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훌륭한 인물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트라우마를 잘 알게 될 기회가 있었다. ...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 보면, 모두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그러한 통찰과 열정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64)

사회도 마찬가지다. 가장 대대적인 발전은 트라우마를 계기로 얻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 남북 전쟁 이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대공황 이후 사회보장제도가 신설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뒤 만들어진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산층 비율을 늘렸다. 공중 보건 분야에서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트라우마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사실대로 행동할 것인지는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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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개정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 대화문화아카데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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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두서 없게 쓰여졌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가슴으로 겪어본 사람에게는 힘과 위안 되는 앎이다. 우선 임사체험은 문화에 따라 다른 유형을 띤다는 일관된 연구결과. 둘째, 임종 못 지켰다고 죄의식 갖거나 주입하는 건 어리석음. 셋째, 임박한/일어난 죽음 터놓고 이야기할수록 삶 지킬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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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
벨 훅스 지음, 윤은진 옮김 / 모티브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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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용기를 북돋아준 덕에 나는 다시 새롭게 페미니즘 정치학에 전념할 수 있었고, 페미니즘 저술의 가치는 페미니즘 운동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가 아니라 페미니즘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여성과 남성을 얼마나 투쟁에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정해저야 한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6)

여성들은 다음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이란 성공을 위해 옷을 잘 차려입거나 기업체 중역이 되거나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고, 자기에게 쓸 시간이나 돈이 없는 가정부 덕분에 맞벌이를 할 수 있고 남편과 자녀와 스키를 타러 가서 많은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며, 여성은행...을 개설하거나 주말에 비싼 워크숍에 참가하여 당당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과는 상관없다는 것, ...... 이렇게 왜곡된 페미니즘의 이미지가 우리의 페미니즘보다 더 현실성을 갖는다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을 명확하고 유의미하게 분석해야 했고,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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