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전쟁을 철저히 알기 전까지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고, 전쟁을 알기 위해 우리는 최소한 킨제이...나 매스터스...와 존슨...이 했던 것처럼 부지런해야 한다. 모든 사회에는 시야에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사각 지대가 있다. 오늘날의 사각 지대는 살해다. 한 세기 전에는 성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18)
이러한 데이터를 제시하면, 어떤 이들은 그것은 "한 형제가 싸움을 벌이는" 내전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제롬 프랑크... 박사는 자신의 책 ...에서 이러한 견해에 분명하게 답변한다. 이 책에서 그는 통상적으로 내전은 다른 유형의 전쟁들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더 오래 지속되며, 훨씬 더 무질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피터 왓슨...은 <전쟁을 생각한다...>에서 "같은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일탈 행위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 타인들의 일탈행위보다 훨씬 더 충격적으로 느껴지고 더 강력한 보복 행위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과거 유럽과 오늘날 아일랜드, 레바논, 보스니아 등에서 서로 다른 기독교 분파들에서 볼 수 있는 강한 공격성, 레닌주의자, 마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의 갈등, 르완다와 기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부족 간 전쟁이 낳은 참상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67)
그 참전 용사는 자신과 같이 베트남에 있었던 해병대원들 가운데 몇몇이 전투 후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인 베트남 젊은이들이 개인적 실존이라는 더 큰 전쟁의 동료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비인간적인 `그들`에 맞서기 위해 전 생애에 걸쳐 연대하는 젊은이로서 말이다." ... "북베트남 병사들을 죽이면서 미군 병사들은 그들 자신의 일부를 죽였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진실을 회피하는 이유일 것이다. 살해에 대한 거부감의 규모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는 곧 인간을 향한 인간의 비인간성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 동료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 안에 있으며, ... 이러한 거부감은 강력한 힘을 지닌 채로 존재하며, 그 존재는 그래도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믿을 만한 여지를 남겨 준다. (86)
이스라엘의 군 심리학자인 벤 셜리트는 전투를 막 치른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무엇이 제일 두려웠느냐고 물었다. 그는 "목숨을 잃는 것" 혹은 "전장에서 다치거나 버려지는 것"이라는 대답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셜리트의 기대와 달리 죽거나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더 많이 표현했다. ...... 실제로 셜리트는 사회와 문화가 죽음과 부상에 대한 이기적인 두려움이 군인들의 가장 큰 근심거리라고 말할 때조차, 전투가 요구하는 끔찍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전투원들의 마음을 가장 심하게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101)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인간들에 대한 추잡한 기록은 전투에서 적군을 살해하기를 꺼리는 마음의 이면이다. 평범한 군인의 영혼은 살인 행위와 살인을 해야 한다는 의무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증오하며 죽일 만큼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한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서도 똑같이 공포를 느낀다. (137)
람보, 인디애나 존스, 루크 스카이워커, 제임스 본드 등을 길러 낸 문화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전투와 살해를 벌일 수 있으며, 누군가를 적이라고 선포하면 대의와 조국을 위해서 군인들이 후회 없이 그들을 말끔하게 지구상에서 없애 버릴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여러 면에서, 머나먼 나라에 있는 다른 젊은이들을 죽이라고 자기 나라의 젊은이들을 보낼 때, 사회가 그러한 행위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다룬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떠올리기가 너무 고통스러우면, 우리는 그것을 그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 한다. (159)
서로 이렇게 가까이 다가선 상태에서 병사들이 상대방의 인간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의 눈과 두려움을 보고 있노라면 부인은 소멸된다. 이 거리에서는 살해의 인간 상호적 본질이 변하게 된다. 이제 살해자는 제복을 향해 쏘거나 규정된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해 총을 쏴야 하고 특정 개인을 죽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거나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194)
첫번째 요인은 추격 본능이다. 평생 동안 개를 훈련시키고 군견과 더불어 일하면서, 나는 동물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내가 길들이지 못한 개는 한 마리도 없었고, 내게 달려드는 개를 발로 걷어차서 꼼짝 못하게 한 적도 많지만, 내가 등을 돌려 달아나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본능과 이성을 통해 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에게는 추격 본능이 있어서 훈련을 잘 받은 온순한 개들조차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상대를 쫓아가 덮쳐 버린다. 등을 보이고 있다면, 당신은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추적 본능이 있어서 도망치는 적군을 죽이는 데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205)
등을 보인 병사를 별다른 주저 없이 살인하게 되는 두 번째 요인은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면 물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라 하더라도 이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물리적 거리의 본질은 살인자가 희생자의 얼굴을 얼마나 자세히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등 뒤에서 총을 쏘거나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행위를 비겁한 짓으로 여기는 우리의 문화적 태도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본능적 이해에 바탕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군인들 또한 등을 보일 때 적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6)
우리 안에 자리한 어둠과 파괴의 힘은 동료 인간을 향한 빛과 사랑의 힘으로 균형 잡혀 있다. 이 힘들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투쟁하며 서로 겨루고 있다. 한쪽을 무시하는 것은 곧 다른 쪽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어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빛을 알 수 없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알 수 없다. 섹스와 전쟁 사이의 연결고리와 양편 모두에서 발생하는 부인의 과정은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신화적 결혼 속에서 하르모니아가 태어났다"는 리처드 헤클러의 관찰에 잘 표현되어 있다. (218)
집단은 책임감을 형성할 뿐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익명성을 발달시켜 줌으로써 살해를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폭력에 기여하도록 한다. 몇몇 상황들에서, 이러한 집단 익명성의 과정은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원시적인 유형의 살해 미스테리를 촉발시키는 것 같다. ... 셜리트는 "동물 세계의 이러한 무분별한 폭력은 인간 세계의 폭력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개체보다는 집단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 콘라트 로렌츠는 "살해자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라고 말한다. (235)
심리학자들은 군중이 유발하는 익명성에 의해 책임이 희석될 수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상황에 개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밝힌 연구는 문자 그대로 수십 개에 달한다. 따라서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서 끔직한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만약 일어나더라도 구경꾼이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구경꾼이 책임을 희석시킬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경우, 그가 상황에 개입할 가능성은 아주 높아진다. 집단은 이 같은 방식으로 무리 안의 개인과 군 부대 안의 군인이 개인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행위, 이를테면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거나 다른 나라 군복을 입은 사람에게 총을 쏘는 행위를 감행할 수 있도록 책임을 희석시켜 버린다. (236)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한 베트남 참전 경험이 있는 어느 미군 중령과 같다. "나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을 해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어릴 적에 깨달았다. 나는 이들과 맞설 준비를 하는 데 내 일생을 바쳐 왔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언제나 기민하다. 그들은 목양견이 자기 앙떼를 배반하지 않듯이 자기 공격성을 오용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쓰지 않지만, 가슴속으로는 정당한 전투를 갈망하며 적법하고 합당한 곳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늑대들이기도 하다. (276)
이들은 본능적으로 시험받지 못해 애태우며, 능력의 한계를 넘는 도전을 간절히 요구한다. 우리 안의 전사는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구원할 혹독한 전장으로 이끌어 달라고 간청한다. 우리는 골리앗을 대면하여 우리 안에 전사 다윗이 살아 있다는 것을 상기하려 한다. 우리는 전쟁의 신들이 우리를 예리코의 벽으로 인도하여 강인한 집합 나팔 소리에 응하게 해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한 힘에 의해 전장에서 패배하기를, 그 패배를 통해 처음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하기를 열망한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 전투를 갈망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갈망은 분명 존재하며 그것은 사랑스럽고 끔찍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이다. (277)
‘고결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싸우는 적군의 존재는 살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고결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다고 믿도록 살해를 정당화하고 지지한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한 영국군 장교는 홈스에게, 죽을 때까지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했던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최고였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싸웠고, 우리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293)
홀로코스트는 유대인과 무고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살해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살해는 무의미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악한 짓이긴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살인에는 아주 강력한 그들만의 비뚤어진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잔학 행위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논리다. 잔학 행위의 어두운 힘을 건드리는 자들이 거둘 수 있는 이득은 많다. … 그 이득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분명 실질적이고 강력하다. 잔학 행위의 마력을 이해하려면 개인과 집단, 국가가 잔학 행위에 눈길을 돌리게 만드는 이러한 이득의 정체를 이해하고, 나아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308)
잔학 행위가 일으키는 지독한 공포감은 여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할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불신하게 만든다. … 충격의 강도가 셀수록, 믿고 싶지 않다는 반응은 더 커진다. (316) ...... 그러나 우리는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주의 깊게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대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디에선가 잔학행위의 어두운 힘을 휘두르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동일시하는 누군가가 같은 인간에게 이러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경향일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잔학 행위의 존재를 불신하거나 외면하려는 이 단순하고 순진한 경향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세계에 잔학 행위와 공포가 지속되는 데 따른 그 어떤 요인들보다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318)
인간 개개인의 생명과 존엄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이들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무고한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만큼 전쟁에도 충실히 임해야 한다. 이들을 부추겨 기만적이고 역효과만 낳을 뿐인 잔학 행위의 길로 들어서게 해서도 안 되고, 이들을 적대시해서도 안 된다. … 어떤 집단이 잔학 행위의 왜곡된 논리에 완전히 가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발을 빼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집단은 왜곡된 논리의 근시안적인 이득조차 얻지 못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위선적인 태도로 인해 힘의 약화와 혼란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절대 영혼을 반만 팔 수는 없다. (336)
내 손에 멱살을 잡힌 아이의 공포를 보자 나는 니체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증오하고 두려워하느니 차라리 사멸하라. 스스로를 증오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느니 차라리 그 배로 사멸하라." (356)
적군은 자신과 다르고, 가족이 없으며, 인간도 아니라고 굳게 믿도록 하기 위한 여러 기제들이 늘 활용되어 왔다. 많은 원시 부족들은 자기 부족에는 결국 `사람`이나 `인간` 정도로 번역되는 여러 이름들을 붙이고, 다른 부족들은 그저 사냥하거나 죽일 수 있는 다른 동물의 종으로 정의했다. 우리도 적을 잽(일본인), 크라우트(독일인), 구크(동남아시아인), 슬롭(아시아인), 딩크(북베트남인), 코뮈(공산주의자)라고 부르면서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368)
대부분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직접 살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을 받으며 적을 비인간화하는 데 가담했고,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실제로 총을 쏘았거나 마음속으로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쏠 수도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정신적으로 나는 이미 그를 죽인 상태였다")로 인해 그들은 전장에서 가지고 돌아온 책임의 짐을 벗어던질 수 있는 중요한 수단 하나를 잃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따라서 보통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오직 살인자들만이 아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소개받기에 이르렀다. 요점은, 이러한 둔감화와 조건 형성, 부인 방어 기제 등의 프로그램이 이후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결합하게 되면 살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살해를 했다는 자책감을 공유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380)
모든 전쟁의 전투원들은 아주 어리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전투원들은 미국 역사의 그 어떤 전쟁에서보다 눈에 띄게 어렸다. 전투원 대부분이 열여덟 살에 징집되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시기에 전투를 경험했다. 이 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벌인 "십대 전쟁"이었다. 평균적으로 전투원들은 아직 스무 번째 생일도 맞이하지 않은 상태였고, 과거의 전쟁에는 늘 있어왔던 원숙한 고참병들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 그들은 십대를 이끄는 십대였다. (386)
베트남 전쟁은 대부분 비정규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미군은 자기 가정을 지키고자 했던 민간인 복장을 한 남자, 여자, 아이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통적인 관례의 실종, 민간인 사상자와 잔학 행위의 급증, 그리고 전쟁 트라우마를 초래했다. 전쟁을 치러야 할 이데올로기적 이유도, 맞서야 할 상대도 과거의 전쟁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388)
군인들에게 이러한 의례가 주어지지 않을 때는 정서적 고통이 찾아올 수 있다. 그들은 죄책감을 제거하거나 그들이 행한 일이 옳았다는 확신을 받지 못한 채 감정을 안으로 삭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이러한 방임의 피해자들이었다. 동료들과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긴 수송선 여행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대신, 파견 근무를 마친 군인들은 적군과 마지막 전투를 치른 지 며칠 만에, 때로는 몇 시간 내에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도록 집으로 보내졌다. 그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을 들어 줄 동료 군인들도 없었다. 그들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시켜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397)
우리 사회의 경향 속에서 미국의 아이들이 새로운 유형의 폭력적인 역할 모델에 더 노출되기 쉬워졌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다. 전통적인 핵가족에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 왔던 안정적인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남성상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온 남자아이들은 절박하게 역할 모델을 찾는다. 그래서 영화나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힘세고, 강하고, 지위가 높은 역할 모델이 이들 삶의 빈 공간을 채운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아버지를 빼앗고 모든 상황에서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새로운 역할 모델로 대체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아이들은 왜 이토록 폭력적이 되었는지 의아해하는 것이다. (463)
남성 권력, 남성 지배, 남성성, 남성 섹슈얼리티, 남성의 공격성은 전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 형성되어 있다. …… 조건 형성된 것은 탈조건 형성될 수 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467)
예전에 우리는 왜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지, 그리고 왜 앞으로도 계속 그러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해야 한다. 오직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만 우리는 변화를 꿈꿀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기 목숨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조차 살해를 거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 우리는 타나토스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배웠다. 무기의 스위치를 ‘안전’에서 ‘발사’로 전환하는 일처럼, 우리는 아주 손쉽게 인간의 심리적 안전장치를 밀어젖히는 법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심리적 안전장치가 어디에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살해학의 목적이고, 이 책이 추구하는 목적이다.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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