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히의 유언
데이비드 케일리.이반 일리히 지음, 이한.서범석 옮김, 박홍규 감수 / 이파르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책과 사람의 만남도 인연이라 때로 우연과 오해가 만남을 주선하지요. 서점에서 산책을 하는데르네상스의 자유인이라는 부제를 단 책 하나가 눈에 딱 들어오지 뭡니까? 지금 보니르네상스적 자유인인데, 그 때는르네상스의 자유인으로 보였고 그래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르네상스라는 말만 많이 들었지 그 시대 인물의 육성을 들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거든요.

 

   읽어보니 르네상스이든이든 소탈하고 멋진 자유인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사실 책의 제목과 부제 모두 적절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맨 뒤에 붙어 있는 감수자의 글은 상당히 불필요해 보입니다.) 대신 이반 일리히라는 무시무시한 20세기 인간(2002년 사망) 하나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아주 가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끝까지정말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얻은 답을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과 이렇게 우직한 대결을 벌이는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매수할 수가 없지요. 이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반 일리히가 얼마나대단한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0개 국어에 유창했고, 교회 역사 및 중세-근대 사회에 관한 일급 연구자로서 현대성 반성에 평생 매달렸으며, 카톨릭교회의 권력화을 비판하다가 결국 사제직을 떠났고, 종신교수 제안을 물리치고 평생 떠돌면서배움의 네트워크에 머물렀고, 병원에 가는 대신 아편을 씹으며 얼굴의 혹(암종)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했다는 등의 사실을 읊으며 이 사람을 또 한 명의기인이나위인또는 ‘스타’로 추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일리히가 일생을 붙잡고 있었던 질문—‘예수의 강생은 왜 필요했으며 어떻게 가능하였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 더 멀리 제 관심사로부터 떨어져 있는 주제도 아마 드물 겁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저는, 일리히라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생생했고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고통과 죽음, 그리고 우정을 통한 배움이라는, 늘 제 머리 속을 맴도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우선 일리히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에서자유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특별한자유인이었습니다.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고 그것을 타협 없이 실천하며 살았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서양사회에서 강력한 상징성을 가진 에피소드선한 사마리아인을 볼까요? 한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다친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도왔습니다. 먼저 지나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 다친 이를 도울 이유가 제일 희박한 사람이었는데도 사마리아인은 그리했습니다. 일리히는 이 지점에서 역사상 새로운 자유, 새로운 윤리의 경계가 제시된다고 봅니다. 제 가족, 부족, 민족 안에서 사랑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에 대한 보상이 약속된 익숙한 범위를 뛰어 넘어 벗을 택하고 환대할 자유이지요.

 

   자유의 개념이 쇄신되면서 죄의 개념 역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죄란 이 고귀한 자유를 외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300년 간 기독교인들은 이 자유를 즐겁게 누렸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그 사회조직이 다시 현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학교 병원 교회 군대, 통틀어 국가라는 비인격 시스템에 이 자유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세련되게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 자유를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되살려내야 합니다. 왜냐하면우리는 모두 죽으니까요. 일리히는 문 밖에 서 있는 이를 벗으로 삼아 집 안으로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죽음 앞에 선 우리를 가장 인간다운 존재, 언젠가 그랬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존재, 즉 자연(自然)으로 되돌려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필귀정을 막는 자들이 시스템을 등에 업은 현대의선지자들이라고 일리히는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온 마당에(일단 그렇다 칩시다) 이제는 어떠한 선지자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서로 친구가 되라고 했는데도, 현대의 종교인 정치인 각종 전문가들을 우리가 서로에게서 배우며 서로를 돌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전문가 권력은 고통은 병원에게, 돌봄은 종교에게, 배움은 학교에게 맡기라고 말합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단 가지인 저 확장하는 자유를 거부하라고 합니다. 

 

   아니저 오래된, 서구 현대성 및 국민국가 비판의 한 자락을 펼치자는 게 아닙니다. 원한다면 그 비판의 계보 몇 가지를 가져와 일리히와 논쟁을 벌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그의 사상은 분명 완전하지 않으며 신앙으로 인한 제한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과는 따뜻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이 사람이 (더군다나 끝까지 그 신앙을 견지하면서) 성경을 그것이 탄생하고 읽혀온 역사 속에서 다시 읽고 연구하고 생각하기를 반복하면서, 그 과정에서 점차 명료해지는 최고의 가치를 따라 사는 데 핑계도 태만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저는 참으로 놀랐고 가슴이 숙연해졌습니다.

 

   고통과 죽음이 오랫동안 그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힘들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이 둘을 감추거나 포장하거나 지연시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도리어 이들 덕분에 인생은 가장 가치 있는 방법으로 살 용기가 생긴다고 보았지요. 그래서 모든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전문가들과 싸우고 친구들과 대화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우정은 삶의 악세서리가 아니라 삶 자체였습니다. 그는 경계 밖에서부터 벗을 맞이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일을 미지의 벗에게 의탁하였습니다(그는 삶의 신비와 기적을 믿었답니다!). 서로 벗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애썼습니다. 그리고 그 우정과 배움의 공간에는 꼭 촛불을 켜두었습니다. 밖을 지나던 누군가가 그 불빛을 보고 다가와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를 맞이하고 우리가 함께 나누던 것을 더 넓게 나눔으로써 자유의 환희를 느낄 수 있도록.

 

 

“늘 덕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사람, 그래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된 사람은 죽음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행동에 통합하여 살아간다.” (268)

 

“지난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연회를 같이 한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우리 모임 식탁에는 항상 초가 놓여 있다. …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친구들의 대화는 문을 두드릴 다른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점을 전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촛불은 바로 그 문을 두드릴 누군가를 위해 놓아둔 것이다. 촛불은 그 공동체가 결코 닫혀 있지 않다는 점을 계속 상기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인 셈이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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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권하다 -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 더퀘스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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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에게 책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상품, 하나의 물건입니다. 솔직히 하나의 물건으로서도 탐탁치 않은 책을 마음의 양식으로 받들어 소화하기는 어렵지요. 반면 똑 떨어지는 물건을 손에 넣은 소비자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립니다. 이 책은 그런 미소를 안겨주는 스마트한 물건입니다. 번역 편집 제본과 같은 물질적인 면에서도, 내용의 재미와 접근성 그리고 충실함에 있어서도잘 빠졌습니다.’ 물론 권하는 책의 조건으로서 잘 빠짐은 기본이겠죠. 근래 읽은 여러 책들 중 이 책이 특별히 마음에 남은 까닭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저는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와 같은 아테네 철학자들의 철학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해맑고 단순한 시절의 산물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느낌을 이 책이 확실히 교정해 주었답니다! 책을 따라가보니 놀랍게도, 아테네학당의 여러 철학들(복수)은 발생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범한 개인의 실용적 삶의 원리로서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공동체를 위한 정신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검토되고 있었어요.

 

  둘째로 이 책은 세련된 교양철학서이기 전에 한 평범한 젊은이의 정신적 비망록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긴 터널을 안간힘을 다해 탈출해 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보다 사적이고 진실하고 겸허하면서도 자신감이 있는 느낌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사회로 나오는 과정에서 겪은 극심한 정서장애를 인지행동치료로 극복한 저자는 이 치료의 지적 기원에 고대 그리스철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파고들게 됩니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지요. 책에 “blood knowledge”(피를 흘려 얻은 지식)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책 자체가 종이의 지식이 아니라 피의 지식이기에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복이라는 말이 책에 자주 나옵니다만 사실 이 책이 탐구하는 바는 협의의 행복(happiness)보다는 제대로 산다는 것(well-being)에 철학—더 정확히는 철학하기, 왜냐하면 철학은 실천이니까—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얼마전 AI로 양계농가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요. 그런데 사회 전체로 본다면 허약한 교양과 철학의 부재야말로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뿌리째 흔들며 비웃어온 전염병이지 않았나요? 아니 한국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철학 없는 발전에 중독된 나머지 진지한 철학은 행복과 웰빙의 적이라는 궤변을 스스로 믿어 버린 것은.

 

 

  그래서 삶과 위태로운 순간들을 위한 철학이라는 원제를 삶을 사랑하는 기술: 철학을 권하다라고 옮기기로 한 출판사의 결정에도 저는 찬성합니다. 이 책은 그 모든 약점과 시련 그리고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자신의 삶을 애정하도록 만들어주는 거리의 철학에 대한 근거 있는 예찬이거든요. 어느 한 철학학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진지한 자세로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가능케 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평이하면서도 유머 있는 언어로 역설하는 이 책을 추천합니다.

 

 

좋은 죽음이 별로 없어요. 죽어가는 사람이 직접 대본을 쓰는 그런 죽음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들이 자신의 대본을 직접 쓰는 방법이에요.”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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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권하다 -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 더퀘스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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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책. 번역도 좋다. 고대철학과 오늘의 삶을 쫀쫀히 연결시키는 작업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한데, 평이하고 유머스러운 문체로 그것을 해냈다. 각 철학들 간 관계에 대한 이해가 좋고, '거리철학'의 중요성에도 십분 공감한다. 철학이 본래 삶의 고통에 대한 인간의 자기이해 자기응답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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