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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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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8. 학교에 대해서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까다로운 학칙도 없고 수치에 의한 평가도 없고 격렬한 순위 경쟁도 없었습니다. 물론 따돌림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나는 커다란 '제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책을 통해 그러한 나 자신만의 별도의 '제도'를 멋지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곳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니,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아이라도, 교실에서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의 존재 방식='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주고 평가해 주는 공동체의 혹은 가정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p224~227]

 

 

 

   9.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들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한 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에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p236, 237]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애초에 일인칭 '나'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런 글쓰기 방식을 이십 년쯤 유지했습니다. 단편에서는 이따금 삼인칭을 쓰기도 했지만 장편에 있어서는 줄곧 일인칭 '나'로 밀어붙였습니다. 물론 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레이먼드 챈들러=필립 말로가 아닌 것처럼) 각각의 소설에 따라 '나'의 인물상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계속 일인칭으로 쓰다 보니 현실의 '나'와 소설 주인공인 '나'의 경계선이 때로는- 쓰는 사람 쪽에서도, 또한 읽는 사람 쪽에서도- 얼마간 불명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라고 할까, 나 자신이 가공의 '나'를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소설 세계를 만들어내고 크게 펼쳐가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고 범위가 커지면서 '나'라는 인칭만으로는 약간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나(남성형)'와 '나(여성형)'라는 두 종류의 일인칭을 각 장별로 분류해가며 썼는데 그것도 일인칭 기능의 한계를 타개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인칭만을 사용한 장편소설은 『태엽 감는 새』(1994, 1995)가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분량이 그만큼 길어지자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서 곳곳에 다양한 소설적 연구를 도입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서술을 끼워 넣고 긴 서간문을 끼워 넣고 ‥‥‥. 아무튼 온갖 화법의 테크닉을 도입해 일인칭 구조적 제한을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까지가 한계다'라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다음 『해변의 카프카』 (2002)에서는 반절만 삼인칭으로 대체했습니다. 카프카 소년의 장은 그때까지 해왔던 대로 '나'라는 화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외의 장은 삼인칭입니다.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절이나마 삼인칭의 목소리를 도입해서 소설 세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은 이 소설을 쓰면서 『태엽 감는 새』의 집필 때보다 기법적인 면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느꼈습니다. [p240~242]

 

 

 

   10.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 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나 자신이 즐거우면 그게 결과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는 준열한 자기 상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도 프로로서 필수 조건입니다.

  ‥‥‥ (중략)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 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은 뒷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더라도, 지하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앞뒤로 줄을 서 있더라도, 서로의 뿌리가 이어진 것은 (대부분의 경우)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로 낯선 이들로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각자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땅속에서, 일상생활이라는 표층을 뚫고 들어간 곳에서, '소설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내가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독자입니다. 나는 그런 독자들이 즐겁게 읽어주기를, 뭔가 느껴주기를 희망하면서 매일매일 소설을 씁니다. [p269~272]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소설 한 권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요즘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하루가 아니라 내가 만난 이들의 하루하루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 소설을 읽는데 집중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사소한 등장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은 눈을 부릅뜨고 매일매일의 소설을 읽는다. 날마다 클라이막스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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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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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4,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그런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 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도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나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106]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 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 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p110]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몹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p114]

5, 자, 뭘 써야 할까?

   각자 '잘하는 분야'를 척척 전면에 내세우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한 반대로 묘한 우울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삼십오 년 전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건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선행하는 세대에게서 엄격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어쩐지 부단스러워서 (라고 할까, 귀찮아서)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본을 떠나 외국의 잡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 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데 뭐, 이렇게 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 그게 뭐가 나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할 것이다,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째 좀 낯 두꺼운 소리 같습니다만.

   그것이 현실로 증명되었는지 어떤지, 지금 이렇게 주위를 빙 둘러봐도 나 자신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문학에서는 뭔가 증명되는 일이라고는 영원히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됐든, 삼십오 년 전에도 지금 현재도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에는 거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앞으로 삼십오 년쯤 지난 다음이라면 다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지만, 그 전말을 내가 지켜보는 건 연령상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든 내 대신 잘 지켜봐주십시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세대만의 소설적 소재가 있고, 그 소재의 형태나 무게로부터 역산逆算해서 그것을 실어 나를 비이클의 형태나 기능이 설정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소재와 비이클의 상관성에서, 그 접면接面의 바람직한 자세에서, 소설적 리얼리티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어떤 시대에도 어떤 세대에도 각각 고유의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소설가에게는 스토리에 필요한 소재를 꼼꼼히 수집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마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 - 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 거 아닌가요? [p138~140]

6.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 장편소설 쓰기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한숨 돌리고(그때그때 다르지만 대개는 일주일쯤 쉽니다)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내 경우 첫머리부터 아무튼 죄다 북북 고쳐버립니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봅니다. 나는 아무리 긴 소설이라도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이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척척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 단연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순되는 부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이 중간에 홱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시간 설정이 앞뒤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삐걱거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조정해서 이치에 맞는 정합적인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째로 빼버리고 어떤 부분은 늘리고 에피소드를 여기저기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태엽 감는 새』를 썼을 때처럼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뭔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몇 개의 장을 통째로 삭제하고 삭제한 것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다른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만들어 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상당히 극단적인 예고, 대개의 경우 삭제한 부분은 삭제된 채 그대로 사라집니다.

   그 고쳐쓰기 작업은 한두 달은 걸립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일주일쯤 쉬었다가 두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것도 첫머리부터 쭉쭉 고쳐나갑니다. 단지 이번에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꼼꼼하게 고칩니다. 이를테면 풍경 묘사를 세밀하게 써넣거나 대화의 말투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스토리 전개에 맞지 않은 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한 번 읽어서 알기 어려운 부분은 쉽게 풀어써서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대수술이 아니라 세세한 수술을 하나하나 더해가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한숨 돌리고 그다음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술이라기보다 수정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소설의 전개에서 어떤 부분의 나사를 단단히 조여야 할지, 어떤 부분의 나사를 조금 헐렁하게 풀어둘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장편소설은 말 그대로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석구석까지 나사를 팽팽히 조여버리면 독자는 숨이 막힙니다. 군데군데 문장을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쪽의 호흡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체와 세부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문장의 세밀한 조정을 행합니다. ‥‥‥(중략)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혹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이에 여행을 하거나 번역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합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장 등에서의 제작 과정에, 혹은 건축 현장에 '양생養生'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둔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양생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고 맙니다.

   그렇게 일단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작품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

   양생도 진득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 수정도 마쳤다. 자, 이 단계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제삼자의 의견입니다.

‥‥‥(중략)

   몇 번이나 퇴고를 해야 하느냐,라고 물어도 정확한 횟수까지는 잘 모릅니다. 원고 단계에서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쳤고, 출판사에 건너가 교정지가 된 다음에도 상대가 지겨워할 만큼 몇 번씩 교정지를 내달라고 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맣게 해서 돌려주고, 그렇게 해서 재차 보내준 교정지를 다시 새까맣게 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이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는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매지고 책상에 늘어놓은 열 자루 정도의 HB 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낍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일이 진짜로 재미있어요. 하염없이 하고도 전혀 질리지 않습니다.

   내가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망치질'을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그 기분, 나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것과 똑같은 일을 나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한계다. 이 이상 더 고치면 도리어 맛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라는 미묘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는 쉼표를 빼고 넣는 것을 예로 들어 그 포인트를 적확하게 시사한 것입니다.

‥‥‥(중략)

   시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매우 소중한 요소입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할 소설의 싹을 틔우고 통통하게 키워가는 '침묵의 기간'입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기분을 내 안에 서서히 만들어 갑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 들이는 시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일으켜나가는 기간, 일어선 것을 냉암소에서 진득하게 '양생하는' 기간, 그것을 밖으로 꺼내 자연의 빛을 쏘이고 단단히 굳어져가 는 것을 세세히 검증하고 쿵쾅쿵쾅 망치질을 하는 시간‥‥‥ 그런 과정 하나하나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작가 본인만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의 퀄리티는 틀림없이 작품의 '납득성'이 되어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p152~166]

7.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 tell a story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 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 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깊은 어둠의 힘에 대항하려면, 그리고 다양한 위험과 일상적으로 마주하려면 반드시 피지컬한 강함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한지 수치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강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강한 편이 훨씬 더 좋겠지요. 그리고 그 강함이란 타인과 비교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강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강함을 말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작업을 통해 그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차츰차츰 깨달았습니다. 마음은 가능한 한 강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장기간에 걸쳐 그 마음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담는 용기인 체력을 증강하고 관리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p 188~190]

   자신이 가진 (많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유지할 것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방식의 질을 레벨업 해나갈 것인가. 그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만의 스토리와 자신만의 문체를 각자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프란츠 카프카를 예로 들자면, 그는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작품의 이미지로 보면 그야말로 예민하고 육체적으로 허약한 느낌이 들지만, 의외로 몸을 만드는데 진지하게 신경을 썼던 모양입니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여름이면 몰다우 강에서 하루 1마일(1,600미터) 씩 수영을 하고 날마다 시간을 들여 체조를 했다고 합니다. 카프카가 진지한 얼굴로 체조에 열중하는 모습, 잠깐 좀 구경해 보고 싶지요?

   나는 살아가고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나만의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나갔습니다. 트롤럽 씨는 트롤럽 씨의 방식을 찾아냈고 카프카 씨는 카프카 씨의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방식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가 제각각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만의 持論지론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방식이 조금이나마 참고가 된다면 -말을 바꾸자면 그것이 조금이나마 보편성을 가졌다면,이라는 얘기입니다 - 나로서는 물론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p200~202]

   밑줄 긋기를 옮기다 보니 박완서 선생님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밑줄 긋기에 대한 정의를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 상태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내려놓으셨다. 그렇다. 오래된 책에서 밑줄의 흔적을 발견하면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심경이 고스란히 짚어져 오기도 한다. 책은 그렇게 위로를 남기고 당연하다는 듯이 잊힌다. 다시 펴 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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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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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카메라의 파노라마와 와이드앵글이 있다. 우선 외롭고 척박한 계곡이 있다. 틀림없이 햇살이 머리통 위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쬐는 곳일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 일하려면 꼭 모자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수리가 나는 하늘 아래로 서늘한 오두막이 있고 두 남자와 개 두 마리가 있다. 독수리는 영감을 주지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개는 밖에 잘 있다. 시간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이제 일을 하러 가거나 낮잠을 자러 가면 된다. 그런데 안토닌은 가지 않고 서서 꼬박 10분간을 망설인다. 10분이 중요하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10분은 이제 막 사형대에 올라 총살을 기다리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황제의 칙사가 뛰어와서 총살이 취소되었음을 알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10분간 도스토예프스키는 임사 체험을 했다. 그렇다면 10분 동안 안토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돈을 지불하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의 손을 움직여 돈을 꺼내게 만들었을까? 그냥 밥 한 끼 나눠 먹었을 뿐인데. 토니오 입장에선 돈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토닌은 이런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다고. 어쩌면 안토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토닌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 울지? 그제야 나는 안토닌이 두 세트의 나이프와 유리잔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식후의 포도주와 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느끼게 된다. 눈물은 외로운 계곡에 외롭게 사는 소몰이꾼이라는 삶의 '조건'이 이끌어낸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토니오도 나와 같은 것을 보았다. 토니오도 안토닌이 살아온 '시간'과 그의 삶의 '조건'을 봤다. 혼자서 대충 때운 수없이 많은 식사를 봤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던 많은 시간을 봤다. 그의 삶이 그에게 준 쓰라림을 봤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노동과 외로움을 깊이 존중했다. 토니오도 울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였다. 고독한 노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이 준 쓰라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함께 있는 것의 온기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냥 그렇게 있었던 순간이다. 순수한 순간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순간이다. 안토닌에게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서로 좋은 순간이다. 두 사람은 안았고 나는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의 승화 같은 것을 함께 느낀다. 오두막에선 이 모든 일이 말없이 진행되었다. "자네 애쓰고 살았네" 같은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두막의 침묵 속에서는 수많은 말이 오갔다. 가장 좋은 대화는 말없이도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대화고, 라디오로 치면 말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와 음색, 침묵을 알아듣는 것과 같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헤아리고 상상한다. 연결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고독한 이유다. 우리는 침묵 속의 상상을 팽개쳤다. 타인을 빠른 속도로 규정하거나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털어낼 존재처럼.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그는 어쩌면 왼손잡이일 수도 있다)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오로지 안토닌의 삶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다. 고독했지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지상에서 그 몸짓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안토닌. 우리는 안토닌을 영원히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중에서 『아홉째 날, 좋아하는 이야기』부분 p 253~255

          

 

      이 이야기는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중에서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의 부분을 옮기고 덧붙여둔 글이다. '존 버거'의 글은 오래전에 읽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책인데 '알라딘'에서 구입할 때 할인이 1도 없어서 의아했던 책이다. '글로 쓴 사진'이란 제목이 무얼 뜻하는지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잊었다. '정혜윤'을 통해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시 파노라마와 와이드 앵글에 잡힌 사진을 본다. 그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10분을 카메라를 통해 응시한다.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과 토니오를. 그리고 그전의 안토닌과 토니오의 시간을, 또 그전의 두 사람의 시간을, 그 전전의, 전 전 전의 시간을 생각한다. 어떤 일이 생기기까지 거기에 축적된 시간의 역사를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정혜윤은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냥 죽어버린 1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 그 사람의 주변, 그 사람의 세계가 함께 죽어가는 것이라고, 한 사람의 역사로서 호명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들을 읽는다. 그래서 이 책을 쉽게 읽을 수가 없다. 하루하루의 날들을 하나씩 떼어서 거기에 나오는 책들의 세계에 다시 발을 디디면서 계단을 오르듯 읽게 된다. 이 아홉째 날의 챕터는 '사랑하는 00과 함께 살기'다. 그리고 인용한 글은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인데 그 개들은 소를 치며 사는 안토닌의 개들이다. 안토닌의 24시간을 함께 하는 개들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안토닌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저녁식사와 안토닌의 침묵 속에 담긴 무수한 언어들을 듣는다. 개들의 시선을 그저 받아 적은 것처럼 존 버거는 담아냈다. 그렇게 담아내는 작가와 그 시선을 풀어쓰는 작가 사이에서 글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바라본다. 원래 그랬던 건지 그 옷을 입혀서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놀랍다.

     이 아홉째 날의 마지막 이야기는 경북 칠곡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대구에 사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 장덕준씨다. 그는 하루 5만 보를 걸었다 한다. 일을 하면서 5만 보라~! 세상에, 그 걸음수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루 열세 시간 달려 다니면서 음식을 날라도 2만 몇 천보다. 그 걸음에도 절인 배추처럼 녹초가 되곤 하는데 물류센터에서 5만 보의 걸음은 충분히 가늠된다. 산길을 걷고, 들길을 걷는 5만 보와는 차원이 다른 살인 무기로 변하는 걸음이다. 그런 걸음들이 계속된다면 몸의 기능들은 지쳐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착했던, 부모님께는 친구 같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에게 애틋한 오빠였던 그도 한 가지 사안만큼은 아버지와 자주 싸우곤 했다 한다. 세월호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죽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돈 받고 합의하고 말지 왜 저렇게 하느냐고 유족들을 비난했다.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내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죽어버렸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그 질문,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장덕준씨가 어떻게 일하고, 어쩌다 죽음에 이르렀는지 동료들의 증언과 도움이 필요했지만 밥줄이 달린 동료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희망은 다른 데서 왔다. 같이 아파하는 시만들과 아버지와 함께 세월호를 비난했던 아버지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국회에 가고 쿠팡에 진실을 요구하는 길을 함께했다.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모들은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편안한 숨이다. 그들에게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드물 것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테니까.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 - 피난처뿐이다. p264

 

      이 부분을 읽는데 마음이 미어진다. 더 이상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을 쉴 수 없는 부모님들의 사진이 파노라마로 보인다. 아직도 진행형인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사진도 덩달아 주말의 명화의 영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랑은 같이 싸워주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엔딩 자막으로 올라간다. 사랑한다면 같이 무기를 들고 싸워주는 것,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겠다. 여운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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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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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가는 표용적인 인종인가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 [p16]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p29]

   2, 소설가가 된 무렵

   삼십여 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봄날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이따금 원고지와 오래도록 애용해온 몽블랑 굵은 만년필이 그리워지지만). 그리고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이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苦役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57]

   3, 문학상에 대해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에서 노벨 문학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작가가 되고 싶을까? 내가 노벨 문학상을 타고 싶을까? 노벨 문학상이 대체 뭔데? 너무나 많은 이류 작가에게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 읽을 마음도 나지 않는 그런 작가들에게. 애초에 이 상을 타려면 스톡홀름까지 찾아가 정장을 차려입고 연설을 해야 한다. 노벨 문학상이 그런 수고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단연코 노다.'[p72]

   문학상에 대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지금까지 나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려고 해왔습니다. 상을 타고 타지 않고는 작품의 내용과는 많은 경우, 기본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제고 그러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자극적인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던 대로 우연히 문예지에 실린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그 작은 칼럼을 보고, 이제 슬슬 문학상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 얘기해둘 적당한 때인지도 모른다,라고 문득 마음먹었습니다. 계속 얘기하지 않고 있으면 묘한 오해를 살 가능성도 있고, 그걸 어느 정도 올바르게 정정해두지 않으면 그 오해가 '견해'로 정착될 우려도 있으니까.

   그렇기는 하나 그런 사안에 대해 (그냥 속물적인 사안이라고 할까요) 생각하는 바를 얘기하기가 상당히 어렵군요. 경우에 따라서는 솔직하게 말할수록 더 거짓말 같고, 또한 오만하게 비칠지도 모릅니다. 던진 돌멩이가 더 강하게 내게로 되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가장 득책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분도 분명 어딘가에 계실 것이다, 하고.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가 행해온 작업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하물며 결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형태로든 보강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는 '좋은 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성가심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올그런은 메달을 휙 내던져버리고 챈들러는 스톡홀름행을 아마도 거부할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입장에 처했다면 실제로 어떻게 했을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처럼 문학상의 가치는 사람 사람마다 각각 달라집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입장이 있고 개인의 사정이 있고 개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한 묶음으로 취급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문학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도 단지 그것뿐입니다.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률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p82~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그가 어떤 소설가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공이 탄탄한 작가였다는데 새삼 감탄한다.

  다 읽고 나면 소설을 쓰는 쪽에 가까워지려나하고 시작했는데, 웬걸 더 멀어졌을 뿐이다. 필사하듯 밑줄 긋고 옮겨 적는 부분만 한 가득이다. 역시 소설보다는 잘 읽히는 하루키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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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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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

​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자두나무 정류장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나흘 폭설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간혹 빈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던 발길도

점방에 담배 사러 나가던 발길도

이장선거 끝난 마을회관에 신발 한 켤레씩을 보탠다

무를 쳐 넣고 끓이는 닭국 냄새 가득한 방에는

벌써 윷판이 벌어졌고 이른 낮술도 한자리 차고앉았다

 

허나, 절절 끓는 마을회관 방엔 먼 또래도 없어

잠깐 끼어보는 것조차 머쓱하고 어렵다 나는

젖은 털신을 탈탈 털어 신고 다시 빈집에 든다

 

아까 낸 눈길조차 금시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 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가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당겨 덮고 누웠다

 

하얀 어둠도 눈 발 따라 푹푹 쌓이는 저녁

이번엔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

흰 무채처럼 쏟아지는 찬 외로움도 예외일 순 없다

 

 

 배꼽

​ ​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 ​

 

살구나무 변소

 

부안 감다리집 마당에는

살구나무 변소가 있는데요

 

볼일 보러 변소로 가면

살구나무가 치마 내리는 것을 훔쳐보다가는요

엉덩이 까고 후딱 앉으면요 후딱

시치미 떼고 서 있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 변소가 있는데요

안 쳐다본 척하다가는요

볼일 다 보고 치마 올리고 일어서는 순간에요

후딱 변소 안을 들여다보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있는데요

 

네 칸 널판지 조각을 대어 변소 문짝을 만들었다가는요

뜬금없이 위쪽 한 칸을 떼어내고는

오살헐 살구나무 풍경을 덧대놓은 것이 문제는 문제이겠지만요

 

그보담은 오살헐 살구나무와 은근한 뭣을 즐기기라도 하듯

살구나무 변소를 찾는 사람도 문제는 문제인데요

 

그니깐, 죽으면 죽었지 살구나무 변소에는

얼씬도 못할 줄 알았던 서울내기 제 색시가요

구린내 나는 살구나무 변소를 갔다 오더니만요

살구나무 변소 참 좋다, 하는 것도 문제는 큰 문제이겠지요

 

알고 보면, 살구나무 변소는요

부안 감다리 사는 울 어머니 작품이기도 하지요

 

 

목젖

평소엔 그냥 목젖이었다가

내가 목놓아 울 때​

나에게 젖을 물려주는 젖

젖도 안 나오는 젖

같은 젖,

허나 쪽쪽 빨다보면

울음이 죄 삼켜지는 젖

무에 그리 슬프더냐, 나중에

나중에 내가

가장 깊고 긴 잠에 들어야 할 때

꼬옥 물고 자장자장 잠들라고

엄마가 진즉에 물려준 젖​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그의 시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잠시 접어둔 채 무작정 찾아가 보고 싶은 내면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본과 문명의 근대적 삶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 해도,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맹목적인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늦추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는 '의미의 소통'보다는 '감각의 촉발'을 지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활과 현실의 상처와 고통은 커져가는데, 시는 이러한 현실을 감싸 안는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주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화된 내면의 감각으로 점점 더 숨어들고 있다.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감성적인 소통의 도구인 시조차 이제는 지식인의 산물로 변질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쩌면 박성우의 시는 조금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발상과 어법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분주한 우리 시단의 과잉 언어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현실을 중심에 놓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관된 그의 시 세계는, 낡고 오래되었지만 오히려 가장 미래지향적인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작 자기가/ 이 동네 마지막 일소인 줄도 모르고/ 황순이 앞세워 느릿느릿 비탈밭을 간다"라는 "늙다리 금수 양반"(「일소」)처럼 조금은 어리석고 무심해도 충분히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박성우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 아마도 지금 시란 무엇인가 혹은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러한 마음과 생각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설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 문학평론가 하상일

 

 

 

시인의 말

어떤 금기처럼

내 방에 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나를 온전히 비춰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쓴 시뿐이므로.

          2011년 11월

          박성우

 

   이 시집의 시들은 아름답다. 투명하고 정갈하기 짝이 없는 이 시들은 가녀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들이 시인의 성품을 닮았다. 살짝 스치는 미풍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금선(琴線)의 울음처럼 여리면서도 강하다. 슬프고 쓸쓸해 보이지만, 결코 애상(哀傷)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이 시집에서 자주 익살을 부리는데, 너무 우습고, 너무 착하고 순수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남도 말맛을 사용한 그의 익살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걸직한 입담과는 전혀 다른 진경을 보여주는데, 구수하면서도 사뭇 고상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투명하고 정갈한 아름다움. 조용하게 던지는 그의 말들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새로운 언어의 발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현기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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