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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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8. 학교에 대해서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까다로운 학칙도 없고 수치에 의한 평가도 없고 격렬한 순위 경쟁도 없었습니다. 물론 따돌림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나는 커다란 '제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책을 통해 그러한 나 자신만의 별도의 '제도'를 멋지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곳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니,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아이라도, 교실에서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의 존재 방식='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주고 평가해 주는 공동체의 혹은 가정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p224~227]

 

 

 

   9.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들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한 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에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p236, 237]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애초에 일인칭 '나'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런 글쓰기 방식을 이십 년쯤 유지했습니다. 단편에서는 이따금 삼인칭을 쓰기도 했지만 장편에 있어서는 줄곧 일인칭 '나'로 밀어붙였습니다. 물론 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레이먼드 챈들러=필립 말로가 아닌 것처럼) 각각의 소설에 따라 '나'의 인물상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계속 일인칭으로 쓰다 보니 현실의 '나'와 소설 주인공인 '나'의 경계선이 때로는- 쓰는 사람 쪽에서도, 또한 읽는 사람 쪽에서도- 얼마간 불명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라고 할까, 나 자신이 가공의 '나'를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소설 세계를 만들어내고 크게 펼쳐가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고 범위가 커지면서 '나'라는 인칭만으로는 약간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나(남성형)'와 '나(여성형)'라는 두 종류의 일인칭을 각 장별로 분류해가며 썼는데 그것도 일인칭 기능의 한계를 타개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인칭만을 사용한 장편소설은 『태엽 감는 새』(1994, 1995)가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분량이 그만큼 길어지자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서 곳곳에 다양한 소설적 연구를 도입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서술을 끼워 넣고 긴 서간문을 끼워 넣고 ‥‥‥. 아무튼 온갖 화법의 테크닉을 도입해 일인칭 구조적 제한을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까지가 한계다'라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다음 『해변의 카프카』 (2002)에서는 반절만 삼인칭으로 대체했습니다. 카프카 소년의 장은 그때까지 해왔던 대로 '나'라는 화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외의 장은 삼인칭입니다.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절이나마 삼인칭의 목소리를 도입해서 소설 세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은 이 소설을 쓰면서 『태엽 감는 새』의 집필 때보다 기법적인 면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느꼈습니다. [p240~242]

 

 

 

   10.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 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나 자신이 즐거우면 그게 결과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는 준열한 자기 상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도 프로로서 필수 조건입니다.

  ‥‥‥ (중략)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 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은 뒷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더라도, 지하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앞뒤로 줄을 서 있더라도, 서로의 뿌리가 이어진 것은 (대부분의 경우)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로 낯선 이들로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각자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땅속에서, 일상생활이라는 표층을 뚫고 들어간 곳에서, '소설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내가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독자입니다. 나는 그런 독자들이 즐겁게 읽어주기를, 뭔가 느껴주기를 희망하면서 매일매일 소설을 씁니다. [p269~272]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소설 한 권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요즘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하루가 아니라 내가 만난 이들의 하루하루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 소설을 읽는데 집중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사소한 등장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은 눈을 부릅뜨고 매일매일의 소설을 읽는다. 날마다 클라이막스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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